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정원사는 레몬나무가 어떻게 죽는지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늙은 나무는 만일 벌목되지 않거나 가뭄, 질병, 무수한 해충, 균류, 역병의 공격에서 살아남으면 열매를 너무 많이 맺는 바람에 쓰러진다고 한다. 일생의 끝에 이른 나무에서는 마지막으로 무수한 레몬이 달린다. 마지막 봄이 되면 꽃눈이 트고거대한 꽃송이가 피어 공기를 향기로 채우는데, 어찌나 달콤한지 두 블록 떨어져서도 콧구멍이 아릴 정도다. 그런 다음열매가 한꺼번에 익고 이 초과 중량 때문에 모든 가지가 부러져 몇 주 뒤에는 썩어가는 레몬이 땅을 뒤덮는다. 죽음을앞둔 저런 풍요는 야릇한 광경이라고 그는 말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연어 수백만 마리가 짝짓기와 산란을 한 뒤에 죽는다든지 청어 수십억 마리가 정액과 알로 바닷물을 하얗게 물들이고 나서 태평양 북동부 해안 수백 킬로미터를 덮는다든지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무는 사뭇 다른 생명체이며 이런 과숙의 과시는 식물보다는 인류의 마구잡이식 파괴적 성장과 더 가까워 보인다. 내 레몬나무를 얼마나 살려두어야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베어서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알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이지,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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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딱히 할일이 없던 보어는 논문을 뒤적거리다 이내 읽고 또 읽었는데, 읽을수록 빠져들었다. 하이젠베르크의 새로운 발견에 정신이 홀딱 팔려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하이젠베르크의 성취는 전례가 없었다. 마치 테니스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하나도 보지 못하고도 스타디움밖으로 날아오는 공 몇 개만 가지고 윔블던의 모든 규칙(세트의 수, 잔디의 높이, 네트의 장력, 심지어 선수들이 반드시 흰색 경기복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을 알아내는 것 같았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가 무슨 기상천외한 논리로 이 행렬을 만들어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이 젊은이가 근본적인 무언가를 발견했음은 알 수 있었다. 보어가 맨 처음 한 일은 아인슈타인에게 알린 것이었다. 곧 발표될 하이젠베르크의 최신논문은 꽤나 알쏭달쏭해 보이지만 분명히 참이고 심오하며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1925년 9월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 시보」 제33호에 「운동학적· 역학적 관계에 대한 양자이론적 재해석에 대하여」를발표했다. 양자역학을 최초로 정식화한 논문이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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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라스키는 당에서 이탈한 개혁가들을 경멸한다. 정치적 권력은 총신 끄트머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말을 신봉하며, 이 점을 역설할 때만큼은 뜨거운 솔직함으로 제 무덤을 파기도 한다. 미국 좌파 지형에서 마이클 라스키가 차지하는 입지란 한마디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니 외로운 돈키호테라 하겠다. 인기도 없고 실용성도 없다. 마이클 라스키는 미합중국에 "노동자들"이 있다고 믿고, 때가되면 "봉기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의식적인 단합으로 말이다. 또한 "지배계급이 자의식을 갖고있고, 악마적 힘을 휘두른다고 믿는다. 모든 면에서 이상주의자다.
사실 나는 이 세상의 마이클 라스키들과 함께 있으면 편안하다.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사는 사람들, 두려움의감각이 너무나 날카로워 극단과 실패가 예정된 헌신에 경도되는 사람들, 나 역시 두려움이라면 제법 아는 사람이거니와, 어떤 사람들이 공허를 채우기 위해 애써 만들어내는 정교한 체제들의 가치를 안다. 알코올이나 헤로인이나 색정처럼 접근성이 좋은 것이든 신이나 역사에 대한 믿음처럼 얻기 힘든 것이든 그런 사람들의 아편이 얼마나 값진지 안다 - P95

그 표현이 정확히 옳다. 경제신문을 대충 훑어보는 사람이라면 하워드 휴스가 절대 사업상의 "거래"나 "협상"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휴스는 "사명" 내지 "임무"를 수행한다.
《포춘>이 러브레터를 연재할 때의 표현을 빌리면, 휴스는 언제나 "한 개인의 절대적인 통제권하에 있는 최대 규모 기업자산의 소유주로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또한 휴스는 "동업자"도 두지 않는다. 오로지 "적수"만이 있을 뿐이다. 적수들이 절대적 통제권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면" 휴스는 행동을 취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유독 휴스와 관련된 보도에서 특징적으로 쓰이는 "보이면"이나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라는 이런 표현은, 휴스의 사명이 갖는 특별한 분위기를 암시해주었다. 휴스가 "취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행동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을 골라 "당신이 내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다"고 경고를 할 수도있다는 말이다. 휴스가 싫어하는 것을 하나 꼽자면 단연 머리에 겨누어진 총(일반적으로 이는 행사 참석이나 정책 논의를 뜻한다)이므로 이 메모로 적어도 TWA 항공-휴스가 경영했던 당시 이 회사가 돌아가는 방식과 비슷하게 운영되는조직은 온두라스 정부밖에 없었다-의 사장 한 명은 사직해야 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끝도 없고, 한없이 친숙하다. 휴스의 충실한 추종자들은 이런 일화들을 야구카드처럼 서로 교환하며,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져 출처를 식별할 수 없을 지경이되도록 애지중지한다.  - P102

 우리의 공식적 영웅과 비공식적 영웅은 이처럼 언제나 갈라졌다. 하워드 휴스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원한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공식적으로 흠모하는 것과 은밀하게 욕망하는 것, 가장 광범한 의미에서 우리가 결혼한 사람들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사이에 존재하는, 이 바닥없는 간극을 못 보고 지나칠 수는없다. 겉으로는 갈수록 사회적 미덕을 상찬하는 듯 보이는나라에서, 하워드 휴스는 단순히 반사회적일 뿐 아니라 화려하게, 현란하게, 독보적으로 비사회적이다. 최후의 사적인인간, 우리가 이제 더는 인정하지 않는 꿈이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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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전날 밤 건강진단에서 의사들은 나치 지도자 헤르만 괴링의 손톱과 발톱이 새빨갛게 물든 것을 발견했다. 진통제 디히드로코데인을 하루에 백 알 넘게복용하다 중독된 것이었다. 작가 윌리엄 버로스가 묘사했듯 이 약물은 자극성은 코카인만큼 약하지만 효능은 코데인의 두 배로 헤로인과 맞먹기에 미국 의사들은 괴링을 법정에 세우기 전에 의존증부터 치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연합군에 체포될 당시 괴링이 가지고 있던여행 가방에는 2만 회 넘게 투약할 수 있는 디히드로코데인이 들어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 독일에 남아 있던 생산분의 사실상 전부였다. 그의 중독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독일 국방군 거의 전원이 페르비틴을 지급받았으니 말이다. 이 메스암페타민 알약을 복용한 병사들은 몇 주일 내리잠도 자지 않은 채 광적인 흥분과 악몽 같은 혼수를 오가며 정신 착란 상태에서 싸웠다. 과다 복용한 병사 중 상당수는 걷잡을 수 없는 희열에 사로잡혔다. 사위가 쥐죽은듯 고요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무의미해진다. 마치 내가 조종하는항공기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독일 공군의 한 조종사가 몇 년 뒤 쓴 이 문장은 치열한 격전의 현장이 아니라 지복의 환상을 목격하는 고요한 환희를 회상하는 듯하다.  - P9

독일군 빌리 지베르트는 이렇게 썼다. "기상 통보관 말이 맞았다.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풀이 난 곳은 선명한 초록색이었다. 이런 날엔 우리가 지금 하려는 일이 아니라 소풍을 가야 했다." 그는 그날 아침 이프르에서 독일이 살포한 염소 가스 6000통을 개봉한 병사 중 한 명이었다. "난데없이 프랑스군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1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내가 이제껏 보지 못한 규모로 소총과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이 보유한 모든 야포, 모든 기관총, 모든 소총이 불을 뿜고 있었을 것이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굉음이었다. 탄알이 우리 머리 위로 빗발치듯 날아가는 광경은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가스를 멈출순 없었다. 바람이 가스를 프랑스 전선 쪽으로 계속 밀어갔다. 소들이 울부짖고 말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프랑스군은 계속 사격했다. 자신들이 무엇에 대고 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15분쯤 지나자 포성이 잦아들었다. 반시간 뒤에는 산발적 총성만 들렸다. 그러다 모든 것이 다시 고요해졌다. 얼마 뒤 시야가 걷혔고 우리는 빈 가스통을 지나쳐 걸어갔다. 우리가 본 것은 총체적 죽음이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짐승도 굴에서 나와 죽었다. 사방에 토끼, 두더지, 쥐, 생쥐가 죽어 있었다. 공기 중에는 여전히 가스 냄새가 감돌았다. 남은 덤불 몇 그루에도 냄새가 걸려 있었다. 프랑스 전선에 당도하자 참호는 비어 있었지만 800미터 앞에 프랑스 병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믿을 수없었다. 영국인도 몇 명 보였다. 병사들이 숨을 쉬려고 얼굴과 목을 손톱으로 할퀸 것을 볼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총을쏜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 마구간에 있던 말, 소, 닭, 모든 것이 모조리 죽어 있었다. 모든 것, 심지어 곤충까지도 죽어 있었다." - P31

새벽까지 계속된 파티가 끝나갈 무렵 그의 아내는 정원에 나가 신발을벗고는 남편에게 지급된 리볼버로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그녀는 위층에서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열세 살 아들의 품에서 피 흘리며 숨을 거뒀다. 이튿날 프리츠 하버는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한 채로 동부 전선의 가스 공격을 감독하러 떠나야 했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가스 살포의 효율을 높이는 기법을 가다듬었으며 그러는 내내 아내의 혼령에시달렸다. "며칠에 한 번은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에 나가있는 게 도움이 된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매 순간이며 유일한 임무는 참호에 갇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러고 나서 본부에 돌아와 전화기에 붙들려 있다보면 그 가련한 여인이 내게 했던 말이 심장 속에서 울려퍼진다. 기진맥진하여 환각이 보일 땐 명령서와 전보 사이로 그녀의 머리가 나타난다. 그것은 고통스러운경험이다."
1918년 휴전 이후 연합군은 프리츠 하버를 전쟁 범죄자로규정했다. 자신들도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못지않게 가스를 쓰고 싶어서 안달이었던 주제에 말이다. 그는독일을 떠나 스위스에 자리잡았는데,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전의 발견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발견은 수십 년 뒤 인류의 운명을 바꿀 터였다.
1907년 하버는 식물 생장에 필요한 주요 영양소인 질소를 사상 최초로 공기 중에서 직접 채취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그는 20세기 초에 전례 없는 세계 대기근을 몰고 올 뻔한비료 부족 사태와 맞섰다. 하버가 아니었다면 구아노와 초석같은 천연 비료에 의존하여 농사짓던 수억 명이 영양 결핍으로 사망했을 것이다.  - P34

프리츠 하버가 죽을 때 지니고 있던 몇 안 되는 소지품 중에는 아내에게 쓴 편지가 있었다. 편지에서 그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무수한 사람들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기 중에서 질소를 뽑아내는 자신의 방법이 지구의 자연적 평형을 무지막지하게 교란하는 바람에 인류가 아니라 식물이 세계를 차지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단 몇십 년 동안이라도 인구가 산업시대이전으로 감소한다면 인류가 공급한 잉여 영양소 덕에 식물이 무한히 증식하여 지구에 두루 퍼지고 땅을 완전히 뒤덮어 모든 생명을 끔찍한 초록 아래 질식시킬 테니까. - P42

그럼에도 이 생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전쟁의 아수라장에서도 특이점은 얼룩처럼 그의 마음속에 퍼져 참호의지옥도를 덮었다. 진흙 구덩이에 파묻힌 죽은 말의 눈에서,
동료 병사의 총상에서, 흉측한 가스 마스크의 뿌연 렌즈에 서 그는 특이점을 보았다. 그의 상상력은 자신이 발견한 결과에 매혹되었다. 만에 하나 특이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주의 종말까지 지속될 것임을 두려운 마음으로 깨달았다. 이상적 조건이 갖춰지면 그 항성은 영생하는 천체가 되어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으면서 영영 그대로 머물러 있을 터였다. 그것은 여느 천체와 달리 어떤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이중으로 탈출이 불가능했다. 특이점은 기묘한 기하학적 공간을 만들어내 시간의 양끝에 자리잡았다. 특이점으로부터 가장 먼 과거로 달아나거나 가장 먼 미래로 탈출하더라도 다시 한번 특이점을 마주칠 뿐이었다. 슈바르츠 실트는자신의 발견을 아인슈타인에게 알리기로 한 바로 그날 러시아에서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의 내부에서 자라기 시작한 이상한 것에 대해 불평한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억누를 수 없는 힘으로 나의 모든 생각에 어둠을 드리워. 그건 형태나 차원이 없는 공허, 볼 순 없지만 온 영혼으로 느낄 수 있는 그림자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자는 그의 몸을 침범했다. - P49

쿠란트는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다. 쿠란트가 의사들에게진료받은 뒤 호송대에 합류하여 베를린으로 떠나기 직전 슈바르츠실트는 평생 쿠란트를 괴롭힐 질문을 던졌다. 당시에는 죽어가는 군인의 헛소리요, 피로와 절망에 시달린 슈바르츠실트의 정신을 스멀스멀 사로잡은 광기의 산물인 줄 알았지만 슈바르츠실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은 것은 이것이었다.
물질이 이런 종류의 괴물을 낳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정신과도 상관관계가 있을까? 인간 의지가 충분히 집중되면,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특이점에 비길 만한 일이 벌어질까? 슈바르츠실트는 그런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조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쿠란트는 그를 달래려 애썼다. 슈바르츠실트가 두려워하는 종말의 징조는 전혀 보지 못했으며 자신들이 빠져든 전쟁보다 나쁜 일은 일어날 리 없다고 말했다. 인간 영혼은 어떤 수학적 수수께끼보다도 큰 신비이며 물리학의 발견을 정신처럼 방대한 영역에 투사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상기시켰다. 하지만 슈바르츠실트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검은 태양이 지평선 위로 올라와온 세상을 집어삼킬 거라고 횡설수설했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탄식했다. 특이점은 어떤 경고도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돌아올 수 없는 지점, 한번 넘으면 무지막지하게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한계에는 어떤 표시도 경계도 없다고, 그 선을 넘는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모든 가능한 궤적이 돌이킬 수 없이 특이점으로 이어지기에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슈바르츠실트가 눈에 핏발이 선 채 물었다. 그 문턱의 성질이 이렇다면 우리가 이미 특이점에 들어섰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쿠란트는 독일로 돌아갔다. 슈바르츠실트는 그날 오후 사망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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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섬잣나무(백송의 발상지를 찾으러 이곳에 왔다. 1625년에 이 나무의 어린나무가 채근되어 일본 본토로 옮겨졌다. 그곳에서더 단단한 곰솔black pine (흑송)의 뿌리에 접붙여져 조금씩 분재로 다듬어졌다.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이 나무는 콜로라도에서 내게 그늘을 드리운 폰데로사소나무처럼 20미터까지 자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규칙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서 성장을 억제한 탓에 이 나무의 도기 화분 옆에 서면 그늘이 무릎 높이 위로는 올라오지 않는다. 가지와 뿌리를 쳐주면 나무가 왜소해질 뿐 아니라 줄기도 곧고 바늘잎 우듬지가 균형을 이룬 형태로 자란다. 게다가 여느 분재와 마찬가지로 가지에 철망을 둘러 인간의 눈에 보기 좋은 형태를 이끌어냈다.
폰데로사소나무의 뿌리와 균류 그물망은 뿌리 끝이 닿지 않는 흙속 깊숙한 곳에서 물을 끌어당길 수 있다. 접붙인 섬잣나무는 여느 분재와 마찬가지로 이런 거대한 근계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사람이 유심히 살피며 매일 때로는 하루에 두 번씩 물을 줘야 한다. 또한1~2년에 한 번씩 오래된 뿌리를 잘라내어, 넓고 얕은 화분의 제한된 공간을 어린 잔뿌리가 고루 채우도록 해야 한다. 분재 화분에서도 공생 균류가 흙에 서식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노동이 균류의 일을 대부분 대신한다. - P314

이것은 야마키 섬잣나무라는 원자적 나무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한 가지 결론인지도 모른다. 식물이 노예가 되었다가 폭격을 맞는 이야기.
하지만 야마키 섬잣나무에 대한 관람객의 반응은 이런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분재는 생명 그물망을 벗어나지 않는다. 올리브 농장에서처럼, 분재는 다른 곳에서는 알아차리기 힘든 사실 인간의 삶과 나무의 삶은 언제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많은 나무에서 그물망의 주된 구성 요소는 세균, 균류, 곤충, 새 같은 인간 아닌 종이다. 올리브나무와 분재는 인간을 한가운데로 보내어우리로 하여금 지속적 관계의 중요성을 직접 경험하게 한다.
이 연결이 끊어지면 생명이 위축되고 때로는 끝난다. 레반트에서는 관계가 끊어지면 기름을 내던 나무들이 쇠락하거나 죽으며 나무에 의존하는 경제와 문화도 같은 운명을 겪는다. 분재에서는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단절된 나무는 금세 죽는다. 수 세기에 걸친 나무의 생장과 인간의 노고로 인한 결실도 함께 사라진다. 이 손실이 식량 사정과 가정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올리브 농장에 비하면 크지 않지만 문화에는 깊은 타격을 가한다. - P323

부副큐레이터 애린 패커드Aarin Packard는 분재의 흙과 잔가지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내게 말했다. 초심자는 자신이 나무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고, 줄기와 가지에 원하는 형태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배움이 쌓이면서 형태란 생명들의 예측할 수 없는 만남에서 생기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급 분재가는 15년 이후의 형태 변화까지 내다볼 수 있을 겁니다. 존 나카John Naka 같은 대가들은 반세기까지도 볼 수 있겠죠. 그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미래는, 전개되는 텔로스는 어떤 자아에도, 나무의 씨앗이나 인간의 마음에도 담겨 있지 않다. 그 근원과 재료는 살아있는 관계의 가닥들에 담겨 있다. 분재는 원예라는 거울을 통해 나무의 본성을 비춘다. 나무는 공생명共生命, 즉 다수의 대화로 이루어진 존재다. - P325

나눌 수 없는 원자라는 개념은 환각임이 드러났다. 이 환각은 히로시마 상공 600미터에서 산산조각 났다. 개별성의 가면이 부서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에너지가 분출되었다. 절에서는 돌에 새겨진 부처의얼굴이 녹았다.
1964년에 원폭 생존자들이 홍법대사의 소나무 통나무에서 불을 가져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기념비와 공동묘지 가운데 있는 가스불을 점화했다. 나무로 종을 치자 미야지마의 숲 신사에서 들은 소리가났다.
야마키 가문은 원자를 넘어 예술을, 생명의 통합을 이뤄냈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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