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까 모든 우울증이 유일하다. 마치 눈송이처럼, 본질적인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각자 복제 불가능한 복잡한 형태를 뽐낸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우울증을 분류하기를 즐겨서 양극성 대 단극성, 중증 대 경증, 외인성 대 내인성, 단기 대 장기 등으로(이런 식의 분류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나누어 묶는다. (이런 분류는 진단과 치료에서 실망스러울 정도로 효용성이 제한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성별과 연령, 문화적 차이에 따른 우울증의 특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여기서근본적인 의문 하나가 제기된다. 그런 특징들은 남자와 여자, 어린이와 노인, 아시아인과 유럽인 사이의 생물학적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각 집단에 부과되는 기대들로 인한 사회적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답은 모든 경우에서 둘 다 맞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그것이 발생한 정황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 P285
서구 사회에서의 여성대 남성의 우울증 발병률은 일률적으로 2대 1 정도로 나타난다. 세상은 남성의 지배 아래에 있으며 그래서 여성은 상대적으로 힘든 인생을 산다. 여성은 신체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가난해지기도 쉽고 폭력의 희생자가 되기도 쉽다. 교육의 기회는 더 적고 일상적으로 굴욕을 겪을 가능성은 더 높다.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인 지위를 잃기도 쉽다. 남편에게종속되기도 쉽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가정 외에는 자기실현의 장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울증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반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은 항상 일과 가정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전업주부와 일을 가진 기혼 여성의 우울증 발생 비율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두 가지 상황이 다 큰 스트레스인 것으로 짐작된다. (일하는 기혼 남성의 우울증 발병률은 여성에 비해 훨씬 낮게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모든 문화권에서 우울증, 공황장애, 식사장애는 여성이 더 많이 겪지만 자폐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알코올중독 발병률은 남성이 높다는 것이다. 12 - P288
여성 우울증의 특징들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데 반해 남성 우울증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는 편이다. 많은 남성우울증 환자들이 우울한 감정들과 싸울 때 의기소침해지는 것이 아니라 폭력, 약물남용, 일중독에 빠지기 때문에 우울증으로 진단받지 않는다. 우울증으로 보고되는 숫자는 여성이 남성의 두 배나 되지만 자살에 이를 확률은 남성이 여성보다 네 배나 높다." 독신이거나 이혼하거나 상처한 남성이 기혼 남성보다 우울증 발병률이 훨씬 높다. 남성 우울증 환자들은 완곡한 표현을 빌리자면 ‘흥분‘ 증세를 보일 수도 있으며, 모르는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아내를 폭행하거나 약물 복용을 하거나 사람들에게 총을 쏘는 행동을 한다. - P293
우울증 환자라 하더라도 병을 숨기고 부모 노릇을 할 수는 있겠지만 대개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가 되지 못한다. 이들 중 일부는 자녀들로 인해 쉽게 동요하고 그 결과 엉뚱한 행동을 하지만, 대다수는 아예 자녀들에게 반응을 보이지 못하며 애정도 없고 위축되어 있다. 이들은 분명한 통제력이나 규율도갖고 있지 못하다. 자녀들에게 줄 애정도, 따뜻한 배려도 거의 없다. 그리고 자녀들의 요구에 대해 무력감을 느낀다. 행동 조절도 되지 않아 분명한 이유도 없이 화를 냈다가 죄책감이 발작처럼 밀려오면 역시 분명한 이유도 없이 넘치는 애정을 보인다. 이들은 자녀들이 자신의 문제들을 통제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들은 자녀들의 행동이나 결핍의 표현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이들의 자녀들은 잘 울고 분노에 차 있고 공격적이다. 이런 아이들은 남을 배려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반대로 남을 배려하는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세상의 모든 고통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특히 어린 여자아이들은 지나친 감정 이입으로 스스로 불행해지기 쉬운데, 그것은 어머니의 기분이 달라지는것을 보지 못하고 자라서 그들 자신도 기분의 탄력성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 P297
새머로프는 중증 우울증을 지닌 사람들의 자녀들을 연구해 왔다. 그 결과 그들의 인지 능력이 처음에는 또래 집단과 같다 하더라도 두 살 무렵부터 처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다 네 살쯤 되면 그들은 또래보다 확연히 "더 슬퍼하고, 상호작용이 적고, 위축되고, 기능도 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주로 다섯 가지 해석이 가능하며 그 다섯 가지가 다양한 모자이크를 이룬다고 그는 믿는다. 그 다섯 가지 해석은 유전적 특질, 아이들이 자신이 체험한 것을 모방하는 감정이입 반사, 부모의 반응 부족으로 인해 관계 시도를 중단하는 학습된 무기력, 병에 걸린 부모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특혜를 누리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런 역할을 맡기로 결심하는 역할 연기, 불행한 부모 사이의 의사소통에 아무런 즐거움이 없는 것을 본 결과인 위축이다. - P300
노인 우울증은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우리 사회가 노년 자체를 우울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노인은 필연적으로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노인의 불행을 보살피지 않게 되며, 그결과 많은 이들이 말년을 불필요한 극심한 정서적 고통 속에서 산다. 이미 1910년에 에밀 크레펠린은 노인의 우울증을 퇴행기 멜랑콜리라 불렀다. 그 이후 전통적인 가족 구조가 붕괴되고 노인이중요성을 잃게 되면서 노인 우울증은 더욱 악화되어 왔다. 양로원의 노인들은 집에 사는 노인들에 비해 두 배 정도 우울증에 걸리기쉬우며 실제로 시설 거주자의 3분의 1이상이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노인 환자를 대상으로 한 위약 효과가 표준치보다 상당히 높은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노인 환자들이 약물치료를 받고 있다고 믿는 데서 얻는 심리적인 효과뿐아니라 위약 실험을 둘러싼 상황들에서도 효과를 얻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실험을 하려면 피실험자의 상태를 점검하고 면담을 실시해야 하는데 그런 주의 깊은 통제와 관심이 의미 있는 효과를 지니는 것이다. 노인들은 많은 관심을 받을수록 기분이 나아진다. 이런 작은 관심이 그토록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끔찍이도 외로운 것이 분명하다. - P311
우울증은 심각한 정신 기능 손상의 전조가 되는 경우도 많다. 우울증은 어느 정도는 치매와 알츠하이머병을 예고하며, 반대로 그런 질환들이 우울증을 유발하거나 우울증과 공존할 수도 있다. 알츠하이머병은 노화보다 더 세로토닌 수치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는 치매나 알츠하이머병의 핵심인 혼미와 인지 능력 쇠퇴에 대한 치료가 어려운 형편이지만 그런 질환들에 흔히 동반되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은 완화시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리거나 깊은 슬픔에 젖지 않고서도 정신적 혼란에 빠질 수 있으며, 현재로서는 정신적인 고통을 완화시키는 정도가 알츠하이머병이나 치매 환자가 받을 수 있는 치료다. (대개는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세로토닌 수치 저하가 치매의 원인이 되는지 밝혀내기 위한 실험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그보다는 뇌 손상이 원인일가능성이 크다. 물론 뇌 손상은 세로토닌 합성을 관장하는 부위를포함한 뇌의 다양한 부위들의 손상을 의미하며, 이것은 치매와 세로토닌 수치 저하가 공통된 원인에 의한 개별적인 결과들이라는 뜻이 된다. - P316
나는 동성애자로서의 자긍심("gay pride")이라는 말이 강조되는 것이 사실은 많은 동성애자들이 그 반대의 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프리드먼과 다우니는 이렇게 썼다. "동성애자인것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이 자기혐오와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이어진다. 이 자기혐오는 부분적으로는 공격자와 자신을 방어적으로 동일시한 결과다." 처음 성적 자각이 일어날 때 동성애자가 되고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이 한동안 성전환에 대한 환상에 젖는다. 동성애자임을 수치스러워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동성애자 자긍심 운동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다. 만일 당신이 동성애자임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자긍심을 외치는 이들의 조롱을 살 것인데, 그렇게 같은 동성애자들에게조차 배척당한다면 진짜로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을내면화한다. 우리는 처음 겪은 타인으로부터의 동성애 혐오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에 대한 기억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다. - P336
이누이트들은 보통 대가족이다. 열두 명쯤 되는 가족이 몇 달씩 집 안에서만, 그것도 한 방에 모여서 생활한다. 너무 어둡고 추워서 도무지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고 아버지만 여름에 비축해 놓은 말린 물고기가 나지 않도록 한 달에 한두 번 사냥이나 얼음 낚시를 나갈 뿐이다. 그린란드에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집 안에 기분 좋게 불을 피워 놓는 일은 불가능하며, 작은 물개 기름 램프 하나만 켜놓는다. 이렇듯 온 가족이 좋든 싫든 한데 모여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불평을 하거나,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거나, 화를 내거나, 다른사람을 비난할 여지가 없다. 이누이트들은 불평 자체를 금기로 여긴다. 그들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거나 웃고 떠들거나 바깥 얘기나 사냥 얘기를 할 뿐 자신에 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린란드의 우울증은 기온과 빛의 간접적 결과이며, 자신에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관습의 직접적인 결과다. 이 사회에서는 육체적으로 너무 친밀하기 때문에 감정적인 절제가 필요하다. 불친절해서도 냉랭해서도 아니며 단지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린란드 원주민으로서는 최초로 정신과 의사가 된 포울 비스고르는 은근한 끈기가 엿보이는 온순하고 덩치 큰 남자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물론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면 모두들 알기는 하지요. 하지만 간섭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전통입니다. 우울해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으니까요. 우울중 환자는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믿으며 무가치한 존재가 다른 사람까지 성가시게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은 간섭할 엄두를 내지 못해요." - P343
이누이트들에게는 우울중이 너무도 사소한 문제이고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무능력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대로 무시된다. 그들의 침묵과 우리의 매우 언어화된 자기 인식 사이에는 정신적 고통과 그것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수많은 방식들이 존재한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마음에 담아 둘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는 정황, 인종, 성, 전통, 국가 등이 모두 관련되며, 무엇을 완화시키고 무엇을 악화시키고 무엇을 견디고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것들에 의해 결정된다. 우울증은 (그 위급성과 증세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들은) 개인의 생화학과는 동떨어진 힘들에의해, 즉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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