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졌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증조할머니랑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서로를 모르는 채로 살았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가만히 차를 마셨다. 내가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끝이 슬프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구나."
할머니가 나를 보고 다정하게 미소 짓다가 입을 열었다.
"새비 아주머니는 엄마의 상처였어. 그렇지만 자랑이기도 했지. 엄마를 크게 넘어뜨렸지만, 매번 털고 일어날 힘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엄마가 새비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가장 많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어. 새비가 나를 얼마나 귀애해줬는지 몰라. 새비가 나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아픈 일이 많았는데도, 새비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어. 꼭 다른 세상에 있는사람처럼 말이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처 같은거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는 삶을 택하셨겠네요." - P116

엄마는 내 말에 답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앞으로 걸어갔다.
"날 한 번이라도 그냥 믿어줄 순 없어? 그게 안 돼?"
엄마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지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넌 이보다 잘 살 수 있는 애였어. 똑똑하고 밝고, 너 같은 애가 내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어."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이 그렇게 엄마 마음에 안 차?"
내가 울컥해서 말하자 엄마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엄만 네가 더 잘 살았으면 하는 거지."
"엄마, 이게 나한텐 최선이야.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 이 세상에널리고 널렸어. 나 그렇게 특별하지 않아. 지금 직장도 내 능력에 과분한 곳이야."
"직장 얘기만 하는게 아니잖아."
"엄마, 그만해."
"알았어."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속도를 높여 걸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서로에게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엄마도 알 테니까.
엄마는 일평생 내게 기대하고, 실망했다. 너 정도로 똑똑하고 너 정도로 배운 사람이라면 응당 자신은 꿈도 꿔보지 못한 삶을 사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 엄마의 주장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진 것 별로 없는 그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내게 크게 실망했지만, 내가 결혼을 하고 정상 가족을 꾸린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는 것으로 마음을 돌렸다. 엄마는 사위를 살뜰히 챙겼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을 잘 굴려나가서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모습으로 살기를 기대했다. - P135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이상 없었다. 큰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 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끝이 날까봐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우리는 싱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을 내려왔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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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런 걸 말하는 애가 아니었어."
할머니가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바깥에서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집에와서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울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뒤 집으로 가는 아이였다.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만은 아니었던것 같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방어할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당하곤 하던 내 존재를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존심도 있었던것 같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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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의 발로는 마치 고철(古鐵)이 활기차게 못에서 뛰어오르고, 봄철 죽순이 성내듯이 흙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다. 거짓으로꾸민 감정은 마치 먹을 매끄럽고 넓은 돌에 바르고, 맑은 물에 기름이 뜨는 것과 같다.  - P205

박지원의 청나라 여행기인 「열하일기(熱河日記)』의 「도강록(渡江)」 칠월 팔일(갑신일)자에 실려 있는 <호곡장론(好哭場論)>을 읽어 볼만하다. 조선을 벗어나 요동벌판을 처음 본 박지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한바탕 울 만한 곳이로구나! 가히 한바탕 울 만한 곳이야!" 그때 옆에 있던 정진사라는 이가 박지원에게 이렇게 묻는다. "하늘과 땅 사이에 탁 트여 끝없이 펼쳐진 경계를 보고 갑자기 통곡을 생각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에 박지원은 이렇게 답한다. "사람들은 단지 칠정 가운데 오직 슬픈 감정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 알 뿐 사실 일곱 가지 감정 모두가 울음을 자아낸다는 것은 알지 못하네. 기쁨이 지극해도 울 수있고, 노여움이 지극해도 울 수 있고, 즐거움이 지극해도 울수 있고, 사랑이 지극해도 울 수 있고, 미움이 지극해도 울수 있고, 욕망이 지극해도 울 수 있지. 답답하게 맺힌 감정을 활짝 풀어 버리는 데는 소리 질러 우는 것보다 더 좋은 치료법이 없다네." 그러자 정 진사는 재차 묻는다. "지금 울만한곳이 저토록 넓으니, 저도 선생과 같이 한바탕 통곡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통곡하는 까닭을 일곱 가지 감정 가운데 무엇에서 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감정을 골라잡아야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박지원은 "그것은 갓난아이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이네"라고 하면서, 어머니의 배 속에서 막 나와 새로운 세상을 맞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야말로 거짓 꾸밈없는 천연의 감정이자 최초의 본심이라고 말한다. "갓난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느낀 감정이 무엇이겠는가? 갓난아기는 어머니의 배 속에 있는 동안 어둡고 막혀서 답답하게 지내다가 어머니의 배 속을 벗어나 하루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와 손을 펴보고 다리를 펴보게 되자 마음과 정신이 넓게 활짝 트이는 것을 느낄 것이네. 어찌 참된 소리와 감정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크게 한번 발출하고싶지 않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에는 거짓 꾸밈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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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데리고 가라. 그녀의 치마를 꼭 붙들고 있던 엄마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떼어내던 그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 증조모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다.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 나이, 백정이라는 표지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중조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 자신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야 그녀는 열일곱 살의 자신으로 돌아갔다. 일평생 입다물고 죽은듯이 살았던 열일곱의 증조모가 마지막 나날에야 자유로워졌다.
할머니는 병실 침대에 누워서 할머니를 보고는 방긋 웃던 증조모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어마이, 어마이 왔어? 그렇게 말하며 할머니에게 두 팔을 쭉 내밀던 모습이 말이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고조모에게 느낀 감정이 죄책감일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나면서 고조모에 대한 증조모의 감정이 오로지 깊은 그리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리광 부리고 싶고, 안기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고, 실컷 사랑받고 싶고, 엄마, 엄마,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둔 채로 살아왔을 뿐이라고, 증조모가 할머니를 보며 엄마라고 불렀을 때, 할머니는 고조모가 증조모에게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 P47

허영심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는 평생을 몰랐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사람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을 그녀가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개성으로 오고 나서 그는 향수병에 시달렸다. 형과 누나들도 보고싶고 엄마 아버지도 보고 싶고 두고 온 벗들도 생각났다. 건너 들었을땐 꿈처럼 느껴지던 개성의 거리도 온통 시끄럽고 번잡스러울 뿐 마음을 둘 장소가 아니었다. 겨우 얻은 셋방도 가축우리처럼 느껴졌다.
버젓한 마당과 우물이 있는 고향집이 그리워 자다가도 몇 번이나 깼다. 부모가 정해준 여자와 결혼했다면 여전히 그 집에서 그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았을 텐데. 자신이 잃은 그만큼을 아내는 보상해야 했다. 그런데 아내는 자신의 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감사하는 마음은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여자가 저렇게 뻣뻣하지? 그는 생각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자신과 달리 당당하고 강인한 그녀를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남편으로서의 일말의 권위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예감했고, 아내가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나는 너를 돕기 위해 모든 걸 버렸는데, 왜 그만큼의 대접을 안 해주고 내 기분을 맞춰주지 않는 거지?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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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사찰에서 나던 향 냄새, 계곡의 이끼 냄새와 물 냄새, 숲 냄새, 항구를 걸어가며 맡았던 바다 냄새, 비가 내리던 날 공기 중에 퍼지던 먼지 냄새와 시장 골목에서 나던 과일이 썩어가는 냄새, 소나기가 지나간 뒤 한의원에서 약을 달이던 냄새•••••• 내게 희령은 언제나 여름으로 기억되는 도시였다.
희령에 처음 간 건 열 살 때 일이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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