-7장 나아가기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단순한 지식들은 전혀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현생인류와 같은 종으로 분류된다는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축적되고 또 얼마나 많은 원시인류가 사라져갔는지 혹은 각 인류의 등장시점은 언제인지 또 어떤 특이점 등이 있는지에만 집중해서 그야말로 시험을 위한 지식의 암기 수준에 불과했었기 때문에 기본 용어 외에는 시험이 끝나고서 내 머리에서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를 느낄수 있을지 끝까지 다 읽을수 있을지 전혀 알수가 없었다.
제일 먼저 눈길을 끈건 제목이었지만-읽어나갈수록 책 제목을 정말 잘 지었단 생각은 변함없음- 지금은 원시인류의 이동경로도 재밌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순전히 작가의 역량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에 살았던 인류도 아닌데 굳이 관심이 생길까 싶지만, 작가가 썼듯이 세계 어느 지역이었든 관계없이 ‘쉼 없이 이동하는 삶‘이란 어느 인류에게나 해당하는 보편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 몇 천년 전에 융성했다 사라진 인류의 터전이 한반도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역사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수 있기 때문에 상관없이 흥미로웠고 끊임없이 상상하게 만드는 문장들 덕분에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에 많은 페이지를 읽는건 안된다. 머릿 속에 욱여넣는 기분이 든달까 ㅠㅠ
어쨌든 천천히 읽어야한다는 것!

˝어쩌면 삶은 그냥 그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차용권은 없으며 무엇이든 유효기간이 있다. 오늘 우리가 머무르는 곳의 열쇠는 내일이면 다른 존재의 손에 있을지도 모른다.˝(P209)






쿠르간을 만들던 동쪽 사람들은 기원전 3000년대 초반 어느시기에 브리튼섬에 도착했다. 이 방랑자들은 기반암에 컵과 반지를 닮은 무늬를 새기고, 거대한 암석을 원형으로 세우는 데골몰하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했을 것이다. 스톤헨지와 에이브버리 유적이 있는 곳부터, 뼈처럼 흰 석회질 암석 위로 탐스러운 풀이 자라는 영국제도 끄트머리까지, 수많은 장소에서 수천명이 한데 모여 저마다 비슷한 방식으로 돌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이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언제나 이동하며살던 사람들에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곳에 머물러 사는 이들의 모습은 어떻게 보였을까?

-쿠르간: 약 5000년 전 이래 유라시아 북부 초원
지대에 살던 유목민들이 남긴 거대한 무덤을 일컫는다. 지하에 묘실을 놓고 흙이나 돌로 봉토를
쌓아 밀들었다. 단독묘 또는 합장묘이며 무기와 장
신구. 희생된 동물, 마차 등의 껴문거리가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 P206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나야 이주민들과 함께 온 것은 언어와 금속제 무기만이 아니었다. 러시아와 크로아티아, 에스토니아, 독일, 헝가리, 라트비아에서 발굴한 500구의 유골 중6구에서 흑사병의 원인균인 유럽 페스트균의 유전체가 발견되었다. 스텝 지대 사람들의 풍토병이 수천 년 후 유럽을 휩쓴 유행병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 P207

한곳에 오래 머무른 집단일수록 공동체의 유대는 그 땅에 더욱 깊이 뿌리내리게 되고, 새로운 관념이나 집단이 도래하면 큰저항이나 단절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집단이 한장소를 영원히 점유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때로는 새로운 소규모 집단이 이미 정착해 있던 훨씬 큰 집단에 유입되어그들을 대체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이 처음부터 새로운 집단의 의도였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삶은 그냥그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차용권은 없으며 무엇이든 유효기간이 있다. 오늘 우리가 머무르는 곳의 열쇠는 내일이면 다른 존재의 손에 있을지도 모른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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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결론도 충격적이었지만 작품속에 등장하는 사파리 사냥 장면도 충격적이었다. 자동차를 타고 사자, 물소, 코뿔소, 영양 등을 따라가 무시무시한 총으로 총알이 다할 때까지 쏘아 사냥하고 가죽을 벗기는 행위들이 너무 혐오스러웠고, 이렇게 사라진 동물이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지 정보를 조금만 검색해도 우르르 쏟아질 정도니까 정말 인간만이 행할 수 있는 만행들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헤밍웨이가 이 작품을 쓴 의도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이 작품을 읽고 자연을 거슬러 자행되는 인간의 잔악함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다면 일단은 성공한 것이겠지!


이제 점심시간이었다. 모두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두 겹으로 된 초록색 식당용 텐트 장막 아래 앉아 있었다.
"라임 주스를 들겠나, 레몬스쿼시를 들겠나?" 매코머가물었다.
"김릿‘으로 하겠습니다." 로버트 윌슨이 대답했다.
"나도 김럿으로 할래요. 뭘 좀 마셔야겠어요." 매코머의아내가 말했다. - P65

그러나 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잠자리에 들기 전에모닥불 옆에서 위스키소다를 마시고 모기장을 친 침대에 드러누워 밤의 정적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프랜시스 매코머에게는 그 일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끝난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부분은 씻을 수 없을 만큼돋보이는 채, 그 일은 일어났던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그는 비참한 마음으로 그 일을 부끄럽게 떠올렸다. 아니, 부끄러움 이상으로 싸늘하고 공허한 공포감을 온몸으로 느꼈다.
한때는 자신만만하던 자리에 두려움이 마치 차갑고도 끈적한텅 빈 동굴처럼 그대로 남아, 이내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그런느낌이 지금까지도 그에게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 P102

그들은 가파른 강둑을 내려가 개울을 건넌 뒤 옥석을 기어오르고 돌아서 강둑에서 뻗어 나온 나무뿌리에 매달려 반대편 강둑으로 올라갔다. 개울을 따라 걸어가 마침내 매코머가 쏜 첫 발을 맞고 사자가 달아난 곳에 다다랐다. 운반인들이풀 줄기로 가리키는 쪽을 보니 짤막한 풀밭에 시꺼먼 피가 묻어 있고 그 핏줄기는 개울 기슭 나무숲 속으로 나 있었다.
"어떻게 할 참이오?" 매코머가 물었다.
"별 도리가 없죠. 차를 몰고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강둑이 너무 가파르니까요. 놈이 좀 더 뻣뻣하게 굳은 뒤 저하고같이 안으로 들어가 찾아보죠." 윌슨이 대답했다. - P111

나이 먹은 원주민 운반인 콩고니는 핏자국을 쫓으면
서 앞장섰고, 윌슨은 큰 엽총을 겨누어 들고 풀밭이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나 살폈으며, 또 다른 운반인
은 귀를 기울이며 앞을 응시했고, 매코머는 총을
 겨눠 들고 윌슨 곁에 붙어 섰다. 이렇게 그들 일행이 풀숲으로 막 들어서려는 바로 그 순간, 매코머는 피 때문에 목구멍이 메어 기침 비슷한 신음 소리를 내며획 하고 풀밭에서 뛰어나오는 사자를 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미친 듯이 달려 개울 쪽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 P114

 그리고 그때 자동차가 길을 뛰어넘기라도 하듯이 크게 흔들리더니 일행은 물소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앞으로 넘어질 듯이 돌진하는 물소의 거대한 몸집이며,털이 성긴 먼지투성이 피부며, 널찍하게 솟은 뿔이며,콧구멍이 널찍하고 길게 늘어진 주둥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총을 들고 쏠 자세를 취하려 하자 윌슨이 "차에서 쏴선 안 돼요. 이 바보 같은 양반아!" 하고 외쳤다. 그 순간 매코머는 윌슨에 대한 증오심을 느꼈을 뿐 공포 같은 건 전혀 느끼지 않았다. 
브레이크가 걸리더니 자동차가 옆으로 미끄러지며 가까스로 멈춰 섰다. 윌슨이 한쪽에서 내리고 그는 다른 쪽에서 내렸는데, 차가 미처 멈추기 전이라 발이 땅바닥에 부딪쳐 비틀거렸다. 그러고 나서 매코머는 총을 치켜들어 달아나는 물소를 겨눠 쏘았다. 총알이 한 발 두 발 탕탕하고 물소 몸에 맞는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앞쪽 어깨와 어깨 사이에 퍼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꾸준히 달리고 있는 물소를 향해 총알을 있는 대로 계속 쏘아 댔다. 다시 총알을 장전하려고 더듬거리는데 물소가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 P128

"아, 이거야말로 진짜 사냥이었어.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마거릿, 당신도 신나지 않았어?" 그가 물었다.
"난 끔찍이 싫었어요."
"왜?"
"싫었어요. 혐오스러웠다고요." 그녀가 불쾌한 표정으로내뱉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처음 물소를 보고 쫓아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겐 뭔가 변화가 일어났어. 마치 댐이 무너져 내렸다고나 할까.
순수한 흥분이었지." 매코머가 윌슨에게 말했다.
"겁쟁이 마음을 깨끗이 씻어 버린 모양이죠. 사람들에겐참으로 묘한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거든요." 윌슨이 말했다. - P134

사악해 보이는 물소의 작은 두눈이 보이는가 싶더니 머리통이 아래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그는 갑자기 눈을 멀게 하는 백열의 섬광이 머릿속에서 터지는 느낌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윌슨은 어깨 위에 총을 놓고 쏘려고 한쪽 옆으로 몸을 숙였다. 매코머는 똑바로 선 채 코를 겨누어 쓰고 있었다. 그러나 겨냥이 조금 높아 총알은 번번이 묵직한 뿔에 맞은 뒤 슬레이트 지붕에 맞은 듯 파편만을 날려 보냈다. 남편이 물소의 뿔에 찔릴 것 같았기 때문에 차안에 있던 매코머 부인은 6.5밀리미터 만리처 엽총으로 물소를 향해 쏘았고, 탄환은 남편의두개골 한쪽 밑에서 5센티미터가량 위쪽에 맞고 말았다.
프랜시스 매코머는 물소가 모로 넘어져 있는 곳에서 2 미터도 안 되는 곳에 얼굴을 밑으로 하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아내는 남편의 시체 옆에
꿇어앉고 윌슨은 그 곁에 서 있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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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일까? 그것은 두려움도 공포도 아니야. 그것은 그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허무라는 거지. 그것은 모두 허무였고, 인간도 한낱 허무에 지나지 않거든 모든 것이 오직 허무뿐, 필요한 것은 밝은 불빛과 어떤 종류의 깨끗함과 질서야. 허무 속에 살면서 전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지.  - P15

좋아! 이제 그는 죽음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언제나 두려워했던 것은 단 한 가지, 고통뿐이다. 고통이 너무 오래 계속되어 그를 나가떨어지게 하기 전까지는 누구 못지않게 고통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무엇인가가 몹시 고통을 주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무너지리라고 느낀 바로 그 순간 고통이 갑자기 멎어 버렸다. - P80

 그녀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꿈속에서 그녀는 롱아일랜도에 있는 자기 집에 가 있었다. 그녀의 딸이 사교계에 데뷔하기 전날 밤이었다. 어찌 된 셈인지 그녀의 아버지도 그곳에 나타나 몹시 거들먹거렸다. 바로 그때 하이에나가 너무큰 소리를 내어 우는 바람에 그녀는 번쩍 눈을 떴고, 잠깐 동안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회중전등을 손에 들고 해리가 잠든 뒤에 들여놓은 또 다른 침대를 비춰 보았다. 모기장 아래 그의 몸뚱이를 볼 수 있었지만 어찌 된 셈인지 다리는 모기장 바깥으로나와 침대 옆을 따라 아래쪽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붕대가모두 풀려 있어 그녀는 차마 그것을 쳐다볼 수 없었다.
"몰로! 몰로! 몰로!" 여자가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해리! 해리!" 하고 불렀다. 이어서그녀의 음성은 점차 높아졌다. "해리! 제발 오, 해리!"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고 숨을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텐트 밖에서는 하이에나가 그녀의 잠을 깨울 때와 똑같이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가슴이 고동치는 소리 때문에 그녀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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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문학 외에 역사, 사회과학, 총류 등으로 분류되는 책들을 읽다가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니
심적으로 몹시 편안하다.
헤밍웨이 소설은 오래 전에 여러 권 읽었었다.
한 작가의 책을 한번에 몰아서 읽고 나면 다시 그 작가의 책을 읽게 되기까지 시간이 길어진다.
이상하게 다시 들게 되지가 않는다.
헤밍웨이의 책을 읽은 것도 너무 오래 전이지만
편하게 시작할 수 있는 단편이어서 선뜻 구매를 할 수 있었다.
책을 펼치면 헤밍웨이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이 먼저 나온다. 읽어보니 내가 작가는 아닐지라도
공감이 된다. 최상의 경우일지라도...

˝글을 쓴다는 것은 최상의 경우일지라도 고독한 삶입니다. 작가들을 위한 조직체는 작가의 고독을
덜어 줍니다만, 그것이 작가의 창작을 진작시켜 줄지는 의문입니다. (중략) 작가는 혼자서 작업할 수밖에 없으며, 만약 그가 훌륭한 작가라면 그는
날마다 영원성 또는 영원성의 부재를 직면해야 합니다.˝

전체 142쪽의 아주 작은 책인데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깨끗하고 밝은 곳‘, ‘살인자들‘, ‘병사의 집‘, ‘킬리만자로의 눈‘,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 등의 단편인데 앞의 세 편은 10-20여 페이지에 불과한 초단편이다.
‘킬리만자로의 눈‘은 오래 전 읽었지만 역시 기억나지는 않았는데 읽다보니 읽었다는 것을
알겠더라는...

크레브스는 길 건너편을 지나다니는 아가씨들이 마음에들었다. 프랑스나 독일 아가씨들보다 그들의 모습이 한결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여자들이 사는 세계는 자신이 사는 세계와 달랐다. 그는 아가씨 중 한 사람과 사귀고 싶었다. 그러나그럴 만한 가치가 없었다. 아가씨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는 그런 모습이 좋았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귀찮게 말을 걸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다고어느 한 아가씨를 몹시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을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부질없고 가치 없는 짓이었다. 일이 다시 잘되어 나가고 있는 지금에야 더더욱 쓸데없는 짓이었다.
-‘병사의 집‘ 중에서 - P38

이제 모든 게 끝났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그에겐 그것을 끝맺을 기회가 영영 없을 것이다. 술한잔 마시는 것을두고 시비를 하다가 이렇게 끝나 버릴 것이었다. 오른쪽 다리에 괴저(壞疽)가 발생한 뒤로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고통과 더불어 공포감까지도 사라져, 지금 느끼는 것이라곤오직 격심한 피로감과 이렇게 끝나는 것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지금 다가오고 있는 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그는 호기심을 느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지난 몇 해 동안 죽음은 강박 관넘처럼 그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심한 피로감이 죽음을 이렇게 쉬운것으로 만들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킬리만자로의 눈‘ 중에서 - P51

 잠시 뒤 비행기의 주위가 어두워지더니 폭풍우 속으로 들어갔는데, 비가 굉장히 많이 쏟아져 마치 폭포 속을 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그곳을 빠져나오자 콤프턴은 뒤를돌아보면서 싱긋 웃고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앞쪽에 보이는 것은 전 세계처럼 폭이 넓은 데다 거대하고 높이 솟아 있으며 햇빛을 받아 믿을 수 없을 만큼 하얗게 반짝이는 킬리만자로의 네모난 꼭대기였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지금 가는 곳이바로 그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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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1-10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는 단편도 좋고 장편도 좋고 ^^

저도 헤밍웨이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은하수 2023-01-10 22:05   좋아요 0 | URL
전 다섯편 중에서 그래도 꼽으라면 역시 뒤쪽어ㅣ실린 조금 긴 단편인 킬리만자로의 눈과 프랜시스 매코머가 확실히 좋아요 전 장편파입니다^^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좋은 작가의 글은 심신안정에 도움이 되네요
읽고나서 솟아나는 만족감, 희열~~ 넘 좋아요
 

내게 찾아온 불안이 머릿속에서 허겁지겁 많은 일을 하기 시작한다. 잡다하게 떠오른 생각들을 하나의 문장들로 순식간에 엮어낸다. 몰아친다고 해야 적당할까.
아이디어와 낱말 등이 비약적으로 연결되고 내가 관여한 여러 모임의 방향성과 앞으로 할 일까지 쓸데없이 생각하느라 뇌 공장이 멈추지 않는 것 같다. 
‘이건 불안, 바로 너의 짓이라는 걸 알고 있어. 사실 너는 잘못이 없어.
중요한 일이 다가오고 있다고 판단해서 거기에 대비하고 싶어 하는 것뿐이잖아. 그래 너는 지금 내게 분명한 동력을 제공하고 있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 뇌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려고 마구 돌아가는것 같은데 난 좀 버거워.‘ - P78

버스를 기다리면서 내가 막 뿌려놓은 글을 역순으로 쭉 읽어봤는데 어쩐지 뿌듯했다. 몇 해 전 혐오 세력들에게 표적이 되어 내 모든 트윗이 탈탈 털리고 공격을받았다. 그렇게 내 트윗을 집요하게 모아서 뿌리고 공격했던 이들은 지금 다 어디서 뭐 하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이것 봐, 나는 아직도 시시껄렁한 트윗을 마구마구 올리는 트잉여인 것이다! 나의 승리라고. 하하하하하하. 유치하다고? 유치하라지. - P80

어떤 직업이든 이런 종류의 다정함 뒤에는 자신감과 실력이 있는 것 같다. 교사도 그렇다. 학교와 교실이라는 터전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어내야 하는 학생들 곁에서 나는 다정한 교사이고 싶다. 실력을 갖추고 힘을 빼고 싶다. 학생들이 아파하면 그저 ‘미안한 마음으로 곁에 있어주고 싶고, 작은 일도 크게 격려하느라 호들갑스럽고 싶다. 마취가 풀려간다. 너무 아프다. 진통제를 먹어야겠다. - P93

-길이 난 것이다.
경기도교육연수원이 교사 자격연수 온라인 강의를 위해미리 배포한 교재에 나에 대한 온갖 루머의 종합 격인원고가 실렸다.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왜곡과 편견, 힘*오를 부끄러움도 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낸 글이었다. 이걸 정정해보겠다고 거대 언론사와 2년을 싸워 승소를 하고 이를 증언한다고 용기 내 방송에까지 나갔건만, 그 먼길을 돌고 돌아 내가 봐야 하는 것이 당시의 조선일보]보다 더 신이 나서 지껄이는 이 따위 글이라니.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것도 1급 정교사 자격연수라는 공인된국가연수프로그램에서. - P94

상당한 스트레스가 있었어도 이번 일은 그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우리 사회의 성평등을 가로막는 수많은걸림돌과 장벽들 사이에서 많은 교사들이 어떤 길을 만들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연대는 우왕좌왕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각자 노련한 업무 담당자처럼자기 할 일을 하면서 빠르게 연결되어 연대를 형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연수원의 시정 조치가 반드시 뒤따르게해야겠지만 설령 결과가 그에 못 미친다고 하더라도 이미 이것만으로도 작은 승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길이 난것이다. 분명히 없던 길이었는데. 이번 연대의 ‘길‘을 보고 그 위를 걸으며 다행히 나는 희망을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은 안도감을 느낀다. 냉
소로 점철된 삶으로 내 삶의 무게가 이동할 것 같지
는 않다. - P97

페미니즘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일상과 교실을 꼼꼼하게 다시 뜯어보았다. 김승희의 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2」에서 말하는 ‘당연의 세계‘와 ‘물론의 세계‘가 부서지는 경험 속에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향한 차별과 혐오의 반복된 역사를 공부하고 그것이 여전히 현실에 존재함을 깨닫는 일은 차라리 놀랍지 않았다. 내가 그 모든 일에 그렇게까지 무신경하고 무지한 채로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에 비하면 그 깨달음마저도 나 혼자 했다기보다 시대가 한 일이었다. 
공용화장실에 숨어 남자 여섯 명을 보내고 기다렸다가 여성이 들어오자 무참히 살해한 사건을 검경 및 언론에서 여느 때처럼 ‘묻지마살인‘으로 명명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거리로나와 피해자를 추모하며 ‘여성혐오범죄‘에 대한 사회적책임을 성토하게 된 시대였다. 미투운동의 물결이 일고수많은 용기가 서로 교차하고 연결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나는 내 시대에 감사했다. -페미니즘 교육 중에서 - P100

-분투
우울증을 앓으면서 책을 읽지 못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문장이 그냥 흩어져버려서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짧은 글도 힘들어서 읽은 문장을 또 읽고 또 읽고 하다가포기했다. 그러다 한두 달 전부터 책이 읽혔다. 문장과문단을 넘어 무려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것 같았지만 내가 정말 이걸 하나 싶어서 책을읽는 나를 계속 관찰했다. 예전의 읽기를 빠른 걷기에 비유한다면 지금은 재활치료 중 걷기다. 속도도 느리고 읽었던 문장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 또 읽어야 했다. 야트막한 언덕을 높고 험한 산 오르듯 넘었다. 몇 걸음 올랐다가 잠깐 쉬고 다시 일어나 걷듯, 문장들 사이에서 숨을골랐다. 답답하지만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서 나에게는 그게 너무 희망찼다. 회복의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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