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중독성 물질 남용은 하나의 순환을 이룬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중독성물질을 남용하게 되고, 물질 남용자는 삶이 엉망이 되기 때문에 그결과 우울증에 걸린다. 그렇다면 ‘유전적으로‘ 알코올중독 성향을지닌 사람들이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그 결과로 우울증을 겪게 되는것일까, 아니면 ‘유전적으로‘ 우울증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자가 치료의 형태로 술을 마시는 것일까? 둘 다 맞다. 세로토닌 수치의 저하는 알코올중독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우울증이 악화되면 알코올중독도 더 심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의 관계도 성립된다. (즉 알코올 섭취가 늘면 세로토닌 수치가 떨어진다.) 금지된약물을 이용한 자가 치료는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합법적인 항우울제는 부작용을 먼저 보이고 점차 약효를 나타내는 데 반해,
중독성 물질은 대개 약효를 먼저 보이고 점차 부작용을 나타낸다. 코카인 대신 프로작을 복용하는 것은 늦게라도 바람직한 효과를 보려 함이며, 항우울제 대신 코카인을 선택하는 것은 즉각적인 만족을 갈망하는 것이다. - P355

중독 문제와 우울증을 함께 안고 있는 환자들의 경우 대부분두 질환이 동시에 진행되며 각각의 질환이 치료를 요하고 나머지것을 악화시킨다. 이 질환들은 도파민계 내에서 상호작용한다. 우울증을 치료하기 전에 중독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대중적인 생각은 터무니없다. 그것은 자신의 불행을 꾹꾹 눌러 두고 있는 이에게 그 불행이 한껏 피어나도록 방치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반면 기분이좋아지면 더 이상 중독성 물질을 찾지 않을 것이므로 중독은 그대로 방치하고 우선 우울증을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은 육체적, 정신적 의존성이라는 현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미국 마약단속국 부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컬럼비아대학교 중독 및 물질 남용 센터 책임자로 있는 허버트 클레버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중독 분야에 대해 배운 것이 있다면, 일단 중독이 되면 어떻게 중독이 되었는지는중요하지 않으며 자체의 생명력을 지닌 질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알코올중독이면서 우울증인 환자를 항우울제로 치료하면 우울증이 아닌 알코올중독자가 되는 거죠." 물질 남용의 원천적인 동기를 제거한다 해서 물질 남용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 P360

절제가 최고의 치료법이기 때문에 물질 남용자에게 항우울제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청교도적 견해는 사디스트적인 것이다. 우울증이 알코올중독의 주된 동기인 ‘우울증 알코올중독자‘의 경우 항우울제가 술에 대한 욕망을 경감시킬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먼저 우울증을 완화시키는 방식의 시도가 중독성 물질부터 끊는 시도보다 관대한 것이다. 알코올중독자에게 SSRI 계열의 항우울제를 투여하면 알코올을 끊기가 더 쉬워진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들을 보더라도 항우울제가 물질 남용에 효과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분명 우울증은 정신역동적 치료에 의해 크게 완화될 수 있으며, 단순히 관심을 가져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간 치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우울증 알코올중독자‘들은 끔찍한 고립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으며 그런 고립감을 없애 주면 우울 증세들이 완화되는 경우가 많다. - P360

 지금까지 가장 흔한 중독 물질은 카페인과 니코틴이다. 중독 전문가인 한의사가 내게 토로하기를, 해외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간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이틀 연속 꼼짝도 못 할 정도의 숙취와 끔찍하게 우울한 기분에 시달렸으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에 허브 차밖에 없어서 카페인 금단현상을 겪은 것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진한 커피몇 잔을 마시자 거뜬해졌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는데 커피는 단순히 후천적인 취향이 아니었어요. 그건 중독이고 마시지 않으면 금단현상을 겪게 되지요." 우리 사회는 무능력 상태를 초래하지 않는 중독에 대해서는 관대한 반면, 특정 중독 물질들에 대해서는 가끔 사용하는 것조차 막고 있다. 마리화나 사용의 합법화와 담배의 불법화에 대한 논쟁은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의견불일치를 보여 준다.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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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열린 출구는 단 하나밖에 없다.
네 속으로 파고 들어가라.
-에리히 케스트너

나는 글쓰기를 독학으로 배웠다. 처음부터 쓴다는 목적을 가진건 아니었다. 시작은 읽기였다. 그러니까 독학이 아니라 독서였다. 철학 책이나 시집, 평론집에 주로 손이 갔다. 공통점이 있다. 한 페이지를 읽으면 한두 개씩 밑줄 긋고 싶은 황금 같은 문장이 나오는 책들이다. "그대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고 얻을 것은 세상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의 문장은 이상하게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서의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서 만들지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 P9

 문학 평론가 황현산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재미난 표현을 빌리자면, 빨리 쓰기 시작해야 글을 쓰기 전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긴장한 가운데 생각나고 글이 글을 물고 나온다는 것, 그 엄정한 사실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이야기를 문장마다 곁들였다. 108배처럼 곡진한 반복진술이다. 쓰기의 문장들은 서로 충돌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하다. 그러나 글쓰기가 막히는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저마다의 진실값을 갖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P18

행동하는 자만이 배우기 마련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내 식대로 수영을 글쓰기로 번역해 본다. 수영장 가기(책상에앉기)가 우선이다. 그다음엔 입수하기 (첫문장 쓰기). 락스 섞인물을 1.5리터쯤 먹을 각오하기 (엉망인 글 토해 내기). 물에 빠졌을 때 구해 줄 수영하는 친구 옆에 두기 (글 같이 읽고 다듬기). 다음 날도 반복하기.
모든 배움의 원리는 비슷하지 않을까. 결심의 산물이 아닌 반복을 통한 신체의 느린 변화라는 점에서 말이다. 펜을 움직여야 생각이 솟아나는 것처럼, 물속에서 팔다리를 부단히 움직이면 나도 수영을 배울 수 있을 텐데, 물에는 가지 않고 이렇게 책상에만 앉아 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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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는 올라와서 두어달은 이 공간에 적응하는 기간이었고 이제 차츰 밀착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건 마치 메마른 바위에 포자가 날아와 붙었다가 미세한 습기와 바람과 햇볕을 받으며 삶의 거처를 만들어가는 이끼가 자라는 과정과도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무료함을 극복했다. 아침 해가 뜨면 텐트에서 기어나와 왕복 서른걸음이 되는 트랙을 한시간 가까이 걸으면서 몸을 풀었고 셋 동작을 실시했다. 팔굽혀펴기 동작에서 다리 오므리고 쪼그렸다가 일어나며 허공으로 펄쩍 뛰었다가 다시 쪼그리고 팔굽혀펴기로 돌아가는 동작이 하나였다. 이렇게 셋 동작을 겨우 열번밖에 못하다가이제는 열여섯번까지 늘렸다. 트레이너가 말하던 스무개를 채울작정이었다.
장마철이 지나자 무더위가 덮쳤다. 시멘트 덩이의 굴뚝은 달아올라 섭씨 오십도를 넘어섰고 한낮에는 육십도에 육박하기도 했다. 그 정도면 달걀이 반숙되는 온도였다. 따라서 운동은 새벽 다섯시쯤에 일어나서 여섯시 무렵까지가 적당했고 늦어도 일곱시쯤에는 마쳐야 했다. 코펠에 식수를 부어 고양이 세수를 하고 칫솔질을하고 박박 밀어버린 머리에도 물을 끼얹어 닦아냈다. 지난달부터 날씨가 무더워지면서 전동 바리캉을 올려 머리를 밀어버렸고 그뒤부터는 아예 면도기로 얼굴과 머리까지 한번에 밀었다. 밤에는 팬티 차림이었지만 낮에는 오히려 기능성 긴팔 셔츠에 트레이닝복을 걸치는 게 덜 뜨거웠다. - P101

이일철이 철도종사원양성소의 이학년이 되던 해에 만주사변이터졌다. 교실에 들어온 선생이 군에서 파견된 교관 장교를 소개했고 그는 지난주에 일어난 만주 류탸오후(柳)사건과 그 경과에대하여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는 먼저 있었던 장춘의 완바오(산 수로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조선인 이민 농민들과 중국인들과의 마찰을 간단히 설명했다. 중국인들이 토지를 외지인에게 임대할 때 현청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무효라는 규정을 속이고 계약한 뒤에 조선 농민들의 수로에 관한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측과 중국군의 작은 충돌이 있고 나서, 만주로의 조선인이민을 일본 진출의 선발대로 인식하던 일본 측은 이를 빌미로 중국이 조선인을 억압 침탈하고 있다는 선전을 조선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케 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을 진실이라 믿었던 조선인들이 경성은 물론 지방 도처에서 화교의 음식점이나 상점 농장 등을 습격했다. 사정을 알게 된 조선인 각 사회단체가 진상을 알리고일본 측의 선전에 속지 말라면서 조중 인민의 친선을 강조하고 나섰다. 물론 학교에 틀어박혀 기술교육을 받는 데 전념하고 있던 이일철이 이런 실정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일본은 진작만주 전역에 철도를 놓고 남만주철도회사를 설립하였으며, 이로써일본인 및 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관동군의 만주 주둔을 합리화하였다. 일본군 참모부는 만주의 실질적 점령을 위하여, 중국이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할 목적으로 만주철도를 먼저 폭파했다고 선전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관동군 특무의 작전으로 실시된 자작극이었다. 교관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로 현 정세보고를 마무리했다.
"우리의 영용무쌍한 대일본제국의 관동군은 단지 오일 만에 요동성과 길림성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오랫동안 종속되어왔던이 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에 이르렀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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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까 모든 우울증이 유일하다. 마치 눈송이처럼, 본질적인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각자 복제 불가능한 복잡한 형태를 뽐낸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우울증을 분류하기를 즐겨서 양극성 대 단극성, 중증 대 경증, 외인성 대 내인성, 단기 대 장기 등으로(이런 식의 분류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나누어 묶는다. (이런 분류는 진단과 치료에서 실망스러울 정도로 효용성이 제한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성별과 연령, 문화적 차이에 따른 우울증의 특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여기서근본적인 의문 하나가 제기된다. 그런 특징들은 남자와 여자, 어린이와 노인, 아시아인과 유럽인 사이의 생물학적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각 집단에 부과되는 기대들로 인한 사회적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답은 모든 경우에서 둘 다 맞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그것이 발생한 정황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 P285

서구 사회에서의 여성대 남성의 우울증 발병률은 일률적으로 2대 1 정도로 나타난다. 세상은 남성의 지배 아래에 있으며 그래서 여성은 상대적으로 힘든 인생을 산다. 여성은 신체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가난해지기도 쉽고 폭력의 희생자가 되기도 쉽다. 교육의 기회는 더 적고 일상적으로 굴욕을 겪을 가능성은 더 높다.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인 지위를 잃기도 쉽다. 남편에게종속되기도 쉽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가정 외에는 자기실현의 장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울증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반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은 항상 일과 가정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전업주부와 일을 가진 기혼 여성의 우울증 발생 비율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두 가지 상황이 다 큰 스트레스인 것으로 짐작된다. (일하는 기혼 남성의 우울증 발병률은 여성에 비해 훨씬 낮게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모든 문화권에서 우울증, 공황장애,
식사장애는 여성이 더 많이 겪지만 자폐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알코올중독 발병률은 남성이 높다는 것이다. 12 - P288

여성 우울증의 특징들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데 반해 남성 우울증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는 편이다. 많은 남성우울증 환자들이 우울한 감정들과 싸울 때 의기소침해지는 것이 아니라 폭력, 약물남용, 일중독에 빠지기 때문에 우울증으로 진단받지 않는다. 우울증으로 보고되는 숫자는 여성이 남성의 두 배나 되지만 자살에 이를 확률은 남성이 여성보다 네 배나 높다." 독신이거나 이혼하거나 상처한 남성이 기혼 남성보다 우울증 발병률이 훨씬 높다.  남성 우울증 환자들은 완곡한 표현을 빌리자면 ‘흥분‘ 증세를 보일 수도 있으며, 모르는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아내를 폭행하거나 약물 복용을 하거나 사람들에게 총을 쏘는 행동을 한다.  - P293

우울증 환자라 하더라도 병을 숨기고 부모 노릇을 할 수는 있겠지만 대개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가 되지 못한다. 이들 중 일부는 자녀들로 인해 쉽게 동요하고 그 결과 엉뚱한 행동을 하지만, 대다수는 아예 자녀들에게 반응을 보이지 못하며 애정도 없고 위축되어 있다. 이들은 분명한 통제력이나 규율도갖고 있지 못하다. 자녀들에게 줄 애정도, 따뜻한 배려도 거의 없다. 그리고 자녀들의 요구에 대해 무력감을 느낀다. 행동 조절도 되지 않아 분명한 이유도 없이 화를 냈다가 죄책감이 발작처럼 밀려오면 역시 분명한 이유도 없이 넘치는 애정을 보인다. 이들은 자녀들이 자신의 문제들을 통제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들은 자녀들의 행동이나 결핍의 표현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이들의 자녀들은 잘 울고 분노에 차 있고 공격적이다. 이런 아이들은 남을 배려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반대로 남을 배려하는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세상의 모든 고통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특히 어린 여자아이들은 지나친 감정 이입으로 스스로 불행해지기 쉬운데, 그것은 어머니의 기분이 달라지는것을 보지 못하고 자라서 그들 자신도 기분의 탄력성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 P297

새머로프는 중증 우울증을 지닌 사람들의 자녀들을 연구해 왔다. 그 결과 그들의 인지 능력이 처음에는 또래 집단과 같다 하더라도 두 살 무렵부터 처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다 네 살쯤 되면 그들은 또래보다 확연히 "더 슬퍼하고, 상호작용이 적고, 위축되고, 기능도 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주로 다섯 가지 해석이 가능하며 그 다섯 가지가 다양한 모자이크를 이룬다고 그는 믿는다. 그 다섯 가지 해석은 유전적 특질, 아이들이 자신이 체험한 것을 모방하는 감정이입 반사, 부모의 반응 부족으로 인해 관계 시도를 중단하는 학습된 무기력, 병에 걸린 부모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특혜를 누리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런 역할을 맡기로 결심하는 역할 연기, 불행한 부모 사이의 의사소통에 아무런 즐거움이 없는 것을 본 결과인 위축이다.  - P300

노인 우울증은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우리 사회가 노년 자체를 우울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노인은 필연적으로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노인의 불행을 보살피지 않게 되며, 그결과 많은 이들이 말년을 불필요한 극심한 정서적 고통 속에서 산다. 이미 1910년에 에밀 크레펠린은 노인의 우울증을 퇴행기 멜랑콜리라 불렀다. 그 이후 전통적인 가족 구조가 붕괴되고 노인이중요성을 잃게 되면서 노인 우울증은 더욱 악화되어 왔다. 양로원의 노인들은 집에 사는 노인들에 비해 두 배 정도 우울증에 걸리기쉬우며 실제로 시설 거주자의 3분의 1이상이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노인 환자를 대상으로 한 위약 효과가 표준치보다 상당히 높은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노인 환자들이 약물치료를 받고 있다고 믿는 데서 얻는 심리적인 효과뿐아니라 위약 실험을 둘러싼 상황들에서도 효과를 얻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실험을 하려면 피실험자의 상태를 점검하고 면담을 실시해야 하는데 그런 주의 깊은 통제와 관심이 의미 있는 효과를 지니는 것이다. 노인들은 많은 관심을 받을수록 기분이 나아진다. 이런 작은 관심이 그토록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끔찍이도 외로운 것이 분명하다. - P311

우울증은 심각한 정신 기능 손상의 전조가 되는 경우도 많다. 우울증은 어느 정도는 치매와 알츠하이머병을 예고하며, 반대로 그런 질환들이 우울증을 유발하거나 우울증과 공존할 수도 있다. 알츠하이머병은 노화보다 더 세로토닌 수치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는 치매나 알츠하이머병의 핵심인 혼미와 인지 능력 쇠퇴에 대한 치료가 어려운 형편이지만 그런 질환들에 흔히 동반되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은 완화시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리거나 깊은 슬픔에 젖지 않고서도 정신적 혼란에 빠질 수 있으며, 현재로서는 정신적인 고통을 완화시키는 정도가 알츠하이머병이나 치매 환자가 받을 수 있는 치료다. (대개는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세로토닌 수치 저하가 치매의 원인이 되는지 밝혀내기 위한 실험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그보다는 뇌 손상이 원인일가능성이 크다. 물론 뇌 손상은 세로토닌 합성을 관장하는 부위를포함한 뇌의 다양한 부위들의 손상을 의미하며, 이것은 치매와 세로토닌 수치 저하가 공통된 원인에 의한 개별적인 결과들이라는 뜻이 된다.  - P316

나는 동성애자로서의 자긍심("gay pride")이라는 말이 강조되는 것이 사실은 많은 동성애자들이 그 반대의 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프리드먼과 다우니는 이렇게 썼다. "동성애자인것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이 자기혐오와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이어진다. 이 자기혐오는 부분적으로는 공격자와 자신을 방어적으로 동일시한 결과다." 처음 성적 자각이 일어날 때 동성애자가 되고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이 한동안 성전환에 대한 환상에 젖는다. 동성애자임을 수치스러워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동성애자 자긍심 운동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다. 만일 당신이 동성애자임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자긍심을 외치는 이들의 조롱을 살 것인데, 그렇게 같은 동성애자들에게조차 배척당한다면 진짜로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을내면화한다. 우리는 처음 겪은 타인으로부터의 동성애 혐오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에 대한 기억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다. - P336

이누이트들은 보통 대가족이다. 열두 명쯤 되는 가족이 몇 달씩 집 안에서만, 그것도 한 방에 모여서 생활한다. 너무 어둡고 추워서 도무지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고 아버지만 여름에 비축해 놓은 말린 물고기가 나지 않도록 한 달에 한두 번 사냥이나 얼음 낚시를 나갈 뿐이다. 그린란드에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집 안에 기분 좋게 불을 피워 놓는 일은 불가능하며, 작은 물개 기름 램프 하나만 켜놓는다. 이렇듯 온 가족이 좋든 싫든 한데 모여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불평을 하거나,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거나, 화를 내거나, 다른사람을 비난할 여지가 없다. 이누이트들은 불평 자체를 금기로 여긴다. 그들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거나 웃고 떠들거나 바깥 얘기나 사냥 얘기를 할 뿐 자신에 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린란드의 우울증은 기온과 빛의 간접적 결과이며, 자신에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관습의 직접적인 결과다. 이 사회에서는 육체적으로 너무 친밀하기 때문에 감정적인 절제가 필요하다. 불친절해서도 냉랭해서도 아니며 단지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린란드 원주민으로서는 최초로 정신과 의사가 된 포울 비스고르는 은근한 끈기가 엿보이는 온순하고 덩치 큰 남자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물론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면 모두들 알기는 하지요. 하지만 간섭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전통입니다. 우울해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으니까요. 우울중 환자는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믿으며 무가치한 존재가 다른 사람까지 성가시게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은 간섭할 엄두를 내지 못해요." - P343

이누이트들에게는 우울중이 너무도 사소한 문제이고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무능력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대로 무시된다. 그들의 침묵과 우리의 매우 언어화된 자기 인식 사이에는 정신적 고통과 그것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수많은 방식들이 존재한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마음에 담아 둘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는 정황, 인종, 성, 전통, 국가 등이 모두 관련되며, 무엇을 완화시키고 무엇을 악화시키고 무엇을 견디고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것들에 의해 결정된다. 우울증은 (그 위급성과 증세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들은) 개인의 생화학과는 동떨어진 힘들에의해, 즉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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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는 잠자리에서 되도록 먼 곳인 원형 통로의 반대편 구석에 용변 장소를 정해두었다. 처음에는 난간을 잡고 시도해보았지만,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쭈그리고 앉은 자세를 유지하려면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쏠리거나 뒤로 자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발가락들은 운동화 안에서 독수리의 발처럼 잔뜩 오그리고 있을 것이다. 겨냥을 잘해야 할 텐데, - P7

이진오가 한달 전 깊은 밤중에 기어오른 이곳은 발전소 공장 건물의 끝 쪽에 자리 잡은 굴뚝 위다. 높이는 사십오 미터, 아파트 십육층과 엇비슷할 것이다. 요즘 아파트 건물이 보통 이삼십층 높이라서 그에 익숙했던 탓인지 이 굴뚝 위가 별로 높아 보이지도 않았고 눈앞이 아찔할 정도는 더욱 아니었다. 그렇기는 해도 공간이 좁고 사방이 휑하니 열려 있어서 처음에는 난간 너머 허공으로 걸어나갈 뻔했다. 굴뚝의 지름은 육 미터이고 주위를 두른 둥근 테라스의 폭은 일 미터, 그리고 원둘레를 걸으면 이십보쯤 될 것이다. 아니, 거기서 그가 잠자는 공간을 빼야 하니까 열여섯걸음쯤 될 게다. 이미 다른 도시의 크레인에 올라갔던 이들이 있어서 생존하는 방법은 학습이 되어 있던 터였다. 이진오도 잘 아는 용접공 영숙이누나는 농성할 때 크레인의 운진실을 숙소로 삼았고 철탑 기둥들사이에다 토마토며 화초를 키우기도 했다. 그녀는 밤마다 그 거대한 조선소의 철탑이 나무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아마도 거대한 쇳덩어리에 올라앉은 작고 여린 살아 있는 몸을 쇠의 부속품처럼 물질적으로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건너편 다른 크레인들이 모두 활엽수로 변하고 바다 이곳저곳에서 거대한 나무들이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광경을 바라보곤 했다. 진오는 그녀처림이 굴뚝을 무엇인가 근사한 조형물로 바꾸지는 않았다. - P8

마른 나뭇가지에 움튼 순에서 연둣빛 어린 떡잎으로 자라나 쑥쑥 커진 잎사귀들은 녹색이 짙어지고 윤이 나면서 햇빛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 P31

올라온 저녁밥을 텐트 안으로 상반신만 들이밀고 먹었다. 우비의 모자에서 떨어진 빗물이 밥과 찌개 위로 흘러내렸다. 밥 바구니를 내려주고 난간을 오락가락하며 걸었다. 비는 줄기차게 내렸고쉽게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여느 때보다 천천히 걸음을떼어놓으며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그는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상상해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이곳은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다.
여기는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 좁은 원둘레는 지상의 일상과 시간을 벗어난 우주선의 조종실 같은 곳이다. 그는 죽지 않고 여기 살아 있으나 세상은 그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남들에게는 언젠가 돌아올 여행 중에 있는 사람과 같았다. 아내조차도 그와 통화를 할 적에는 해외에 있는 사람에게 측근들의 소식을전하듯 말했다. 이진오는 차츰 지상에서의 시간을 벗어났고 굴뚝의 일상은 이미 현실이 아니게 되었다. - P33

갑자기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철도 연변의 드넓은 논밭과 삼림과 마을이 갑자기 징발되었다. 일본과 한국 정부가 협정을 맺었다지만 이미 국권을 잃기 시작한 한국 정부의 관리들은 거의가 일본의 앞잡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의 철도회사는 철도 연변의 땅들뿐만 아니라 역을 중심으로 한 광대한 지역을 철도의 부속 대지로지정했다. 처음에는 거의 십분의 일 가격으로 보상을 해주는 척하다가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키면서부터 노골적으로 군대가 직접 정발하기 시작했다. 경부철도주식회사의 기사들과 그 아래 청부를준 일본의 토건회사들과 철도 노동자가 일본군을 앞세우고 공사에 필요한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경의선 구역에서 더욱 심각하여 철로가 지나는 곳마다 땅을 빼앗긴 백성이 수만명에 이르렀다. 철도 부지의 수용은 거의 무상몰수나 마찬가지였다. 초창기에 몇푼씩 눈가림으로 내주던 보상금마저도 지방 관아의 한국 정부 관료나 아전들이 착복하였다. 백성들은 토지뿐만 아니라 집과 삼림, 조상의 무덤까지도 헐값에 빼앗겼다. 경부철도를 놓는과정 자체가 개화한 지 얼마 안 되는 일본의 열악한 자본의 열세를 철도부지의 약탈로 만회해갔던 과정이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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