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주장한 ‘음모‘ 죄는 기각되었는데, 이 항목으로 그는 ‘주요 전범‘이 되어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 자동적으로 책임지도록 되어있었다. 그들은 비록 몇몇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면소를 시키기는 했지만 15개의 기소 항목 모두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다른 죄목과함께‘ 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범했다. 즉 1)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살상함으로써‘ 2)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신체적인 파멸로 이끄는 상황으로 몰아감으로써, 3) 그들에게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해를 끼침‘으로써, 4)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유대인 여성들의 출산을 금하고 임신을 방해함으로써 이 민족을 파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유대인에 대해범죄를 저질렀다는 4가지 기소 항목에 따라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그들은 1941년 8월 이전의 시기에 대해 부과된 어떠한 죄목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는데, 그 시점은 총통의 명령이 전달된 때였다. 그 이전의 시기의 활동들과 베를린 및 빈, 프라하에서 그는 ‘유대인을 파멸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 P339

11항에서는 ‘수천 명의 집시들‘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한 것을 다루었다. 그러나 판결문에서는 "피고가 집시들을 파멸 지역으로 이송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가 우리 앞에서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말의 의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대량학살 죄목도 부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집시들의 처형이 상식이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아이히만은 경찰심문 시 그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힘러의 명령이었다는 것. 유대인에 대해서 있었던 것과 같은 ‘지시사항‘이 집시들에게는 없었다는 것. 그리고 ‘집시 문제‘에 대해서는 기원과 관습, 습관, 조직•••••• 민요•••••• 경제‘ 등과 같은 것에 대한 어떠한 ‘조사‘도 없었다는 것을 아이히만은 희미하게나마 기억했다. 그의부서는 제국의 영역으로부터 3만 명의 집시들을 ‘소개하는 업무를 담당했는데, 그가 세부사항들을 아주 잘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은 어느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집시들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제거되기 위해 이송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는 결코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유죄인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집시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유죄였다.  - P340

자신이 기소된 범죄들에 대해 ‘교사‘한 부분에서만 유죄일 뿐이며, 공공연한 행위를 자행한 적이 결코 없었다는 것을 아이히만이 줄곧 주장한 점은 기억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판결문은 검찰이 이 점에서 아이히만이 유죄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한편으로 인정했다. 이 점은 중요했다. 그것은 일상적 범죄에 해당되지 않는 이 범죄의 핵심 자체에 닿아 있으며, 일반 범죄자가 아닌 이 범죄자의 본질 자체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함축적으로 판결문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제로 살상 수단들을 손으로 조작한 사람들은 통상 수감자들과 희생자들이었다는 섬뜩한 사실을 역시 인정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했던 것은 정확성 이상의 것이었으며, 그것은 진실이었다. "우리의 형법 제23조에 따라 그의 행동들을 표현하자면, 그들은 타인에게 [범죄적] 행위를 하도록 돕거나 사주한 사람이거나, 또는 자문이나 충고를 함으로써 유혹한 사람이라고 말해야만한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고민하고 있는 범죄의 경우처럼 엄청나고 복잡한 경우, 즉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차원에서 그리고 다양한 행동방식(그들의 다양한 지위에 따라 입안자, 기획자, 실행자)으로 참여한경우 범죄를 저지르도록 자문하고 유혹했다는 일상적 개념을 사용하는것은 의미가 없다. 이러한 범죄들이 희생자의 수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범죄에 개입한 사람들의 숫자의 측면에서도 집단적으로 이루어졌기때문에, 이 수많은 범죄자들 가운데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와 반대로,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 P342

원래의 판결문과 명백히 대조된 점은 "항소자가 ‘상관의 명령‘을 전혀 받지 않았음"이 이제는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스스로가 자신의 상관이었으며, "유대인 문제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그가 모든 명령을 내렸다." 더욱이 그는 "중요성에 있어서는 뮐러를 포함한 그의 모든 상관들을 능가했다." 아이히만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유대인의 운명이 더 나아지지는 않았을것이라는 피고 측의 주장에 대해, 판사들은 이제 "최종 해결책이라는 아이디어는 항소자와 그의 공범자들의 억누를 수 없는 피의 갈증과 광신적 열정이 없었다면 수백만의 유대인의 벗겨진 살갗과 고문당한 살이라는 연옥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검찰의 논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언어 자체도 차용한 것이다.
같은 날인 5월 29일에 이스라엘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는 ‘변호사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4장의 친필로 된 아이히만의 사면 청원서를 린츠에 있는 그의 아내와 가족으로부터 온 편지와 함께 받았다. 대통령은 또한 전 세계로부터 온 관대한 조치를 호소하는 수백 통의 편지와 전문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 저명한 인사로는 미국랍비중앙회, 미국개혁주의 유대교대표단, 그리고 마르틴 부버가 이끄는 예루살렘 소재 히브리 대학 교수의 한 그룹이 있었다. 부버는 처음부터 이 재판에 반대했으며, 이제는 벤구리온에게 관대한 조치를 내리도록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대법원이 판결을 내린 지 이틀이 지난 5월 31일에 벤츠비씨는 모든 자비의 청원을 물리쳤다. 그리고 같은 날 몇 시간이 지난 뒤(그날은 목요일이었다) 자정이 되기 직전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사체는 화장되었고 재는 지중해의 이스라엘 수역 밖에 뿌려졌다. - P345

마르틴 부버는 이 재판을 "역사적 차원에서의 실수"라고 불렀다. 이 일이 "독일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느끼는 죄책감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상하게도 아이히만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부버는 아이히만이 독일 청년들의 어깨에서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을 공개처형해주기를 원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다. (부버처럼 저명할 뿐만 아니라 아주 위대한 지성인이 이 같은 아주 대중화된 죄책감이 필연적으로 얼마나 기만적인가를알지 못했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만일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 데도 죄책감을 느낀다면 이는 유쾌한 일이다. 이 얼마나 고귀한일인가! 반면 죄를 인정하고 회개를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며 상당히 우울한 일이다. 독일의 젊은이들은 생활의 모든 면과 모든 행로에서 실제로 죄가 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정부 당국이나 공공기관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이런 사태에 대한 정상적반응은 분개하는 것이겠지만, 분개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생명과 신체에 위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취업에 결정적으로 장애가 된다. 아주 가끔씩, 「안네의 일기』와 같은 소동이나 아이히만 재판과 같은 경우, 히스테리컬한 죄책감의 분출로 우리들을 대하는 그들 젊은 독일의 남녀들은 과거의 부담, 즉 그들의 아버지의 죄 아래서 혼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바로 현재의 현실적인 문제들이 주는 부담으로부터 값싼 센티멘털리티로 도망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 P347

아돌프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그는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했고 그 절반을 마셨다. 그는 그에게 성서를 읽어주겠다고 제안한 개신교 목사 윌리엄 헐 목사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는 두 시간밖에 더 살 수 없기 때문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감방에서 형장에 이르는 50야드를 조용히 그리고 꼿꼿이 걸어갔다. 간수들이 그의 발목과 무릎을 묶자 그는 간수들에게 헐렁하게 묶어서 자신이 똑바로 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검은색 두건을 머리에 쓰겠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그것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는 완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로 남긴 기괴한 어리석음보다도 이 점을 더 분명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자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 P349

 뉘른베르크 국제군사법정은 그들의 범죄가 지역으로 구분될 수 없는 전범들을 위해서 수립되었는데, 그 외 모든 다른 전범들은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나라들로 보내졌다. 오직 ‘주요 전범들만이 지역의 한계 없이 활동했고, 아이히만은 분명히 그러한 사람들가운데 한 명은 아니었다. (이것이 그가 뉘른베르크에서 고발되지 않은 이유였다. 흔히 언급되는 것처럼 그의 잠적이 이유가 아니었다. 예컨대 마르틴 보르만은 궐석으로 고발되고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았다.)만일 아이히만의 활동이 점령지 유럽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그가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어서 지역적 제한이 그에게는 적용되지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그의 부하들이 전 유럽대륙을 돌아다닌 것이 그의 업무, 즉 모든 유대인을 모아서 이송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범죄가 뉘른베르크 헌장의 제한적인 법적 의미에서 ‘국제적 관심사로 만든 것은 유대인이 지역적으로 분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일단 유대인이 그들 자신의 영역, 즉 이스라엘 국가를 갖게 되자 마치 폴란드인들이 폴란드에서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심판할권한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의 권한을 유대인은 자기 민족에 대해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분명히 가지게 된 것이다.  - P357

희생자가 유대인인 한에서는 유대인의 법정이 재판하는 것이 옳고도 적절하다. 그러나 그 범죄가 인류에 대한 범죄인 한, 그 범죄를 심판하는데는 국제 재판소가 필요했다! (법정이 이러한 차이점을 인식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그 차이에 대한 구분이 전 이스라엘 법무장관 로젠 씨에의해 과거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놀랄 만한 일이다. 로젠 씨는 1950년에 "[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위한]이 법안과 대량학살 방지 및 처벌법의 차이점"에 대해 주장했는데, 이러한 구분이 이스라엘 의회에 의해 논의되었으나 통과되지는 않았다. 법정은 국내법의 한계를 넘어설 권리가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법에 해당되지 않는 대량학살은 그 논의의 적절한 대상이 될 수 없었음이 분명했다.) 예루살렘에서 재판하는 데 대해 반대하며 국제 재판소를 선호한 수많은 고도의 자격을 갖춘 목소리들 가운데 오직 하나, 카를 야스퍼스의 목소리만이 (재판이 시작되기전에 가진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 말이 나중에 『모나트」에 인쇄되어)나왔다. "유대인에 대한 범죄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점과 "따라서판결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법정에서만 내려질 수 있다"는 점을 명백하고 분명하게 진술했다. 사실과 관련된 증언을 청취한 뒤 예루살렘법정은 스스로 판결을 ‘내릴 자격이 없음‘을 공표하면서 판결의 권리를 ‘철회할 것을 제안했다. 왜냐하면 문제가 된 범죄의 법적 성격이아직도 논쟁의 대상이 되어 있고, 그에 이어지는 질문, 즉 누가 국가의 명령에 따라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판결을 내릴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야스퍼스는 한 가지 점만은 분명하게 주장했다. "이 범죄는 일반적 살인 그 이상이면서 동시에 그 이하이다." 그래서 비록 이것이 ‘전쟁범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국가들이 그러한 범죄가 지속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인류는 분명 파멸될 것이다." - P3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롤로그

1972년
콜로라도주 콜로라도 스프링스

남매는 부엌에서 뒷마당으로 이어진 뒷문을 통해 집을 나섰다. 그들은 기이한 한 쌍이다. 스물일곱 살인 도널드 캘빈의 두 눈은 움푹들어가 있다. 머리카락은 완전히 밀어버렸고, 턱에는 성경에 등장할법한 후줄근한 턱수염이 자라나려 했다. 키가 도널드의 허리쯤 오는 일곱 살 먹은 메리 갤빈은 밝은 금발에 작고 둥근 코를 가졌다.
갤빈 가족은 콜로라도 우드먼밸리에 살고 있다. 경사진 구릉과사암 절벽 사이에 자리한 우드먼밸리는 숲과 들판, 농지가 광활하게 펼쳐진 지역이다. 갤빈 가족의 집 마당에서는 싱그러운 솔향기와 흙냄새가 났다. 주변의 바위 정원에는 검은방울새와 큰어치가 빠르게 날아다니고, 가족이 키우는 ‘애솔‘이라는 참매가 아버지의 새장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 여동생이 앞장선 가운데 남매는 너무나 익숙한 이끼 덮인 돌들을 밟으며 작은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 P10

알츠하이머병이나 자폐증과 같은 뇌 질환도 개개인이 가진 특성을 희석하고 소멸시킨다는 점에서 심각한 병이다. 하지만 조현병이 특히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환자의 감정이 극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조현병의 증상은 어떤 감정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증폭시킨다. 환자들은 이미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격렬한 감정에 압도되는데, 그 모습은 그들을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을 겁먹게 한다. 가까운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한 가족에게 있어 조현병은 마치 가족의 기반이 아픈 구성원 쪽으로 영원히 기울어지는 것 같은 경험으로 다가온다. 가족 중 단 한 명이라도 조현병 환자가 존재한다면 그 가족 속 삶의 논리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다.
정신질환에 걸리지 않은 형제자매들도 아픈 형제들만큼이나 여러 면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열두 명의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전체와 개인을 분리하기는 힘들었다. 특히 정신질환이 일상이 되면서 다양한 사건이 발생했고 가족의 모습은 서서히 달라졌다. 정신질환은 가족이 하려는 무슨 일에든 영향을 주는 기본 조건이 되었다. 린지, 마거릿, 존, 리처드, 마이클, 마크에게 갤빈 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도 미쳐버리거나 다른 형제가 미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 그 둘 중 하나였다. 그들은 정신질환을 곁에 두고 성장했다.
망상, 환각이나 편집증에 빠져들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집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CIA가 그들을 찾고 있거나 침대 아래 악마가 있다고 믿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신 안에 불안정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늘 ‘언제쯤 그것이 나를잡아먹을까?"라고 생각했다. - P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가 이스라엘에 와서 재판을 기꺼이 받으려 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드러난 사실이라기보다는 증명된 것이었다. 물론 피고 측 변호사는 무엇보다도 피고가 납치되었고 따라서 "국제법에 저촉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로 데려왔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법정이 그를 처벌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점에 대해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사나 재판관들이 그러한 납치가 ‘국가에 의한 행위‘였다는 점을 결코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 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국제법의 훼손이 아르헨티나와 이스라엘 두 국가에만 관계될 뿐 피고의 권리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훼손은1960년 8월 3일에 있었던 "양국은 아르헨티나 국가의 기본적 권리를침해한 이스라엘 시민들의 행위로 인해 야기된 사건이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공동선언을 통해 ‘해결‘되었다고 주장했다. 법정은 이들 이스라엘인들이 기관원인지 민간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결정했다. 피고도 또 법정도 언급하지 않은 점은,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 시민이었더라면 아르헨티나는 자신의 권리를 그렇게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거기서 가짜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를 낳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는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그의 아르헨티나 신분증에는 남 티롤 지방에 있는 볼차노에서 1913년 5월 23일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었다)으로 거기서 살았다. 비록 그는 자신이 ‘독일 시민권자임을 천명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는 결코 망명자에게 해당하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권리를 주장하지는 않았는데, 만일 그렇게 했더라도 그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아르헨티나가 많이 알려진 나치스 범죄자들에게 망명을 사실상 허용하기는 했지만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정치범이 될 수 없다‘는 국제협약에 조인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로 인해 아이히만이 무국적상태가 되거나 또는 독일국적을 법적으로 박탈당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서독으로 하여금 해외거주 시민에 대해 제공하는 통상적 보호책에 대해 보류하게 만드는 좋은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 P333

 다른 말로 하면 수많은 법적 논쟁에도 불구하고, 납치가 빈번히 이루어진 체포의 한 양상이라는 인상을 결국 사람들이 갖게 된 수많은 전례들에 근거하여, 예루살렘 법정이 아이히만에대한 재판을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아이히만이 사실상 무국적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이 비록 법률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 점을 잘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오직무국적 상태로서만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몰살당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국적을 상실해야만 한 것이다. - P334

그가 이스라엘에 와서 제시한 두 번째 이유는 더 극적이었다. "1년 반쯤 전 [즉 1959년 봄]저는 독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인으로부터, 어떤 죄책감과 같은 느낌이 독일 청년 일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책감 콤플렉스와 같은 사실이 제게는 말하자면 마치인간을 태운 우주선이 달에 처음으로 도착한 것과 같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내면생활의 핵심 속의 한 점이 되었고, 그 주위로 많은 생각들이 결정체처럼 얽혔지요. 이것이 바로•••••• 수색대가 제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고도•••••• 제가 도망가지 않은 이유입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죄책감에 대한이 대화를 한 후에 저는 잠적할 권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것도 또한 제가 이 심문이 시작될 때 서면 진술서에서•••••• 제자신을 공개처형하라고 제안한 이유입니다. 저는 독일의 청년들로부터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제가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이 젊은이들은 무엇보다도 지난 전쟁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들이 한 일들에 대해 결백하기 때문이죠." ‘지난 전쟁‘을 그는다른 맥락에서는 ‘독일제국에 강요된 전쟁‘이라고 여전히 부르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그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독일로 자발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이 질문을 그가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의 생각에 독일 법정이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다룰 때 필요한 ‘객관성‘을 아직도 상실한 채 있다고 대답했다.  - P3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길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길 수 있다고 믿어야소금도 하지만 했다. 왜냐하면 나 혼자 힘으로 이겨내는 방법밖에는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즈음부터 나는 밤늦게 아무도 없는 산길을 천천히 걷기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불빛 속으로 뛰어가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어둠 속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걸으면서나는 어둠을 하나하나 들여다봤다. 어둠은 나를 삼켜버릴 정도로 무서웠다. 하지만 매일 그 아이를 만나는 일은 그보다 더 무서웠다. 어둠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아이를 이겨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감이 나를 그렇게 내몰았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경우는 어둠 속에서 멀리 불빛이 보일 때다. 그 불빛이 얼마나 정겨운지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어 견딜수가 없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참아야만 했다. 왜 어둠 속을 걸어야만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다. 왜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도 모르고 어둠 속을 걸어가야만 했던 그중학교 2학년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 P199

밤이 얼마나 지났는가, 아직 절반도 못 되었네.
뭇별들이 눈부시게 빛을 내누나.
깊은 산 그윽한 골짜기 어둡기만 한데
그대는 어이해 이 고장에 머무는가.
夜如何其夜未央 繁星燦爛生光芒
深山幽邃杳冥冥 嗟君何以留此鄉

김시습은 이 시에서 ‘‘杳冥冥묘명명‘이라고, 그러니까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어둡다‘며 세 번이나 어둡다는 말을 썼다. 김시습이 맞닥뜨린 어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스물한 살 시절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수양대군이 나이 어린 단종에게서 정권을 탈취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흘이나 두문불출한 다음에 통곡하고 책들을 모두 불살랐다더니 그런 참담한 시대를 일컫는 것이었을까? 얼마만큼 어두웠기에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어둡다‘라고쓸 수 있을까? 그만큼 삶이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어두웠다는뜻이 아닐까?
지리산으로 도망칠 용기도 없음을 확인하고 풀숲에서 나오는 내게 그 아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괜찮느냐고 물었다. 까치산에서 내려간 나는 수업을 빼먹은 일로 교무실로 불려갔다. 왜 그랬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모의고사를 망쳐서 그랬는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재차 물었다. 나는 선생님의 눈을 쳐다보며 똑같이 대답했다. 그 말을 믿었는지, 아니면 전후사정을 짐작한 것이었는지 선생님은 내게 앞으로는 마음대로 수업을 빼먹지 말라고 말했다. 교무실에서 나왔더니 그 아이가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대로 얘기했다. 그 아이는 잘했다며 안심했다. 까치산에서 내려온 뒤부터 그 아이는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나는 웃고 싶을 때 웃을 수 있었고 놀고 싶을 때 놀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울지 않았다.
김시습이 맞닥뜨린,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어두운 밤은 아니었지만 중학교 2학년 시절 나도 어둡고 어두운 어둠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어둠을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주 하찮은 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제 몸으로 어둠을 지나오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가장 깊은 어둠을 겪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건 중학교 2학년생에게는 너무 가혹한 수업이었지만, 또 내 평생 잊히지 않는 수업이기도 했다. - P200

생>이라는 노래가하지만 바다는, 그런 바다는 다시 보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처음으로. "바다다"라는 말에 놀라던 그때로 흘러간다. 세월은, 그렇게, 그렇게 부드럽게, 따뜻하게. 일본 시인 기타하라하쿠北의 세월은 가네」라는 시를 읽으면 가끔 아무런 후회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던 세월의 속도다. 그시절이 결코 아니다.

세월은 가네. 붉은 증기선의 뱃전이 지나가듯
곡물창고에 번득이는 석양빛,
검은 고양이의 아름다운 귀울림 소리처럼,
세월은 가네. 어느 곁엔가, 부드러운 그늘 드리우며 가네.
세월은 가네. 붉은 증기선의 뱃전이 지나가듯.

다시 한번 그렇게 세월을 보낼 수 있다면, 간절히, 손꼽아 수학여행을 기다릴 수 있다면 "어텐션 플리즈, 바우!"의 세계를 소망할 수 있다면, 깜짝 놀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도, 나이가 들고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릴 수만 있다면. - P212

눈에 익은 추사 글씨를 보다가 2층 한쪽에 걸린 난 그림을 보게됐다. 이파리 세 개가 너무나 아름답게 종이를 가르고 있었다.
추사는 그 그림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놓았다.

봄빛 짙어 이슬 많고, 땅 풀려 풀 돋다.
산 깊고 해 긴데, 사람 자취 고요하니 향기만 쏜다.
春濃露重 地暖艸生 山深日長 人靜香透

나는 그 그림의 화제, ‘春濃露重춘농로동‘을 몇 번이나 되면서 성북동 고갯길을 걸어 내려왔다.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는구나. 그렇구나.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
추사의 그림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도 엉엉 소리내 울었을지도 모른다. 저녁 어스름 무렵이면 뒷골목 식당 알전구 아래 앉아 두 분이서 재미나게, 참 재미나게 말씀하셨지. 서울 아저씨는늘 웃으면서 농담을 하셨지.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니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니까. 우리가 왜 살아가는지 이젠 조금 알 것도 같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렇게, 그냥 그 정도로만, 그럼, 다들 잘 지내시기를. - P2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집의 식구들은 모두 스물넷에서 서른두 살 사이의 사람들이었다.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 늘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또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 옛 가족은 떠났으나 새 가족은 이루지 못한 나이. 그 누구와도 가족처럼 지낼 수있으나 다음 날이면 남남처럼 헤어질 수 있는 나이. 그래서인지 우리는 금방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친해질 수 있었다. - P141

그런 식으로 오후를 보낸 뒤, 도서관 유리문을 열고 나오던 어느 저녁이었다. 5월의 푸른 밤이 교정 위로 드리워졌다. 도시의 붉은 불빛에 검게 기대 선 저녁 산 이마 위로 별빛이 반짝였다. 유리문을 열자마자, 유리문을 열고 조금 걸어 나오자마자, 참으로 푸른 밤이구나는 생각을 하자마자, 내 귓전으로 노랫소리 크게 울려 퍼졌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안에 가득한데 이런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저도 모르게 나는 그 노래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노래는 계속됐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맘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무슨일인지 학교 가운데 있던 금잔디 광장에 많은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키가 작은 사내 하나가 통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며 서 있었다. 그게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본 김광석이었다. 그날, 나는 김광석의 그 노래와 완벽하게 소통했다. 그 느낌은 죽어도 잊지 못할 느낌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그날, 유리문을 열자마자, 유리문을 열고 조금 걸어나오자마자, 참으로 푸른 밤이구나는 생각을 하자마자 내 귓전으로 들려오던 노랫소리 귀에 들리는 듯하다. 예술이란 결국 마음이 통하는게 아니라 몸이 통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던 그때의 일들이 어제인 듯 또렷하다. - P144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김광석은 젊어서 죽고 2003년을 기점으로 나는 김광석이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살게 됐다. 정약용의시 중에 다음과 같은 게 있다.

어느새 가을 멀리 가버렸으나
숲나무엔 가을 뜻 아직 남았네
적막한 바위 틈엔 물기 마르고
맑은시내 어귀에 뗏목 깔렸다
나무꾼은 상수리 밤톨 줍고
스님은 우물에서 무를 씻네
석양빛 아직 아니 사라졌는데
등나무엔 초승달 벌써 올라와
翛然秋遠逝 木林有餘情 斷溜雲根靜 横槎澗口清
野樵收橡果 儈井洗蕪菁 未了斜陽色 藤梢月已生

어느새 청춘은 멀리 가버렸으나 내 마음엔 여전히 그 뜻 남아 있는 듯, 지금도 나는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면 몸이 아파온다. 석양빛 아직 아니 사라졌는데 등나무에 벌써 올라선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청춘은 그런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가는 그 빛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떠나버렸다. - P1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