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링은 쑨원의 개인적인 행실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행보에도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아이링과 쿵샹시 모두 쑨원이 위안스카이에 맞서서 일으킨 전쟁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쑨원이 쑹자오런의 암살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키자, 쑹자오런을 열렬히 따랐던 쿵샹시는 쑨원에게 위안스카이가 암살의 배후라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쑨원은 심증만 있을 뿐물증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쿵샹시는 넌더리가 났다. 훗날 구술한 바에 따르면, 그는 쑨원이 벌인 일이 중국보다는 일본의 이익에 부합한다고생각했다. 몇몇 "일본 단체들은 중국에 분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쑨원 박사를 돕고자 했소. 황도파 청년 장교들은 중국을 정복하고 싶어했지. 그들은 중국을 분열시킬 목적으로 쑨원 박사를 지원하려고 했다오...나는 일본이 쑨원 박사를 이용하고 있다고 느꼈소." 쿵샹시는 쑨원에게 "일본인들에게 이용당할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나는 중국의 분열을 막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위안스카이와 쑨원 박사가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소." 쿵샹시는 쑨원의 독단적인 태도도 싫어했다. 전쟁에 패배해서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 쑨원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을 지원하는 데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국민당을 없애고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새 정당의 당원들에게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고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쿵샹시는 경악했고, 쑨원 무리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한 친구는 이렇게 적었다. 쿵샹시는 "절대로 혁명 세력과 어울리지 않았다. 몇번의 제의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사실 쿵샹시는 혁명 세력을 "경멸했고", "[위안스카이] 정권을 충실히 지지했다. 그 결과 중국인 학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쿵샹시와 같은 생각이었던 아이링은 슬그머니. 그러나 확실하게 쑨원과 멀어졌다. - P112
1915년 여름, 상하이로 돌아간 칭링은 쑨원과 결혼하겠다며 부모에게 허락을 구했다. 쑹씨 부부는 아연실색하며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다. 반대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엄청난 나이 차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쑨원은 마흔여덟인 반면에 칭링은 고작 스물을 갓 넘긴 나이였다. 칭링 또래의 건실한 기독교인 청년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중 영씨니 단씨니 하는 몇몇은 쑹씨 자택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많고 많은 신랑감들 중에서 왜 하필 쑨원이란 말인가? 쑨원의 아내가 도쿄에서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을 때, 그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차갑게 대꾸한 쑨원의 모습을 쑹자수가 잊었을 리 없었다. 쑨원은 열정적인 혁명가일지는 몰라도 좋은 남편감은 아니었다. 그러나 쑹자수가 가장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쑨원에게 이미 아내와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쑨원이 아내와 이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데다가 칭링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을 키운 조강지처마저 저버릴 인물"이라는 방증일 터였다. 반면 그가 이혼하지 않는다면 칭링은 본처가 아닌 첩실이 되는 셈이었고, 이는 그녀 자신과 가족에게 수치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를 위반하는 행위였다. 이전에 쑨원에게 보낸 편지(칭링이 쑨원의 애를 태운답시고 위안스카이의 후궁이 되겠다고 한 말을 해명하느라 보낸 것이었다)에서 쑹자수는 이렇게 단언했다. "우리는 기독교 집안이라네. 우리 딸들 중 누구라도 남의 첩실이 되는 일은 없을 걸세. 딸을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왕이든, 황제든,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의 대통령이든 말이야." 쑹자수는 딸 칭링도 "첩살이하는 여자하고는 말도 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칭링은 설령 가족의 친구일지라도 누군가의 ‘첩‘에게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큰언니 아이링도 칭링의 결혼을 말리다가 칭링의 화를 돋우었다. 서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맞서다가 칭링이 실신하는 일도 있었다. 칭링은 위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옮겨졌고, 가족은 그녀의 방문에 자물쇠를 달았다. 이후 수주일이 지나도록 힘겨운 줄다리기는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칭링이 상하이에서 가족들을 설득하느라 고전하는 동안, 쑨원의 아내는 이혼 문제를 상의하자는 남편의 초대에 응하여 9월 일본에 도착했다. 오랜 세월 가족을 부양해온 쑨원의 형 쑨메이가 그해 초 예순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터라 루무전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쑨메이는 루무전과 그녀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소중한 사람을 잃은 충격에 비하면 애초부터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던 쑨원의 이혼 요구는 별것도 아니었다. 루무전은 그후 마카오의 집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40여년을 더 살았다. 루무전과 쑨원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 P118
쑹자수가 일본 정부까지 찾아가서 쑨원을 비난했다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큰 충격에 휩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때 그는 쑨원이 결코 "친구를 기만하지 않을" "고결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이제 그 믿음은 그의 우상에 의해서 처절히 짓밟혔다. 쑹자수는 오랜 선교사 친구인 빌 버크에게 털어놓았다. "빌, 내 평생 이렇게 상처받은 적이 없네." 쑹자수는 죽을때까지 쑨원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이링 부부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쑹자수는 쑨원과 "완전히 갈라섰다.•••••• 옛 친구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 P121
쑨원은 뤼위안훙 정권을 겨냥한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그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1917년초. 미국은 독일과 외교를 단절하고는 중국에도 똑같이 할 것을 요구했다. 오랜 기간 중국의 우방이었던 미국은 연합국 편에 가담하면 이득이 더 많을 것이라고 중국을 설득했다. 이 문제를 두고 국회에서는 몇 주일 동안이나 공방이 이어졌다. 연합군 측과 독일의 장관들이 방청석에서 추이를 지켜보았다. 3월 10일 중화민국 국회는 독일과의 외교관계를 끊는 안건을통과시켰다. 독일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독일은 단교 논의를 무산시키기 위해서 의원들에게 치열한 로비를 벌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선봉에 서서 연합군 측에 가담하자고 주장했던 전직 군인이자 현 국무총리 돤치루이에게 특히 공을 들였다. 독일은 돤치루이에게 사적으로 10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위안스카이의 총애를 받았던 돤치루이는 그가 황위에 대한 꿈을 접게 만드는 데에도 중요한역할을 했다). 독일의 목표는 돤치루이를 제거하고 단교 결정을 뒤집는 것이었다. 독일은 쑨원의 연락책 차오야보를 통해서 쑨원과 비밀리에 접선했다. 상하이 주재 독일 총영사 헤르 크니핑은 쑨원이 적극적으로 협력 의사를 밝히면서 "200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베를린에 알렸다. 독일 총리가 이를 최종승인함으로써 쑨원은 150만 달러어치의 멕시코 은화(당시 중국에서 통용되던 통화 중 하나였다)를 손에 넣었다." 쑨원이 외국으로부터 처음 받은거액의 후원금이었다. - P129
쑨원은 즉각 베이징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입대한 병사들에게는 매달 15위안, 그렇지 않은 병사들에게는 매달10위안이 지급되었다. 독일로부터 받은 돈은 금세 바닥이 났다. 대원수 쑨원은 세금을 거둘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광저우 시 정부는 돈을 넘기라는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쑨원은 또다시 막말을 쏟아붓더니 시청사를 포격하라고 해군에 명령했다. 해군이 거절하자, 쑨원은 배에 올라서직접 대포를 발사했다. 쑨원의 행동은 청비광의 분노를 샀고, 둘의 사이는멀어졌다. 머지않아 쑨원의 옛 친구였던 그는 부둣가 어딘가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이 사건을 포함하여 여러 암살 사건에 깊숙이 간여했던 쑨원의한 심복의 말에 따르면, 쑨원의 비서 주즈신이 이 일을 맡아서 처리했다고한다. 훗날 쑨원은 청비광의 죽음이 "명령 불복에 따라서 처형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의원들은 이처럼 강압적인 ‘독재‘에 겁을 먹었다. 쑨원과 엮인 것을 후회하던 그들은 그를 쫓아낼 방법을 찾았다. 선거를 통해서 대원수 직위를 폐지하고 쑨원을 포함하여 7명으로 구성된 집단 지도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그들은 쑨원이 지도권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하지 않으리라고 계산했다. 예상대로 쑨원은 즉시 사임하고 1918년 5월 21일 광저우를 떠났다. 그가 대원수직에 있었던 시간은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 P131
대총통 쉬스창은 광저우 정부에 평화와 통일을 제안했고,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주요직책을 맡았던 많은 이들이 광저우를 떠났다. 쑨원은 광저우로 돌아와서 대총통 쉬스창으로 표적을 변경하여 전쟁을 이어갈 계획을 짰다. 그는 권력이란 오직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1919년 민족주의를표방한 5-4 학생 운동이 일어났을 때(중국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라고평가받는다), 몇몇 젊은이들이 쑨원을 찾아와서 조언을 구했다. 쑨원은 그들의 운동에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단지 이렇게 말했다. "베이징정부를 처리하는 데 총 500자루를 주겠네.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그는 독일에 3개의 사절단을 파견하여 중국에 쳐들어와서 베이징을 공격하라며 독일군을 설득했다. 독일인들은 쑨원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를 통해서 일본 쪽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베이징 정부와 싸우는 자신을 지원해주면, 일본에게 만주와 몽골을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의 간청을 무시했다. - P135
문제는 성을 통치할 권한이 없는 일개 장교인 그의 말을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천중밍은 쑨원을 떠올렸고, 쑨원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기회를 포착한 쑨원은 천중밍으로 하여금 광저우를 장악하게 했고, 자신은 1920년 11월에 광저우에 도착했다. 천중밍은 곧 쑨원을 끌어들인 것을 후회했다. 쑨원의 목표는 천중밍 자신의 목표와는 정반대였다. 쑨원은 광저우를 기지로 삼아서 전쟁을 벌이고, 중국 전역을 지배하고자 했다. 곧바로 치열한 기싸움이 이어졌지만, 이방면에서 장교 천중밍은 쑨원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쑨원은 곧바로 베이징과 대적할 또다른 정부를 설립했다. 그리고 고작 대원수밖에 되지 못했던 1917년과 달리 이번에는 스스로를 "중화민국 대총통"이라고 선언했다. 1921년 4월 7일의 일이었다. 그렇게 국부 쑨원은 중국을 반으로 갈라놓았고, 적법하게 선출되었으며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정부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했다. 다른 어떤 성에서도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 P136
1 922년 5월, 쑨원은 대총통 쉬스창을 몰아내기 위한 북벌을 개시했다. 쉬스창이 선출되었을 당시 전체 22개 성 가운데 5개 성이 선거에 참여하지않았다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다. 전쟁을 다시 치르고 싶지 않았던 쉬스창은 쑨원과 자신이 동반 사퇴하고 새로 전국 선거를 시행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중요한 외교 안건 하나를 마무리한 직후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산둥 성의 일부 지역을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다. 중국은 1919년 열린 전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이 지역을 되찾아오는 데에 실패했고, 이 때문에 같은 해에 민족주의 경향의 5-4학생 운동이 촉발된 바 있었다. 쉬스창 정권은 노련한 교섭으로 일본을 압박해서 1922년 영토를 성공적으로 반환받았다. 6월 2일 조약 비준서에 서명을 마친 대총통 쉬스창은 그날 아침부로 사직서를 제출했고, 오후에는 수도를 떠났다(이 외교상의 승리는 그동안 역사책에서 의도적으로 지워져왔다). 쉬스창이 그토록 쉽게 대총통직을 포기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쑨원은 경솔하게도 그와 함께 사퇴하겠다고 이미 공표한 상태였다. 그에게 약속을 지키고 전쟁을 멈추기를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쑨원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듯이 굴었다. 오랫동안 평화를 갈망해온 장교천중밍과 그의 군대는 넌더리가 나서, 더 이상 쑨원 편에서 싸우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고는 언론에 공식적으로 사퇴를 발표하라고 쑨원에게 요구했다. 6월 12일 쑨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천중밍의 군대에 대해서 여느 때처럼 신랄한 비난을 늘어놓았다. 그는 위협하는 어조로 이렇게 선포했다. "사람들이 말하길 쑨원은 ‘대포‘(大砲: 허풍을 심하게 치는 사람)라고 하던데, 이번에야말로 진짜 대포가 뭔지 한번 보여주겠소. 8인치 대포로 독가스를 살포할 거란 말이오... 그러면 천중밍이 거느린 60여 개의 대대는 세 시간 안에 가루가 될 거요. - P137
6월 16일 자정에서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천중밍의 군대가 새벽녘에 총통부를 공격할 것이라는 경고가 날아들었다. 쑨원은 이곳을 탈출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는 하얀 여름용 면옷을 걸치고 선글라스를 쓴 뒤 1급 비밀 서류만 지닌 채 평상복을 입은 경호원 몇 명과 함께 관저를 떠났다. 언덕을 내려오면 바로 광저우의 대로변이었다. 그곳에서 쑨원 일행은 인력거를 잡아타고 근처 항구로 갔고, 다시 모터보트를 빌려 쑨원에게 충성하는 포함砲艦)으로 이동했다. 기껏해야 한 시간 반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쑨원은 안전해졌다. 아내는 데려오지 않은 채였다. 날이 샐 무렵, 대총통이 이미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천중밍의 군대가 관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칭링이 아직 총통부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50명 남짓한 쑨원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격렬히 맞서 싸웠다.
쑨원이 떠나기 전 칭링은 자신이 남아서 그가 탈출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겠다고 자원했다. 칭링이 사건 직후 상하이의 한 신문에 기고한 바에 따르면,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그이에게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나를 두고 가라고 그이를 설득했다." 다른 자리에서 털어놓기로는 남편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고도 했다. "중국에 나는 없어도 괜찮지만,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사랑의 힘으로 그녀는 남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138
칭링은 도망치는 와중에 아이를 유산했다. 그리고 다시는 임신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칭링은 충격으로 무너져내렸다. 그녀는 아이를 간절히 원했다. 이때의 고통은 칭링의 인생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후 가까운 친구들은 아이를 낳는 이야기만 나오면 칭링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녀의 반응은 "거의 병적인 수준"이었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은 훗날 그녀의 행동을 뿌리째 좌우하게 되었다. 유산 직후에 그녀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신이 겪은 일의 기록에서 유산 이야기를 빼버렸다. 고통이 아직도 너무나 생생했다. 여동생 메이링의 친구 에마 밀스는 칭링의 괴로운 마음을 알아챘다. 당시 상하이에 머물렀던 그녀는 칭링이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농촌아낙네와 같은 옷을 입고 상하이에 내리는 모습을 지켜본 뒤에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조그맣고, 가냘프고, 몹시 창백했다. 살면서 그토록 쓸쓸한 형상을 본 적이 없었다." (밀스는 저녁 식사 때까지 함께했고, 칭링의 옷을 몇벌 짓기 위해서 들른 재단사와 메이링이 상의하는 것을 거들었다. 결국은 칭링도 남편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거의 죽다 살아났고, 아이를 유산했으며,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쑨원이 자기 자신의 탈출을 감추기 위해서 그녀를 이용했다는것까지는 칭링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그녀를 죽을지도 모르는 자리에 밀어넣은 것은 도가 지나친 일이었다. 어떤 여자라도 이런 짓을 당했다면 사랑이 식었을 것이다. 쑨원을 향한 칭링의 사랑 또한 이 시련을 견디지 못했다. 훗날 칭링의 친구인 미국인 기자 에드거 스노가 그녀에게 쑨원과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냐고 물었을때, 스노가 녹음한 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난 사랑에 빠진 게 아니었어요." 칭링은 천천히 말했다. "먼 발치에서 영웅을 숭배한 거였죠. 그를위해 일하겠노라고 도망친 건 소녀들이 하는 낭만적인 발상이었고요.. 나는 중국을 구원하고 싶었고 쑨원 박사는 그걸 해낼 수 있는 분이었으니, 그를 돕고 싶었던 겁니다." - P142
사랑이 남뿍 담긴 그녀의 편지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녀의 대답과 사뭇 다르다. 칭링은 분명 사랑에 빠졌었다. 다만 온 마음을 바쳤던 사랑이이제 죽고 없을 뿐이었다.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칭링은 남편의 추악한 면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녀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도, 더 고결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녀의 희생을 누릴 자격도 없었다. 쑨원을 향한 칭링의 열정은 사라졌고, 무관심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를 떠날 마음은 없었지만, 그와 ‘거래‘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칭링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했다. 바로 남편의 정치적 동반자로서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손님들이 토론을 벌이는 동안 뒤편에서 타자나 치는 비서 노릇은 더이상 원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녀도 토론에 참여할 것이었다. 그리고 공식 석상에서 남편과 나란히 설 것이었다. 과거에도 이런 요구를 했지만, 지도자의 아내가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대중들이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당했다. 그러나 이제 칭링은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로 작정했다. 그녀가 상하이 신문에 자신의 탈출기를 기고한 것은 아마 쑨원과 그의 동료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보여주고, 자신이 이 정도는 요구할 자격이 있다는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한편 쑨원은 광저우에 화력을 쏟아붓고서도 그곳을 되찾지 못했다. 그는 8월에 상하이에서 아내와 다시 만났고,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 P143
이때부터 칭링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고, 독자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그녀의 활동을 기점으로 지도자의 배우자가 공인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녀는 9월 15일 미국의 친구 앨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큰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명함이 좀 필요해. 지금 당장 티파니나 각인 잘하는 가게에 200장을 주문해줄 수 있겠니? 깔끔하면서도 멋진 디자인으로 골라주면 좋겠어. 명함에 이름은 그냥 쑨원 부인(Mrs SUN YAT-SEN)으로 해주고." 나중에는 ‘부인‘이라고만 칭하는 것이 국부의 배우자에게는 부족하다고 여겨져서 프랑스식 존칭인 ‘마담‘이 이를 대체했다. 그리하여 칭링은 마담쑨원(Mme Sun Yat-sen)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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