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과 맞붙은 강적들 중 한 명은 옛 동지 타오청장이었다.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그는 줄곧 "거짓말쟁이", "자기 잇속만 차리는 사람", "동지들에게 범죄를 저지른 자"라며 쑨원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천치메이는 타오청장을 영원히 침묵시키기로 결정했다. 그의 심복 중 한명이 이 일을 맡았다. 바로 미래 중화민국의 총통이 될 장제스였다. 타오청장이 상하이의 가톨릭 병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제스는 양복을 점잖게 차려입고 병실로 걸어 들어가서는 침대 위의 타오청장을 코앞에서 총으로 쏘아 죽였다. 장제스는 이 일을 일기에 자랑스럽게 적었다(암살자들이 혁명 세력에게 칭송을 받던 시기였다). 이 일로 자신이 쑨원의 호감을 샀고,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천치메이가 지배하는 상하이가 혁명의 진원지는 아니었음에도, 쑨원은 그를 "혁명의 으뜸가는 공로자"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쑨원이 당선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 P87
정식 대총통은 적당한 때에 전국 총선거를 실시하여 선발될 예정이었다. 대표단의 말에 따르면 사실 이번 투표는 청조와 "평화교섭을 주재할 공화파의 대표를 뽑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던 공화주의자들은, 황제가 자진해서 권좌를 내려놓도록 설득해준다면, 그리하여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피하게 해준다면 임시 대총통을 주겠다고 청조의 내각총리대신 위안스카이에게 약속해둔 상태였다. 그들은 쑨원에게도 이 합의에 따라야 한다고 통보했다. 쑨원은 조건을 수락했고, 12월 29일 임시 대총통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상하이발 특별 열차를 타고 난징으로 향했다. 취임식은 1912년 1월 1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쑨원은 황제가 물러나면 위안스카이에게 임시 대총통자리를 양보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서약해야 했다. - P89
마지못해 동의했지만,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평화교섭이 성공적으로 끝나야 위안스카이가 임시 대총통이 된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쑨원은 교섭을 중지하고 무력 항쟁을 계속하자며 공화주의자들을 설득했다. 대표단은 물론 대부분의 공화주의 세력 지도자들이 쑨원의 말에 반대했다. 직접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 평화 교섭을 하면 안 된다는 거요? 임시 대총통 자리를내놓고 싶지 않다는 거요?" 쑨원은 비밀리에 일본 정부와 접선하여 군자금 1,500만 위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전투를 계속하려면 군대를 양성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는 금전적 지원의 대가로, 청조를 무너뜨리고 나면 만주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일본이 프랑스와 영국을 합한 것보다도 더 넓고 자원이 풍부한만주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쑨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2월 12일 청 황제가 퇴위하면서 공화주의자들에게 정권이 넘어가자, 이튿날 쑨원은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난징을 수도로 삼고, 위안스카이의 취임식도 그곳에서 진행하라는 것이었다. 대부 천치메이가 장악한 난징에서라면 위안스카이가 절대취임하지 못하리라는 계산이었다. 대표단은 이 ‘조건‘을 기각하고 베이징을 수도로 선정했다. 쑨원은 불같이 화를 내며 재투표를 진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서 위안스카이를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모셔오겠다‘는 위협도 덧붙였다. 그러나 대표단은 이번에도 쑨원의말을 듣지 않았다. 베이징에 보낼 군대가 애초부터 없었던 쑨원이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했다. 쑨원은 고작 40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 P90
1912년 4월 쑨원은 상하이로 돌아와서 위안스카이를 밀어낼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상하이의 가장 큰 매력은 중국이 아닌 외국 법의 지배를 받는조계지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싸움을 준비하는 동안 쑨원은 위안스카이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머물고자 했다. 상하이는 서구화가 많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도 쑨원의 취향에 잘 맞았다. 이제 마흔다섯이 된 쑨원은(열두 살 때부터) 생애 대부분을 외국에서 지냈고, 중국 땅을 밟은 적은몇 번 없었다. 상하이에서 쑨원은 약 20년 만에 쑹자수와 다시 만났다. 오랜 세월 쑨원을 아낌없이 지원해준 쑹자수는 이번에도 그를 열렬히 환영했고, 머물 곳을 제공했다. 쑹자수는 쑨원을 중국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으로 생각했고,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전향한 위안스카이 때문에 쑨원이 임시 대총통직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쑹자수가 보기에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기회주의자였다. 쑨원은 쑹자수의 집에 집무실을 차렸다. 이때 열아홉 살의 칭링과 열네 살의 메이링은 아직 미국에 있었고, 쑹자수의 세 딸 가운데 스물세 살 아이링만 상하이의 집에 있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쑨원에게 힘을 보탤 날을 간절히 기다려온 아이링은 쑨원의 영어통번역 조수로 일하겠다고 나섰다. - P91
어느날 쑨원은 수줍어하는 모습도 귀여운 아이링이 사무실을 지나가자, 책상 너머로 도널드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속삭였다. 도널드는 당신은 이미 결혼한 몸이니 그런 욕구는 참았다가 다른 좋은 일에 쓰라고 권했다. 그러나 쑨원은 지금의 아내와는 이혼할 거라고 대꾸했다." 도널드는 아이링이 당신 조카뻘이라며 쑨원을 말렸다(쑨원은 아이링보다 스물세 살 연상이었다). 쑨원은 대답했다. "알아, 안다고. 그래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네." 상하이의 혁명 세력 사이에서 쑨원이 아이링과 살림을 합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헛소문이었다. 유부남과의 불륜은 결코 쑹자수 부부가 용납하지 않을 일일뿐더러, 부모님의 신앙심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이링으로서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이링은 분명 쑨원이 품은 흑심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면 모를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링은 그 눈빛에 절대 응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관심은 그를 열렬히 지지하고 싶은 마음마저 사그라들게 했다. 현실에서 마주한 쑨원은 고귀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아이링은 아이들을 데리고 쑨원과 함께 사는 그의 아내 루무전을 존경하게 되었다. 아이링은 언제나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루무전을 대했고, 함께 놀러나갈 때에는 전족한 발 때문에 걸음을 떼기 어려운 그녀를 부축했다. 그리고 매번 그녀를 ‘엄마‘라고 불렀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쑨원에게 보내는 신호였을것이다. - P93
그러나 새롭게 광명을 찾은 쑨원에게 천추이펀은 걸리적거리는 존재였다. 첩을 들이는 관습은 새로 세워진 공화국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쑨원은 기독교도인 쑹씨 집안이 축첩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는 쑨메이에게 편지를 보내서 일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친구 한 명에게 1만 위안을 지불할 테니 천추이펀을 첩으로 데려가겠냐고 물어봐달라는 것이었다. 축첩에 관대한 사회적 기준에서도, 성공한다음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여자를 내치는 남자는 냉혈한을 넘어서 배신자라고 비난을 받았다. 화가 단단히 난 쑨메이는 쑨원의 부탁을 거절하고 천추이펀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대가족과 함께 살게 된 천추이펀은 모든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냈고, 루무전에게는 친동생 같은 존재가 되었다. - P97
전 인구 4억1,000만 명가운데 투표권을 부여받은 사람은 170만 명에 불과했지만, 이만하면 전국적인 투표의 첫걸음은 뗀 셈이었다. 중국의 오랜 역사에서 선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놀랍게도 중국인들은 선거를 낯설어하지 않았다. 높은 관직을 얻기 위해서 공정한 경쟁을 치르는 것은 중국의 뿌리 깊은 전통이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모든 남성에게 응시 자격이 있는 과거시험으로 전국적인 경쟁을 거쳐서 선발되었다. 이러한 과거 제도는 1905년 근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폐지된 상태였다. 낙담한 엘리트 계층에게 의회는 과거 시험을 대신하여 권력을 얻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고, 상당수의 교육받은 남성들이 의원 선출 경쟁에 뛰어들었다. 공화주의 혁명이 일어날 즈음에는 ‘의회‘가 장차 국가의 최고 통치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국가를 통치하는 헌법이 있어야한다는 데에도 모두가 동의했다.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선발했던 각성의 대표단이 당시 의결된 ‘임시 헌법‘에 따라서 ‘임시 의회가 되었다. 이 ‘의회‘는 임시 대총통직을 유지하려는 쑨원의 시도를 기각했고, 선거를 통해서 위안스카이의 승계를 못 박았다. 대표단이 쑨원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었다. 쑨원은 복종받기를 원했다. 일찍부터 동료들에게 ‘독재자‘라는 평을 듣고 있던 그였다. 그는 의회 정치가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 P103
자신을 지도자로 하는 정당에서 정력적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음에도, 쑨원은 이 역사적인 사업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다. 쑨원의 정당, 즉국민당을 만든 사람은 서른 살의 신예 쑹자오런이었다. 후난 성 출신으로 콧수염을 기른 쑹자오런은 보기 드문 지략가였다. 민주주의 신봉자였던 그는 민주주의를 중국에 도입하기 위한 청사진을 머릿속에 구상해두었고, 임시 헌법의 초안을 짤 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망해가던 쑨원의 중국동맹회를 넘겨받아서 다른 정치 조직 4개와 병합하여 국민당을 조직했다. 1912년 8월 베이징에서 출범한 국민당의 명예 수장으로는 쑨원이 선출되었지만, 실질적인 지도자는 타고난조직책이자 달변가인 쑹자오런이었다. 그가 연설을 하면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이후 몇몇 사람들은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을 미국의대통령 존 케네디에 비유하기도 했다). 쑹자오런의 지도 아래 국민당은 효과적인 선거 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국회에서 과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쑹자오런은 중화민국의 첫 번째 국무총리 자리를 마음에 둔 듯했고, 위안스카이는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될 예정이었다. 쑨원의 자리는 어디에도없었다. - P104
임시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쑨원이 철도 사업을 구실로 거액의 자금을 운용할 권한을 얻은 다음 그 돈으로 군대를 양성해서 정권을 탈취하려고한다고 확신하고, 나름의 대응에 나섰다. 자신을 철도 사업 책임자로 임명하고 자신이 들여오는 차관에 중국 정부가 무조건 보증을 서라는 쑨원의요구를 거절하고, 철도 사업을 교통부 관할하에 둔 것이다. - P107
쑨원은 끝내 아내와 딸, 또는 아이링을 보러 도쿄에 가지 않았다.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국민당의 창립자이자 지도자인 쑹자오런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3월 20일 밤, 쑹자오런은 국민당 대표단을 이끌고 국회 개회식에 참여하기 위해서 베이징으로 향하고있었다. 상하이기차역 개찰구에서 총에 맞은 그는 얼마 후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암살의 배후라고 비난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고는 이튿날 상하이로 달려가서 위안스카이 타도를 외치며 전쟁을 시작했다. 암살자는 금세 붙잡혔다. 우스잉이라는 이름의 거렁뱅이였다. 그는 잡히자마자 범행을 자백했지만, 구금되어 있는 동안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연사했다. 암살을 지시한 자가 결국 누구였는가는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위안스카이와 쑨원 모두 용의자로 지목되는데, 둘 다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과 권력을 나누어야 하는 상황에 위협을 느꼈을 것이고, 쑨원은 이미 쑹자오런 때문에 모든 정치적 역할을 상실하고 철저히 소외된 상태였다. 쑹자오런 본인은 위안스카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자신의 죽음이 막 싹트고 있는 중국의 의회 정치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지 말아달라며 "대총통위안스카이"에게 유언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소속된 정당의 명예 수장 쑨원에게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 P108
공화주의 세력의 실질적인 2인자 황싱은 중국에도 이제 근대적인 사법제도가 운영되고 있으니, 이번 사건을 법적 절차에 따라서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자는 쑨원의 주장에도 반대했다. 내전은 갓태어난 공화국을 산산조각 낼 것이고, 공화파가 패배할 확률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황싱은 총격이 가해졌을 당시 개찰구에서 쑹자오런 옆에서 있었고, 총알이 조금만 빗나갔어도 쑹자오런 대신 목숨을 잃을 뻔했다. 전쟁 개시 여부를 두고 다투면서 그는 결국 쑨원과 갈라섰다. 쑨원은 사적인 자리에서 황싱을 "반역자", "아주 못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황싱은 3년 후인 1916년에 죽었다). 쑨원은 전쟁 계획을 밀어붙였고, 일련의 봉기를 조직해서 위안스카이가 퇴진하도록 압박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자 했다. 신생 공화국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중국은 수십 년간 피비린내 나는 내분을 겪게 되었다. 그 막을 올린 것은 중국의 ‘국부‘ 쑨원이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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