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몇 명과 그들의 변호사들은 우리 쪽으로 등을 향하고 앉아있었다. 한나 역시 우리 쪽으로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나는그녀가 호명되어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갈 때에야 비로소 그녀를 알아보았다. 물론 그녀의 이름은 금방 알아들었다. 한나 슈미츠. 이어서 그녀의 자태를, 즉 독특하게 틀어 올린 머리 모양과 목덜미, 넓은 등과 튼튼한 두 팔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아주꼿꼿한 자세였다. 두 다리로 탄탄하게 서 있었으며 양팔은 양쪽에 자연스레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소매가 짧은 회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알아보았지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혀 아무 느낌이 없었다. - P102

그렇게 나는 그녀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와 목덜미와 어깨를 보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와 목덜미와 어깨를 읽었다. 재판에서 자신에 대해 언급될 때면, 그녀는 특히 머리를 높이 치켜들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중상모략을 받고 있다고, 그리고 공격을 받고 있다고 느껴져 이에대해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면, 어깨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마다 목덜미가 부풀어 올랐고 근육의 가닥들은 더욱 불거져 보였다. 나름대로 답변을 하려는 시도는 매번 실패했고, 그때마다 그녀의 어깨는 아래로 처졌다. 그녀는 결코 어깨를 으쓱해보이거나 고개를 가로젓지 않았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어깨를 으쓱하거나 고개를 가로젓는 가벼운 몸짓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삐딱하게 들거나 아래로 숙이거나, 머리를 팔로 받칠 생각도 못했다. 그녀는 얼어붙은 듯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으려면 틀림없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가끔 단단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서 머리카락 몇 올이 빠져나와 잔물결을 일으키며 목덜미 위로 늘어졌다가는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결에 날리면서 목덜미를 쓸었다. 한나는 가끔 왼쪽 어깨 윗부분의 배냇점이 드러날 정도로 앞가슴이 많이 파인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윽고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입으로 훅 불던 것, 그리고 그녀의 배냇점과 목덜미에 입 맞추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러나 기억은 저장된 파일을다시 불러내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 P107

검사들은 나름대로의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매일매일 똑같은 공격력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못했다. 처음에는 재판의 대상과 결과들이 너무나 경악스러웠기 때문이고, 나중에는 그들에게도 마비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비 증세는 판사와 참심원들에게서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재판이 시작된 처음 몇 주 동안에는 때로는 눈물과 함께. 때로는 힘겨운 목소리로, 때로는 흥분과 당혹함이 밴 말투로 소상히 밝혀지는 끔찍한 사실들을 누가 봐도 알아차릴 수 있는 놀라움이나 힘겹게 평정을 유지하려는 표정으로 경청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정상적인 얼굴빛을 되찾았고,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서로 무슨 말을 속삭이기도 했으며, 증인이 증언을 하다가 이야기의 맥락을 놓치면 안타까워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재판 중에 이스라엘로 가서 한 여자 중인의 말을 들어보자는 의견이 나오자, 그들은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뜬 표정을 짓기도 했다. 다른 학생들은 늘 새삼스럽게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만 재판을 보러 왔는데, 그때마다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바로 그 경악스러움이 그들의 일상 속으로 침입하는 일이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재판에 참석한 나는 거리를 두고 그들의 반응을 관찰할 수 있었다. - P110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고 있고 이미 당시부터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 질문이 있다. 우리 제2세대들은 유대인 박멸과 관련된 끔찍한 정보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해야 했으며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해서는 안 되고,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며, 자꾸만 물어봐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질문자는 그 끔찍한 사건들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해도, 그 앞에서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의사소통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을 느끼면서 침묵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그렇다고 내가 세미나에서 보였던 탐사와 진상 규명의 열성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쉽게 식어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이 판결을 받고 형을 살고, 제2세대인 우리는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으로 입을 다무는 것.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가? - P112

"당신들 중 누구도 뒤로 빼는 사람 없이, 모두들 함께 행동했습니까?"
"네."
"당신은 당신이 수감자들을 죽음 속으로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까?"
"아뇨,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왔고, 이전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당신 그리고 당신 그리고 당신은 후송돼서 죽어야 해‘라고 말했나요?"
한나는 재판장의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는... 제 말은……………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나는 진심에서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달리 행동해야 했는지, 어떻게 달리 행동할 수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이는 재판장에게 그 같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듣고 싶었던 것이다. - P119

"그래요. 그녀는 애인들을 두고 있었어요. 언제나 젊고 연약하고 섬세하게 생긴 여자들이었어요. 그녀는 그들을 보호해주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고, 잠자리도 좋은 곳을 내주었어요. 또 필요한 것을 갖다 주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음식을 주었고, 밤이 되면 그들을 자기 방으로 불렀어요. 그리고 소녀들은 밤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해서는 안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그 짓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마치 재미를 보다가 싫증을 느끼면 그러는 것처럼, 그들은 모두 아우슈비츠로 후송되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어느 날 한 소녀가 말을 해서 알게 되었어요. 소녀들은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거예요. 매일 밤마다 매일 밤마다 말이에요. 그 짓을 하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지요. 또 집 짓는 공사장에 나가서 죽도록 일하는 것보다는 편한 일이었지요. 나는 그게 훨씬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게 틀림없어요. 안 그랬다면, 내가 어떻게 잊지 않고 있었겠어요? 하지만 그게 더 나은 일이었을까요?"
••••••
재판장은 한나에게 신문을 한 변호사에게 질문이 아직 더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 변호사는 한나의 변호사에게 묻겠다고 말했다. ‘그녀한테 물으시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가그 연약한 소녀들을 선발한 것이 그들이 어차피 집 짓는 일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인지, 그들이 어차피 다음번 수송 때 아우슈비츠로 후송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지, 그래서 그들에게 마지막 한 달을 참을 만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는지 그녀에게 직접 물으시오. 한나, 어서 그렇게 말해. 당신이 그 여자들에게 마지막 한 달을 참을 수 있게 해주려고 그런 것이라고 말해. 그것이 당신이 연약한 소녀들을 선발한 바로 그 이유라고. 그 밖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고. 그리고 있을 수도 없다고.
그러나 그 변호사는 한나에게 묻지 않았고, 한나 역시 먼저 말하려 하지 않았다. - P125

한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다른 사람들한테 책을 읽어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우리의 자전거 여행에서 쓰는 일과 읽는 일을 모두 나에게 맡겨두었고, 호텔에서 맞이한 아침에 내가 남겨놓은 쪽지를 발견하고는, 그 내용을 그녀가 파악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를 짐작하고는 자신의 치부가 노출될 것이 두려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승진을 시켜주겠다는 전차 회사에서 도망을 쳤던 것이다. 차장으로 일할 땐 감출 수 있었던 약점이 운전사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드러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지멘스에서 승진하는 일도 마다하고 여자 감시원이 되었던 것이다. 필적 감정사와의 대면을 피하기 위해 보고서를 본인이 작성했다고 시인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재판 과정에서 사생결단을 하듯이 진술했던 것일까? 그 모녀 중 딸의 책뿐만 아니라 공소장도 제대로 읽지 못해 방어의 기회를 잡지 못했고 그래서 제대로 방어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 때문에 그녀는그녀의 피보호자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것일까? 그들이 무언가를 눈치 챘을 경우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그 때문에 그런 연약한 소녀들을 자신의 피보호자로 삼은 것일까? 그 때문일까? 그녀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놀라게 하는 쪽을 택했다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회피하고, 방어하고, 숨기고, 위장하고 또 남에게 상처를주는 행동의 근거가 되는 수치심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한나의 수치심이 법정과 수용소에서 보여준 그녀의 행동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범죄자임을 자백한다고?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두려워 범죄를 저지른다고? - P141

한나가 나의 고향 도시를 떠났을 때 그녀의 진짜 관심사와그 당시 내가 그녀에 대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그렸던 것 사이의 괴리가 나의 마음을 이상하게 흔들어놓았다. 나는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서 떠나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단지 전차 회사에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까 봐 두려워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쫓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 P144

"하지만......"
"하지만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것을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는 것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돼."
"나중에 가서 그들 스스로 그로 인해 행복해질 경우에도 말인가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지금 행복이 아니라 품위와 자유에 대해서 말하고있어. 넌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그 차이를 잘 알았잖니. 엄마의 말이 늘 옳은 것이 네겐 별로 마음 편치 않았잖아."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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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외모와 옷차림, 몸놀림 그리고 내가 이룬 것과 남들이 내게 보내는 인정의 눈길 등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안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도사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멋지고 영리해져서 남보다 우월한 경탄의 대상이 되리라는 자신감,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상황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엄청난 기대감이 깃들어있었다.
바로 이것이 나를 슬프게 했을까? 당시 나의 가슴을 가득채웠던 생에서 결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끌어냈던 그 열의와 신념 때문인가? 지금도 나는 가끔 아이들과 십대들의 얼굴에서 그 당시의 나에게서와 똑같은 열의와 신념을 발견한다. 그때마다 나는 나를 돌이켜볼 때 느끼는 것과 똑같이 슬픈 눈길로 그것을 바라본다. 이 슬픔은 단순한 슬픔일까? 이러한 슬픔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기억 속에서 산산이 부서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일까? 기억 속의 행복은 상황뿐만 아니라 지킬 수없는 약속을 먹고 사는 까닭에? - P44

하지만 다음 날 그녀와 만났을 때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하자, 그녀는 몸을 뺐다.
"그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그녀는 진지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전 반 시간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샤워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고 또 그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집중력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이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儀式이 되었다. - P49

"어떻게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간단히 가버릴 수 있어!"
나는 아침 식사와 장미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서 그녀를끌어안으려 했다.
"한나......."
"건드리지 마."
그녀는 원피스에 둘렀던 폭이 좁은 가죽 허리띠를 손에 들고있다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내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 입술이 찢어졌고 피 맛이 느껴졌다.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녀는 허리띠를 다시 한 번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내리치지 않았다. 그녀는 허리띠를 들고 있던 팔을 아래로 떨어뜨리더니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 크게 벌어진 입, 눈물 때문에 부어오른 눈꺼풀, 뺨과 목의 붉은 반점, 그녀의 입에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의 단조로운 신음 소리와 비슷한, 목이 잠긴 듯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선 채 흐르는 눈물 사이로 나를 쳐다보았다. - P62

비행기의 엔진이 고장났다고 해서 그것이 비행의 끝은 아니다. 비행기는 날아가던 돌멩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미끄러지듯이 날아간다. 초대형 다발 여객기는 착륙 시도 시에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반 시간에서 45분 정도까지는 날아간다. 승객들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다. 엔진이 고장난 상태에서의 비행은 엔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와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의 비행은 조금 더 조용하다. 아주 조금 더 조용하다. 엔진 소리보다 더 시끄러운것이 몸체와 날개에 와서 부서지는 바람 소리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창문 밖을 내다보면 땅이나 바다가 위협적으로 가까이 와있다. 아니면 기내 영화가 상영되고 있고, 남녀 승무원들은 블라인드를 내려놓은 상태이리라. 승객들은 어쩌면 약간 더 조용해진 비행을 특히 쾌적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그해 여름은 우리 사랑의 활공 비행이었다. 아니 오히려 한나에 대한 나의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 P76

그 후 나는 그녀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한나와 나 사이의 비밀을 세상에 알렸거나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침묵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은 어느 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는 내가 털어놓았어야 하는 것들도 일체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부인이 배반의 보이지 않는 한 변형임을 알고 있었다. 외부에서 보면 부인을 하는 건지, 비밀을 지키고 있는 건지, 심사숙고하는 건지, 난처함과 불쾌함을 피하려는 건지 구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지 않는 본인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부인은 배반의 다른 몇 가지 떠들썩한 유형들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의 토대를 앗아가버린다. - P82

그러던 어느 순간 그런 기분이 싹 사라졌다. 어느 순간 나는 숙제를 하고 배구를 하고 시시덕거리며 장난질하는 수영장의여느 오후와 다름없는 분위기 속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그때 내가 무슨 일에 몰두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2.3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짧은 반바지에 허리부분을 끈으로 묶은 앞이 터진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그녀는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나도 돌아보았다. 거리가 멀었기때문에 나는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로 달려가지 않았다. 그녀가 왜 수영장을 찾아왔는지, 자신의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 그녀 쪽에서 나와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아니면 내가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우리는 왜 여태껏 한 번도 우연히 만난 적이 없었던 건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등의 의문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나는 일어났다. 일어서느라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그 짧은 순간에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알아볼 수 없는 표정의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짧은 반바지와 끈을 동여맨 블라우스 차림의 한나. 그것 역시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들 중 하나이다.
다음 날 그녀는 떠났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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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헤엄을 칠 때 유체역학적 후류 물고기가 지나간 후에도 계속 소용돌이치는 물의 흔적를 남긴다. 예민한 수염을 가진 바다표범은 이러한 흔적을 탐지하고 해석할 수 있다. 이 능력은 2001년 독일 로스토크에서 활동하는 귀도 덴하르트Guido Dehnhardt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들은 두 마리의 잔점박이물범 헨리와 닉이 소형 잠수함의 수중 경로를 추적할 수 있음을 보였다. 연구팀이 눈을 가리고 헤드폰으로 귀를 막았을 때도 헨리와 닉은 잠수함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잠수함을 놓치는 경우는 단 한 가지, 수염이 스타킹으로 덮여 있을 때였다. 당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유체역학적 감각이 근거리에서만 작동할 거라고 믿었다. 수중 물체의 이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교란은너무 빨리 사라져서, 몇 센티미터의 범위를 넘어서면 탐지될 수 없을 거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체역학적 후류는 실제로 몇 분 동안지속될 수 있다. 덴하르트의 추정에 따르면, 헤엄치는 청어는 180미터떨어진 곳에서 바다표범이 따라갈 수 있는 흔적을 남긴다고 한다. - P268

물고기는 측선을 통해 문자 그대로 주변에 흐르는 풍부한 정보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거의 모든 방향으로 몸길이의 한두 배까지 확장되는데, 데이크흐라프는 이를 일컬어 "원거리 촉각"이라고 한다. "인간은 피부 위로 흐르는 강한 수류를 느낄 수 있지만, 물고기가 측선을 통해 획득하는 풍부한 인식에 비하면 어림도 없어요"라고 수십 년동안 이 시스템을 연구해온 셰릴 쿱스sheryl Coombs는 말한다. 우리가 거리를 걸을 때 밝기와 색상의 패턴이 우리의 망막 위로 움직이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를 지나쳐 흐르는 주변 환경을 인식한다. 아마도 물고기는 측선 위로 움직이는 물의 패턴에서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할 것이다. 단언하건대 그들은 이러한 패턴을 사용해 흐르는 물속에서 방향을잡고, 먹이를 찾고, 포식자로부터 도망치고, 서로를 감시할 수 있다. 무리 속의 물고기는 측선을 사용해 가장 가까운 이웃과 속도 및 방향을 일치시킨다." 포식자가 돌진할 때 유입되는 급물살은 포식자와 가장 가까이 있는 개체의 측선을 자극해 멀리 달아나게 한다. 그들의 갑작스러운움직임은 이웃의 측선을 연쇄적으로 자극해 도미노 현상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공황의 물결이 바깥으로 퍼져나가면, 물고기 떼는 포식자 주위에 매끄럽게 분산된다. 각 물고기는 주변에 있는 소량의 물에만 주의를 기울이지만, 촉각은 모든 물고기를 연결해 조정된 전체로서 행동하게 만든다. 눈먼 물고기일지라도 여전히 무리에 가담할 수 있다. - P273

떠돌이호랑거미는 먹이를 잡기 위해 거미줄을 치지 않는다. 그 대신먹이를 기다리며 앉아 있다. 다리에는 수십만 개의 털이 1제곱밀리미터당 400개의 밀도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거의 모든 털은 신경과 연결되어 있으며 접촉에 민감하다. 다리 하나에 있는 털을 몇 개만 건드리면, 거미는 팔다리를 움츠리거나 몸을 돌려 탐색할 것이다. 만약 달리는도중에 털이 물체 예를 들어 호기심 많은 과학자가 길을 가로질러 엮어놓은 철사를 스친다면, 거미는 몸을 아치형으로 만들어 장애물을 뛰어넘을 것이다." 구애하는 동안, 수컷은 암컷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적절한 방법으로 암컷의 털을 자극할 수 있다.
대부분의 털은 직접적인 접촉에만 반응하지만, 일부는 너무 길고 민감해 바람에 의해 구부러지기도 한다. 이것들을 감각모trichobothria라고하는데, "털trichos"과 "컵bothrium"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새의 모상우나 물고기의 신경소구처럼, 그것은 흐름 센서이지만 유난히 민감하다. 심지어 분속 2.5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공기- 미풍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벼운 바람도 그것을 구부러뜨릴 것이다. 현미경으로 털을 관찰하면, 주변의 모든 것이 정지해 있음에도 감지할 수 없는 기류의 영향으로 펄럭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각각의 다리에 100개의 감각모가 있어, 떠돌이호랑거미는 몸 주위의 기류에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주파수를 맞출 수 있다.  - P282

하지만 곤충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많은 곤충들이 그들만의 기류 센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귀뚜라미wood cricker는 꽁무니에서 튀어나온 미각cercus이라고 불리는 한 쌍의 가시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거미의 감각모만큼이나 민감한(어쩌면 더 민감한) 수백 개의 털로 덮여있다. 소위 사상모filiform 라고 불리는 이 털들은 벌의 날갯짓이 생성하는기류를 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제롬 카사스Jerome Casas가 보여준 바와 같이 돌진하는 거미가 만들어내는 극미풍을 탐지할 수 있다.
늑대거미wolf spider는 귀뚜라미의 주요 포식자로, 먹잇감을 향해 달려간다. 불규칙하고 낙엽이 깔린 임상 forest floor에서, 그들은 목표물과 동일한 잎에 머무는 동안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 그들은 빠르지만, 카사스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귀뚜라미의 사상모에 탐지될 수 있다." 거미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탐지될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따라서 거미의 유일한 희망은 귀뚜라미에게 최대한 살금살금 접근하는것이다. 즉 아주 느리게 움직여야만 공기를 흩뜨리지 않고 귀뚜라미에게 근접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최단거리를 돌진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미의 공격이 성공할 확률은 50분의 1에 불과하다. "귀뚜라미가 거의 항상 이겨요"라고 카사스가 나에게 말한다. "귀뚜라미가 잎에서 뛰어내려 다른 곳에 도착하는 순간 게임은 끝나요.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세계로 이동한 거거든요." - P284

귀뚜라미의 사상모와 거미의 감각모는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민감하다. 그것들은 단일 광자 가능한 한 가장 적은 가시광선 양 안에 있는 에너지의 일부에 의해서도 구부러질 수 있다. 이 털들은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시각수용체보다도 100배나 더 민감하다." 실제로 귀뚜라미의 털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양은 열잡음 thermalnoise-흔들리는 분자의 운동에너지-과 거의 같다. 달리 말하면, 물리법칙을 위반하지 않는 한 이러한 털들을 더 민감하게 만드는 것은 거의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들을 흥분시키지 않는 이유가 뭘까? 거미가 상상 속의 곤충을 향해 끊임없이 뛰어오르거나, 귀뚜라미가 유령거미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첫째로, 털은 생물학적으로 유의미한 주파수에만 반응한다. 그런 종류의 주파수는 포식자나 먹잇감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지, 환경에 의해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둘째로, 털의 기저부에 있는 기계수용체는 털 자체보다 덜 민감하므로, 발화하려면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닥의 털이 거미를 움직이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물들은 단일 기계수용체의 흥분된 독창에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모든 기계수용체의 합창을 듣는다. - P285

워켄틴은 그 이후로 줄곧 이 행동을 연구해왔다. 다행히도 지금은 ‘긁적거리는 밤샘 작업‘이 줄어들고 적외선 비디오카메라 촬영이 늘어났다. 그녀가 보여주는 최근의 비디오에서, 고양이눈뱀은 청개구리 알 덩어리에 달려들어 몇 개의 알을 덥석 입에 문다. 의기양양하게 한입 베어물려고 할 때, 주변의 배아들이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얼굴에서 (알을 빠르게 분해하는 효소를 방출한다. 그들 중 하나가 물속으로 뛰어들고, 잠시후 다른 하나가 합류한다. 이윽고 수많은 올챙이들이 재빨리 다이빙하고, 아직도 첫맛을 보지 못한 뱀의 입가에는 젤리 같은 알 껍질만 남아있다. "난 이걸 보는 게 전혀 지루하지 않아요"라고 워켄틴은 말한다.
그녀의 실험은, 개구리의 배아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무력하지도 않고 어리바리하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배아의 감각 거품은 그들이 갇혀 있는 실제 거품 너머까지 확장된다. 빛은 반투명한 알을 통과할 수 있고, 화학물질은 그 안으로 확산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진동이다. 진동은 알과 배아로 전달되며, 배아는 아무런 사전 경험도 없이 ‘유해한 분위기‘와 ‘무해한 분위기‘를 구별할 수 있다. 뱀에게 물리면 부화가 촉진되지만, 비와 바람과 발자국은 그렇지 않았다.
가벼운 지진이 워켄틴의 연못을 흔들었을 때도 배아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워켄틴은 다양한 진동을 녹음해 알 앞에서 재생함으로써, 배아들이 특정한 음높이와 리듬에 맞춰져 있음을 증명했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짧은 고주파 진동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뱀이 공격하면 주파수가낮아지고 패턴이 복잡해지며, 씹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이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정적을 빗방울 소리로 대체함으로써 더 뱀처럼 느껴지도록 만들면, 올챙이는 더 많은 공포감을 느끼며 부화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그들은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세상을 명확히 감지할 수 있고, 그정보를 자신을 방어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은 선택의지와 환경세계를 가지고 있다. - P290

예를 들어 공중에 떠다니는 소리는 진행 방향으로 진동하는 파동이다(용수철 형태의 장난감인 슬링키를 앞뒤로 잡아당겼다 놓는 것을 상상하라). 그와대조적으로 표면파는 진행 방향에 수직으로 진동한다(슬링키를 위아래로 흔드는 것을 상상하라)." 표면파는 수면에서 잔물결로 확연히 드러나지만, 단단한 지면에서는 감지하기 어렵다. 만약 당신이 땅에 돌을 던진다면, 미세한 파동이 지면을 따라 잔물결을 이룰 것이다. 만약 어떤 동물이 충분히 민감하다면, 발 아래 땅의 미묘한 들썩거림을 느낄 수 있을것이다. 많은 동물들은 충분히 민감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스피커의 저음이나 휴대폰의 진동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다른 종들이 알고 있는 풍부한 진동풍경vibroscape을 놓치고 있다. 표면 진동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소리와 분리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든다. 동물들은 종종 땅과 공기를 동시에 흔듦으로써두 가지를 동시에 생성한다. 게다가 동물들은 종종 동일한 수용체와 기관-예컨대 유모세포와 내이-으로 두 종류의 파동(표면 진동, 소리)을 탐지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공통 어휘를 사용해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진동은 들리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물이 진동을 듣는다"라고 표현한다.
아마도 표면 진동과 소리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감각을 연구하는 과학자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자를 크게 무시한다는 점일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연구자들은 신체부위의 온갖 움직임(두드림, 쿵쾅거림, 흔듦, 뜀)을 시각이나 청각 신호로 해석하면서, 그런 움직임이 생성하는 표면파를 무시했다. 모든 빨간눈청개구리는 생후 4일 반부터 감각 세계에 신호를 보내지만, 여러 세대의 과학자들은 그것을 무시했다. "우리가 만난 것은, 우리가 찾던 것이 아니었다"라고 생태학자 페기 힐Peggy Hill은썼다." 그것은 감각생물학자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교훈이다. 우리는 선입견에 굴복함으로써, 바로 눈앞에 있을지도 모르는 것을 놓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놓치는 것은 때때로 숨이 막힐 정도로 놀라운 것이다. - P293

전갈의 센서는 발에 자리 잡고 있다. 대충 ‘발목‘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관절에는, 마치 날카로운 칼로 외골격을 후빈 것 같은 여덟 개의 틈새가 모여 있다. 이게 바로 틈새 감각기 slit sensilla로, 모든 거미류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진동 탐지 기관이다. 각 틈새는 막으로 둘러싸이고 신경세포와 연결되어 있다. 표면파가 전갈에 도달하면 들썩이는 모래가 전갈의 발을 밀어붙인다. 이것은 틈새를 극미하게 압축하지만, 막을 쥐어짜서 신경을 발화시키기에 충분하다. 자신의 외골격에 일어난 미세한 변화를 감지함으로써, 전갈은 지나가는 먹잇감의 발자국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사건이 처음 발생하면, 전갈은 재빨리 사냥 모드로 전환한다. 녀석은 몸을 일으켜 집게를 벌리고, 여덟 개의 발을 거의 완벽한 원형으로 배열한다. 이 자세에서, 전갈은 표면파가 각각의 다리에 부딪친 시점을 비교함으로써 표면파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낼 수 있다. 녀석은 몸을 돌이켜 달리다가 잠시 멈추고 제2의 파동을 기다린다. 잠시 후 파동이 도착하면 다시 몸을 돌이켜 달리며, 제3, 제4의 파동이 계속 도착함에 따라 목표물에 점점 더 가까이 접근한다. 집게발이 뭔가에 부딪히자마자 전갈은 그것을 움켜잡고 독침을 쏜다. 파동의 진원지에 도착했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먹이가 땅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땅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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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다리를 쌌어."
"아, 그렇구나."내가 안심하며 말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엄마 머리를 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몸이 마구 떨렸다. 당시에 신호등이 어떤색깔이었는지도 정확히 기억난다. 순간적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마치 난생처음 울어 보는 것처럼 눈물이 펑펑 흘렀다. 서럽게 신음하듯 무너져 울었다. 여태까지 살면서 울었던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울었다. 지금 울고 있는 내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우는 나 자신을 보면 찰싹 등을 때리며 "이건 울 가치도 없는 일이야"라고 할 정도로 심하게 울었다. 내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카타르시스도 아니었다. 내 자신이 서러워서 우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고통을 내 몸이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나오는, 날것 그대로의 고통이 터져 나오는 거였다. 그 사람은 내 엄마였다. 내 동료였다.
나와 엄마는 늘 함께하며, 같이 세상에 맞서 왔다. 앤드루가 "엄마 머리를 쐈어"라고 했을 때 나는 둘로 쪼개졌다. - P405

"쉬." 엄마가 말했다. "울지 마라, 얘야. 쉬이이. 울지 마."
"어떻게 안 올 수가 있어요. 엄마? 엄만 거의 죽을 뻔했다고요."
"아니, 난 죽지 않았을 거야. 난 죽지 않았어. 괜찮다."
"하지만 전 엄마가 죽은 줄 알았다고요."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엄마를 잃게 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아니지, 얘야, 아가, 울지마, 트레버, 트레버, 내 말 들어. 내 말 들어라 들어."
"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아가, 넌 좋은 면을 볼 줄 알아야 해."
"뭐라고요? ‘좋은 면‘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엄마, 엄마는 얼굴에 총을 맞았어요. 좋은 면 따위는 없다고요."
"당연히 있다. 이제는 네가 공식적으로 가족 중에서 제일 잘생긴 사람이 되었잖니."
엄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서 나도 따라 웃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데 동시에 미친사람처럼 웃음도 났다. 엄마는 내 손을 꼭 붙잡았고, 우리는 늘 그랬던것처럼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엄마와 아들이 중환자실의 고통 속에서 함께 웃고 있었다. 밝고 청명하고 아름다운 날이었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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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에 병석에 누워 있는 시간은 정말 마법의 시간이라고 할 것이다! 바깥세상, 즉 마당이나 정원 또는길거리에서 보내는 자유 시간의 세계는 아주 희미한 소리가 되어 병실로 들어올 뿐이다. 병실 안에는 환자가 읽고 있는 이야기와 형상들의 세계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고열은 주변 세계에 대한 감지력을 떨어뜨리고 상상력을 날카롭게 해 병실을 하나의 새로운, 친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괴물들은 커튼과 벽지의 문양 속에서 흉측한 얼굴을 내보이고,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서가와 옷장들은 산이나 건물 또는 배가 된다. 그것들은 우뚝 솟아올라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우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다. 기나긴 밤 시간 내내 환자와 함께 있어주는 것은 교회 시계탑의 종소리와 가끔씩 지나가는자동차들의 부르릉 소리, 사방의 벽과 지붕을 더듬으며 반사되는 전조등 불빛뿐이다. 이때는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이다. 그러나 불면증의 시간은 아니다. 즉 결핍의 시간이 아니라 충만의 시간이다. 동경, 회상, 불안, 욕망 등이 미로를 만들어놓는다.
환자는 그 미로에서 끊임없이 길을 잃고 또다시 찾았다가 또다시 잃곤 한다. 이때는 모든 것이 가능한 시간이다. 좋은 것이나 나쁜 것 할 것 없이.
그런데 환자의 병이 나으면 이 모든 것은 끝나고 만다. 하지만 병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된 상태라면, 병실은 외부 세계에대해 방수 처리되고 이제 병이 거의 나아 전혀 열이 나지 않는환자라 하더라도 미로 속에서 헤맨다. - P20

나는 가끔 그의 가족인 우리가 그에겐 가축과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산책 나갈 때 데리고 가는 개, 데리고 노는 고양이, 사람의 무릎 위에서 몸을 동글게 말고 있다가 쓰다듬어주면 기분 좋게 가르랑거리는 고양이. 이 녀석들은 우리에게 사랑스런 존재일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양이의 먹이를 사러 가고 변기를 치우고 가축병원에 가는 것은 사실 너무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가족인 우리가 그의 인생 자체였으면 정말로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나는 가끔 늘 불평만 늘어놓는 형과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여동생도 차라리 다른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엔 그들 모두가 갑자기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의 어린 여동생. 생각건대 4남매 중에 막내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큼도 뻔뻔스럽지 않고서는 자기주장을 할 수 없었으리라. 나의 형. 우리는 한방을 썼다. 이것은 분명히 나보다는 그에게 참기 힘든 일이었을것이다. 게다가 내가 병이 난 후로는 방을 완전히 내게 넘겨주고 거실 소파에서 자야 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불평을 늘어놓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의 아버지. 그에게 우리 자식들이 어떻게 인생이 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자라나 곧 어른이 될것이고 그러면 집에서 나갈 테니 말이다. - P34

"이름이 뭐예요?"
나는 7일인가 8일 째 되는 날에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내 몸 위에서 잠들어 있다가 막 눈을 떴다. 나는 그때까지당신이라든가 너라는 호칭을 피했었다.
그녀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이름이 뭐냐고요!"
"그건 왜 알려고 그러니?"
그녀는 나를 의심하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당신하고 나는•••••• 나는 당신 성만 알고 이름은 모르잖아요. 난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어요. 그게 뭐 잘못되기라도••••••."
그녀는 웃었다.
"아무것도 아냐, 꼬마야. 아무것도 잘못된 거 없어. 내 이름은 한나야."
그녀는 계속해서 웃었다. 그녀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바람에 나도 덩달아 웃었다.
"당신 모습이 정말 우스꽝스러워 보여요."
"반쯤 잠들어 있었거든. 네 이름은 뭐니?"
나는 그녀가 내 이름을 알고 있을 걸로 생각했다. 학교에서쓰는 물건들을 책가방 대신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의 물건들을 부엌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으면 맨 위쪽에, 즉 공책뿐만 아니라 책들 위에 적혀있는 내 이름이 보였다. 나는 늘 배운 대로 책들을 튼튼한 종이로 싸고 거기에 책 제목과 내 이름을 적은 표찰을 붙여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 이름은 미하엘 베르크예요."
"미하엘, 미하엘, 미하엘." 그녀는 내 이름을 음미했다. "내꼬마의 이름은 미하엘이고, 대학생......."
"고등학생이에요."
"고등학생이고, 나이는, 열일곱 살?"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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