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장애는 주립 정신병원들에서 두 번째로 흔한 질병30이기 때문에 나는 자신이 ‘우리‘에 속하는지 ‘그들‘에 속하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인간은 합의된 규범들에 따라 살아가며, 반복적으로 확인된것이기에 이성에 매달린다. 만일 우리가 헬륨으로 가득한 세계에서살게 된다면 중력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될 것이다. 노리스타운에서나는 현실 감각이 희박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 곳에서는 아무런 확신을 가질 수가 없으며 온전한 정신은 바깥세상에서 정신이상이 그렇듯이 특이한 것이 된다. 나는 노리스타운에 갈 때마다 정신이 무중력 상태가 되어 와해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 P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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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그래도 그녀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아내는 건 그녀로변신하려던 여자를 알아내는 일과 연결될 겁니다. 일단은 거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세키네 쇼코는 타인의 신분을 원하는 여자가 주목할 만한 뭔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별안간 이사카가 노래하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화차여••••••"
"화차?"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혼마에게 이사카가 천천히 뒷말을이었다.
"화차여, 오늘은 내 집 앞을 스쳐 지나, 또 어느 가여운 곳으로 가려하느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어젯밤에 집사람이랑 개인파산 얘기를 나누던 중에 문득 떠올랐어요. 옛날 노래예요. 「슈교쿠슈에 있던가."
돌고도는 불수레.
그것은 운명의 수레였는지도 모른다. 세키네 쇼코는 거기서 내리려했다. 그리고 한 번은 내렸다.
그러나 그녀로 변신한 여자가 그것도 모르고 또다시 그 수레를 불러들였다. - P145

"그러고 보니 신용대출 대란도 어느새 십 년이 더 지난 일이군요. 쇼와 58년(1983년) 11월에 신용대출 규제법이 만들어져서 대출업자가 폭력적인 빚 독촉을 할 수 없게 된 후로는 우리 사무실에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 분위기도 많이 변했습니다. 말랑말랑해진 반면 더 넓게 확산되었다고 할까요. 비장한 느낌은 줄었지만, 그만큼 자각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손쓰기 늦어버린 겁니다."
"오히려 더 질이 나빠졌을지도 모르겠네요."
변호사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난 말이죠. 강의 같은 데서 ‘어쨌거나 야반도주를 하기 전에, 죽기전에 사람을 죽이기 전에 파산이라는 수단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청중들은 그걸 듣고 웃죠. 그러나 이것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닙니다. 파산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직장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호적이나 주민표를 옮기면 빚쟁이들에게 발각되니까 아이 학교도 가입학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숨죽이고 살아가는 거죠. 한 예로 원자력발전소에서 청소 작업을 하는 노동자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어요.
과거를 숨겨야 하기 때문에 위험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 ‘버려진 이들‘이 이삼십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도저히 그냥 두고 볼수만은 없죠."
살아 있는 유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의 강물에 떠내려가는 버려진 이들의 무리. - P169

뭐든 꿀꺽 삼켜서 곧바로 동화시켜버리는 도쿄라는 도시에 들어와도 간사이 사람만은 신기하게 타고난 제 빛깔을 잃지 않는다. 간사이 사투리에도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 말끝이 이른바 ‘표준어‘로 바뀌어도 억양만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금세 간사이 출신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혼마는 그런 면에 일말의 동경을 품기도 했다. 자기는 도쿄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완전한 도쿄 사람이 아니고, 그렇다고 출신의 근거로 삼을 만큼 강렬한 ‘고향‘의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 P197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대도시로서의 기능뿐이다.
그것은 자동차와 매우 흡사하다. 제아무리 고급 사양에 성능이 뛰어나다 해도 사람이 그 안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자동차는 타고 다니며 편리하게 사용하고, 이따금 정비를 맡기고 세차를 해주고, 수명이다 되거나 질리면 새것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그것뿐이다.
도쿄도 그와 마찬가지다. 어쩌다보니 이 도쿄라는 차에 필적할 만한성능을 지닌 다른 차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있더라도 개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사용하게 된 것뿐이지, 본래는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부품 같은 것이다.
인간은 새것을 사서 대체할 수 있는 대상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새로 바꿀 수 있는 것을 고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도쿄에 있는 인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뿌리 없는 풀이며, 대부분은 부모, 혹은 그 부모의 부모가 가지고 있던 뿌리의 기억에 매달려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의 대부분은 이미 힘을 잃었고, 이들을 부르는 고향의 소리도 이미 쉬어버린 지 오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초 같은 인간이 늘어만 간다. 혼마는 자기도 그중 한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P199

그때 계기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내적 원인이 있을까.
그것은 분명 한 번에 오는 것일 리 없다. 상사에게 야단을 맞아 기분이 상했다거나, 실연당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마구 쇼핑을 한다거나하는 일상적인 것일 리도 없다. 그런 거라면 그나마 스스로 조절할 수있는 범위에 들어가니까.
그런 게 아니다. 그런 평범한 감정론으로는 결론지을 수 없는 것이 정상적으로 원만하게 달리는 기관차를 서서히 위험한 언덕길로, 썩은다리가 걸려 있는 벼랑 끝으로 유도하는 조그만 선로 전환기. 하나, 또하나가 소리도 없이 변환되면서 진로를 바꿔나간다.
채무를 끌어안은 본인도 자기를 움직인 그 전환기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어디에 있었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쩌다 이렇게 많은 빚을 지게 됐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세키네 쇼코는 미조구치 변호사에게 그렇게 말했다.
‘난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 P216

이렇듯 죽은 자는 살아 있는 자에게 흔적을 남긴다.
인간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벗어던진 웃옷에 체온이남듯이. 빗살 사이에 머리카락이 끼어 있듯이. 어딘가에 무언가가 남는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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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정신 질환자들의 위험성에 초점을 맞춰 왔다. 로널드 레이건을 저격한 존 힝클리, 유나바머, 국회의사당에서 경관 두 명을 쏜 러셀 웨스턴 주니어, 뉴욕 지하철에서 열차를 향해 여자 승객을 떠민 정신분열증 환자 앤드루 골드스테인, 우체국 총기 사건들, 특히 리틀턴, 애틀랜타, 켄터키, 미시시피, 오리건, 덴버, 앨버타 등지에서 있었던 끔찍한 교내 총기 난동 사건 등의 정신 질환과 관련된 폭력 사건들에 우리는 꽤 익숙해 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1998년에 발생한 1000건 이상의 살인 사건이 정신 질환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우울증은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에 비해 범죄를 유발하는 경우가 훨씬 적지만 동요성 우울증은 사람을 폭력적인 행동으로 이끈다. 위험한 정신 질환자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지다 보면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인 인식이 강화된다. 그러나 기금 마련에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남을 돕는 데 관심이없는 사람들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선뜻 돈을 내놓게 되며 ‘그런 사람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죽인다."는 주장은 정치적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최근 영국에서 발표된 한 연구에 의하면, 정신 질환자의 3퍼센트 정도만이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는 데 반해 정신 질환자에 관한 보도의 50퍼센트가량이 그들의 위험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한다. 캡터 하원의원의 말을 들어 보자. "매우 지성적인 국회의원들이 정신 질환자들을 그런 끔찍한 행동으로 몰아간 상황들에대해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 벙커 심리 [bunker mentality: 비판받지 않으려는 방어적인 태도] 조장에 주력하고 있어요. 정신보건 기금을 늘려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치안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처하려고들 하지요. 우리는 정신 질환자들을 돕는 비용보다 훨씬 많은 수십 억 달러씩을 그들로부터 우리를 방어하는 데 쓰고 있습니다." 정신 질환자들의 권익 보호에 힘쓰고 있는 고어 부통령의 부인 티퍼 고어가 백악관에서 정신보건에 대한 회의를 주재할때도 든든한 지원을 해 주었던 클린턴 대통령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우리로서는 사람들이 리틀턴의 비극, 애틀랜타 사건, 국회의사당 경관 피격 사건을 계기로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의 긴급성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분야의 중요한 법 개정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난 뒤에나 이루어지죠." - P614

그러자 도메니치 상원의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변화가 경제적, 인도주의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커다란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지 묻는 거라면, 유감스럽게도 내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방정부가 빈곤층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는 데 장애가 되는 요인은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첫째이자 가장 만만치 않은 문제는 국가의 예산 구조다. 도메니치 상원의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의 프로그램들과 그 비용은 빈틈없이 짜여 있지요. 문제는 당신이 설명하는 프로그램이 미국의 국고 절약에 기여할 것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새로운 비용을 요구할 것인지의 여부입니다." 다른 비용들을 즉시 줄일 수는 없다. 연내에 교도소 운영 예산이나 복지 예산에서 얼마를 떼어다 새로운 정신보건 서비스에 투입할 수는 없는 것이, 그런 서비스의 경제적 이익은 천천히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료 전달 체계에대한 평가는 결과 지향적이지 않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미국 공화당 지도부가 보건업계에 지시 내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령이 되지요. 이런 종류의 입법을 전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주들이나 보험회사들 혹은 그 누구에게도 명령을 내리는 것에는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맥캐런퍼거슨법(McCarran-FergusonAct)에 의해 보험 사업에 대한 규제와 감독권은 주 정부에 일임되었다. 세 번째 문제는 제한된 임기로 선출된 의원들에게 유권자의 삶에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정책이 아닌 사회기반 시설의 장기적인 개선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가 어렵다는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문제는 웰스턴 상원의원의 슬프고도 아이로니컬한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대의민주주의 아래 살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관심사에 민감하지요. 빈곤층 우울증 환자들은 선거 날 집에서 침대에 누워 있으니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대표를 선출할 수가 없어요. 빈곤층 우울증 환자들은 이른바 힘을 가진 집단이 못 되는 겁니다." - P618

정신질환자들의 비자발적 수용에 관한 법들은 그런 시설들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에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대규모의 수용 시설들이 문을 닫고 있고, 단기 수용 시설들은 아직 세상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등을 떠밀어 내보내는 형편이다. 1999년 봄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정신병원들이 환자들을 한시라도 빨리 내보내려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서도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시설에 수용되는 사람들이 있다. 가능하다면 환자들을 강제로 치료하는 것보다는 그들을 치료로 유도하는 편이 낫다. 또한 수용 여부를 결정할 기준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 최악의 학대는, 자격을 갖추지 못했거나 악의를 지닌 사람들이 누가 환자이고 아닌지를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정당한 절차 없이 시설에 수용할 때 일어난다. - P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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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라뇨?"
정할 자세를 취했다.
"왜 눈을 가리고 물건을 만져서 뭔지 알아맞히는 게임 있잖습니까?
물건을 상자나 천으로 덮어씌우기도 하고."
이사카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고는 끄덕였다. "아하, 알아요. 그런게 있죠. 삶은 문어나 우무나 작은 동물을 놓고 하는 거 말이죠?"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눈을 가리면 뭘 만지든 섬뜩하게 마련이죠.
그래서 다들 야단법석을 떨잖아요."
"히사에도 송년회 자리에서 그 게임을 한번 해본 적 있어요. 뭘 만졌는지 아세요? 주판이었답니다. 그런데 마치 외게인한테 공격이라도 당한양 소리를 질러대서•••••. 이사카가 머리를 흔들며 웃더니 눈가를 훔쳐냈다. 새삼 떠올리니 어지간히 우스운 모양이다.
"그런데 그게 왜요?"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면서도 눈가에 여전히 웃음이 남아 있었다.
혼마도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가 지금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도 눈을 가렸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 아직 상황을 잘 몰라서죠. 소란은 금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뚜껑을 열어보면 주판이 나올지도 모르죠. 다만, 지금 단계의 감촉이••••• 영 좋질 않아요." - P95

이곳으로 갓 이사 왔을 무렵, 갓난아기인 사토루를 안고 미즈모토공원을 산책하다가 길가에 떨어진 긴 끈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건너뛰어 넘어갔는데,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 끈이 꿈틀꿈틀 움직이며 길가에 쌓인 낙엽 더미 사이로 막사라지려는 참이었다. 야윈 뱀이었는지 거대한 지렁이였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현실에서는 그런 일도 있게 마련이다. 멍하니 지나치면서 왠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이 실은 엄청난 물건이었다는 사실을 초점이 맞는 순간에야 알아차리게 된다.
"너무 깊이 파고드는 건지도 모르지만......" 히사에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가요?"
"이 호적등본을 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구리사카가즈야 씨의 약혼자는 단순히 ‘세키네 쇼코‘라는 사람의 호적을 이용한 것만이아니라, 그걸 모조리 자기 걸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생각......"
"굳이 분가까지 했으니까요?"
혼마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가 사실에 어렴풋이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던 것이다.
"네, 그리고 부모란의 이 ‘사망‘이라는 글씨도 그래요. 이건 신고자의 희망이 없으면 굳이 붙이지 않거든요."
이사카가 "허어, 그래?"라며 놀랐다.
"우리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셔서 잘 알아요. 사망신고서를 내면 담당자가 물어요. 호적 부모란에 ‘사망‘ 표기를 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라고."
혼마는 슬쩍 이사카를 쳐다보았다. 섬뜩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호적등본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런데 굳이 표기했다는 건•••••• 뭔가 주장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이 호적에는 나 혼자라는 주장. 아니면 설령 서류상일지라도 남의 부모 이름을 같이 올리는 게 싫어서 적어도 두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밝혀두고 싶었거나••••• 좀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그런 생각 안들어?" 히사에가 쳐다보며 묻자 이사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마는 다시 한번 나란히 늘어선 ‘사망‘이라는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히사에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결코 지나친 생각이 아니다.
타인의 호적. 타인의 부모 타인의 신분.
돈으로 샀을까. 아니면•••••
"어떤 방법을 써서 가로챘을까.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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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이 아야세 역을 벗어났을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반쯤 얼어붙은 빗줄기였다. 어쩐지 아침부터 무릎이 욱신거린다 싶었다.
혼마 슌스케는 맨 앞 차량의 가운데 출입문 옆에서 오른손으로는 손잡이를 붙잡고, 왼손으로는 긴 우산을 짚고 서 있었다. 뾰족한 우산 끝을 바닥에 디디고 지팡이 삼아 서 있는 셈이다. 그런 자세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평일 오후 세시, 조반 선 전철 안은 한가했다. 마음만 있다면 앉을 자리도 많다. 교복 차림의 여고생 두 명과 큼지막한 핸드백을 끌어안고조는 중년 여자, 앞쪽 운전석 근처 문가에서 이어폰을 꽂고 음악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몸을 흔드는 젊은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세세한 표정까지 보일 정도로 승객은 몇 되지 않았다.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서있을 필요는 없었다. - P7

그러나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마음에 걸린 이상 확인해두는 게 좋다.
그런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본능처럼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혼마는 어젯밤 가즈야가 쇼코의 사진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을 두고 어수룩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마이 사무기기에서 그녀의 이력서를 복사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진이, 그녀의 얼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혼마는 쇼코의 이력서를 꺼내 변호사에게 내밀었다.
"이 사진 속 사람이 세키네 쇼코 씨 맞죠?"
미조구치 변호사가 이력서를 내려다보았다. 혼마가 열까지 헤아릴동안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시간의 길이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맞았음을 실감했다.
설마.
단기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아닙니다."
변호사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고, 그것이 순식간에 더러운 것으로 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력서를 혼마 쪽으로 밀쳐내며 말했다.
"이 여자는 내가 아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닙니다. 만난 적도 없어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 얘기를 했어요."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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