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Main

사람들이 예심판사 베르티에 씨 주변에 모여 있었다. 베르티에 씨는 생클루에서 일어난 이상한 사건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그 설명할 수 없는 범죄가 한 달 전부터 파리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무도 그 사건에 관해 이해하지 못했다.
베르티에 씨는 벽난로를 등지고 서서 자신이 모은 증거들을 근거로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여자 여러 명이 근엄한 말들이 흘러나오는 사법관의 입에 눈을 고정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들은 야릇한 두려움에 그녀들의 영혼 속을드나들면서 굶주림처럼 그녀들을 고문하는 탐욕스럽고 만족할 줄 모르는 공포심에 마비되어 전율하고 있었다. - P470

늙은이
Le Vieux

포근한 가을 햇볕이 도랑의 키 큰 너도밤나무 너머로 농장 뜰에 내리쬐었다. 암소들이 뜯어 먹은 풀밭 아래의 흙은 최근에 내린 빗물에 젖어있어서 발로 밟으면 푹푹 빠지며 절벅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과나무들은 흐릿한 초록색의 열매들을 짙은 초록색의 풀밭 위에 뿌려 놓았다.
암송아지 네 마리가 줄에 묶여 지나가며 이따금씩 집 쪽을 향해 음매 하고 울었다. 가금류들은 축사 앞 퇴비 위에서 활기 넘치는 몸짓을했다. 몸을 문지르고, 움직이고, 꼬꼬댁거렸다. 수탉 두 마리는 쉬지 않고 울어대며 지렁이를 찾고는, 힘차게 꽥꽥거리며 암탉들을 불렀다. - P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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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운옥 - 맞습니다. 모든 조선족이 범죄자일 수 없고 조직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그중 극히 일부일 텐데, 그럼에도 내국인이 그와 관련해 지나친 공포를 느끼게 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미디어가 그 부분을 지나치게 확대 재생산하거나 과잉 보도 경쟁을 벌이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예컨대 <범죄도시> 같은 영화에서 조선족이나 중국인에 대한 과도한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들을 재현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말씀대로 저도 조선족을 비롯한 이주 외국인 범죄 관련 정확한 통계를 대중에게 공개하고 효과적인 대책을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적해주신 것처럼 대중의 차별적인 공포를 해소하는 일에 있어서 ‘통계상의 디테일‘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좀 더 구체적으로, 통계를 발생 추이나 ‘몇건당 몇 건이다‘ 식의 단순 비율로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는 자칫 어떤 집단을 범죄자 집단으로 규정해버리는 ‘과잉 일반화의 오류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 나와 있는 외국인 범죄 증가 추이에 관한 통계상 보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매우 자세한 통계, 예를 들어직업 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된 통계가 대중에게 제공되어야한다는 거죠. 단순 범죄율 증가 추이 같은 것만 이야기하고 ‘외국인 수의 증가 폭보다 범죄 증가율이 더 높다‘ 식으로만 알리면 오히려 정확한 실상을 알기 어렵다고 봅니다. - P229

이렇게 생명이 무성생식으로 번식하고 대를 이어가는 방식의 생태계에서는 다양성 자체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당시에 다양성이 존재하기는 했습니다. 생명이 다음세대에 유전자 세트를 물려주는 과정에서 매우 낮은 빈도로 에러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일종의 다양성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다가 15억 년 전쯤 희한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어떤 특정 호스트가 기생자의 침입을 받게 된 겁니다. 기생자의 침입을 받은 호스트는 무척 고생하는데, 무성생식으로 번식하는 생명체라면 자기 유전자 세트, 그리고 기생자의 침입을받은 그 상태를 그대로 다음 세대에 물려주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심한 경우 앞세대 생명체에게서 유전자 세트를 물려받은 생명체는 그 탓에 죽고 맙니다. 그것으로 그 생명체의 번식과 유전자의 여정은 끝나는 거죠.
그런데 이때 만약 유전자가 이미 다양성을 획득한 상태라면 죽지 않고 생존하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런 맥락에서 호스트, 즉 숙주가 되는 생명체가 개발하고 진화한 것이 ‘성(性)‘이에요. 성에는 예컨대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성이 있잖아요? 두 성이 섞이는 과정에서 일종의 ‘유전자 칵테일‘이 생깁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가15억 년 전쯤부터 ‘알록달록‘해졌어요. 생명의 세계에 다양성이 크게 확장된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을 포함한 생명의 역사에서 다양성은 근원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 P251

장대익 - 진화학자의 관점에서 사회를 볼 때마다 특별히 느끼는 게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우리 사회 구성원 하나하나가 서로 너무 다르다는 거예요.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잖아요. 저는 바로 이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부인하려고 해요.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체계는 다양한 변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진화론을 창시한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우리에게 남겨준 놀라운 지적 유산은 ‘진화는 변이로부터 시작된다‘라는 명제인데요. ‘변이‘가 없이는 ‘선택‘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에는 언제나 변이의 요소가 충만합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다름을 불편하게 느끼는 본능‘도 내재해 있어요. 실제로 이와 관련해 심리 실험을 해보면 자기 자신과 여러면에서 유사하거나 자신과 교류를 많이 하고 소통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더 공감을 잘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컨대 우리가 이주외국인, 탈북자, 장애인 등 자신과 다르게 생겼거나, 다른 가치관을 가졌거나,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을 어려서부터 일상적으로 접촉하거나 만나지 못했다면 그 감정이 아예 길러지지 않거나 그러한 감정을 쉽게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그러므로 저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름 아닌 ‘공감 지수‘라고 생각해요. 즉, 다른 사람의 처지와 관점으로 사물과 상황을 볼 줄아는 능력. 그것이 다양성 지수와 맥을 같이한다고 봅니다.  - P257

반면 기성세대는 BLM 운동이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correct)‘ 것이니까, ‘머리로는 동의하지만 직접 참여하지는 않겠어. 왜냐하면 나는 그들(흑인)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으니까!‘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어려서부터 다른 인종, 다른 백그라운드, 다른 환경의 아이들과 뒤섞여(mingle) 지내왔기 때문에 BLM 운동에 실제로 동참하는 일이 전혀 어색하거나 이상한 게 아닌 거죠. 단지 자기 친구이자 동료일 수있는 한 사람이 억울한 피해를 보거나 심지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그런 분위기를 진심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거예요. - P259

장대익 - 앞서 교수님이 ‘블랙 라이브스 매터‘를 말씀하셨잖아요?
이 부분에 대해 제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2세대 · 0세대 등젊은 세대를 너무 긍정적으로만 보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말씀하신 대로 이 세대가 한편으로는 자신이 경험한 일에 깊이 공감하고 또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다른한편으로는 뭔가를 지나치게 혐오하는 경향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경향이 이 세대의 주요 소통 도구인 소셜 미디어의 영향 탓일수도 있고, 갈수록 극심해지는 양극화로 인한 부작용일 수도 있을텐데요.
아무튼 어떤 일에는 교수님이 말씀하신 BLM 경우처럼 깜짝 놀랄 만큼 깊이 공감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일에는 지나치게 무관심하거나 불필요한 혐오감과 적대감을 드러낸다는 거죠. 그래서 한편으로 잘파세대가 대륙과 국가, 지리적·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같은 세대 간에 형성되는 문화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다양성의 세계로 나가게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와 DNA를 지니고 있다는 교수님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매우 우려되는 점도 있거든요.  - P269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이들이 거의 태어날 때부터 SNS 등의 소통 도구에 익숙해 있고 몸에 체화돼 있다는 점이에요. 그런 점이 바로 다양성을 키워주는 요소라고 보는데, 그도 그럴 것이 SNS 공간에서는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전 세계 다양한 사람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SNS의 기반이 되는 플랫폼 특성상 자기가 좋아하고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과만 계속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터링 기술이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양극화 경향이 점점 더 심해질 수밖에 없고요. 말하자면, 갈수록 점점 더 ‘넓은공감‘이 아닌 ‘깊은 공감‘이 강화되어서 다양성을 오히려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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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정말 이런 일이 있으려야 있을 수도 없겠지만, 또다시 물에빠진다면 인어 왕자를 두 번 만나는 행운이란 없을 테니 열심히 두 팔을 휘저어 나갈 거예요.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 P22

 그나마 이 강물조차, 주위 나무나 풀들 보세요, ‘볼만하다‘는 뜻에서의 볼거리가 아니지요. 풍성하지만 제멋대로뻗어 정돈된 느낌 없이 시야에 쏟아져 들어올 뿐이니 경관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위압 내지는 맹목에 가깝기도 하지요. 아,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강을 싫어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가게가 강을 바로 앞에 두고 있어서 운이 좋은걸요. 정돈되지 않은 숲은 보잘것없지만 인공적이지 않아서 좋고요. 흘러가는 강은 어떤 사진이나 그림에도 담아 가둘 수 없고, 강줄기를 따라 우거진 수풀 또한 그렇지요. 그게 사람들이 강으로 오는 이유 같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정신 차려보니 곤은 별 볼일 없는 동네인 만큼 자신이 굳이 그녀를 데리고 돌아다닐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해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다.
그럼 강을 보고 싶어요. - P66

그리하여 곤은 강을 따라 걷는 동안 자기가 아는 걸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테트라포드 사이에 상반신이 끼인 채식어 있던 취객. 수중보(水中褓) 아래에서 휘몰아치는 순환류의 역회전. 강풍에 무너진 나무줄기가 만드는 스트레이너와그 속에서 발생하는 유속과 무관한 거대한 수압에 대하여.
나선형 물살이 강 언덕으로 밀어 올리는, 버려진 낚싯바늘을 비롯한 각종 위협적인 부유물들. 몇 년에 한 번 꼴로 한두구씩 절망의 무늬를 그리듯 수면에 떠오르곤 하는 사람들. 어느 하나 위험하지 않은 구석 없이 그 자체로 거대한 흡반과도 같이 악착스러운 동물성을 지닌 강물에 대하여. - P68

그 무렵 강하는 「장자』를 어린이용 다이제스트 판으로 엮은 학급문고 도서를 읽고 있었대요. 장자의 첫 장에는 이런얘기가 있거든요. 북쪽 바다에 사는 커다란 물고기, 그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강하는 당신의 아가미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으로서 이거야말로 이 아이한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대요. 하지만 그래놓고는 당신의 이름을 부른 적이거의 없었죠. 그건 그다음 장에 있던 한 줄이 일종의 예언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이 물고기는 남쪽 바다로 가기 위해 변신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고 한다. 그의 등은 태산과도 같이 넓고 날개는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과같으며 한번 박차고 날아오르면 구만리를 날아간다고요.
언제 어떤 일로 떠날지 모르는 아이였잖아요. 오랜 기간 이내촌에 머물긴 했지만 실제로 당신은 불의의 사고로 떠나왔고요. 강하는 그 이름을 일상적으로 부르는 것조차 두려웠던 거예요. 한 번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존재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한 음절이 혈관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마침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곤 왜 그래요? 고개 좀 들어봐요. 잠깐, 어디 가는 거예요? 또 그렇게 무턱대고 물에 들어가지 말고요. 저기 사람들 있잖아요 - P210

•••••• 내 물건 때문에 옷이 모두 젖어 미안하니까 잠깐 우리 텐트에 들러서 아빠 옷이라도 빌려드리겠다고 했지만,
그 아저씨는 원래 자기는 바다가 좋아서 물에 아주 들어가사는 사람이니까 괜찮다고 그러잖아. 그래서 왜 바다에 사느냐고 물어봤거든. 아주 중요한 사람을 찾고 있대. 그런데왜 밖에서 안 찾고 물에서 찾느냐고 물었더니, 사실은 중요한 사람의 시체를 찾고 있다는 거야. 그게 조금 무서워져서
그럼 안녕히 가세요, 고맙습니다, 하고 고개를 깊이 숙였어. 근데 머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그 아저씨가 몸을 돌리고 걸어가더라고.
나는 그때 분명히 봤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아저씨의 젖은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날렸거든. 그때 목과 귀사이에 깊이 패어 있는 상처가 보였어. 그 상처가 살짝 떨리면서 물이 조금 흘렀고 아저씨한테서 나는 바다 냄새가 바람에 실려 더 진해졌어. 키 차이도 나고 해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바람에 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는데, 좀 더 가까이서 올려다보고 싶어져서 다가갔지만 아저씨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바다로 들어가버렸어. 내가 눈 한번 깜박였을 때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는데, 아저씨 머리가 완전히 물속으로 사라지기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어.
엄마, 내가 인어를 봤다니까? 그 아저씨는 분명 바다 깊이 궁전에 사는 인어 왕자님일 거야. 그런데 마녀가 준 약을 먹고 두 다리가 생긴 거지. 인어왕자님은 누구를 위해 다리를 얻은 걸까? 그러면 역시 언젠가는 물거품이 되어서 아침 햇살에 부서져버릴까?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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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끈
La Ficelle

해리 알리스에게
장날이었으므로 고데르빌 주변의 모든 길에서 농부들과 그 아내들이 읍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남자들은 고된 노동, 왼쪽 어깨를 올라가게 하고 허리를 휘게 하는 쟁기질과 단단히 균형을 잡기 위해 무릎을 벌려야 하는 밀 베기 등 시골에서 하는 모든 힘든 일들로 인해 비틀리고 변형된 긴 다리를 움직이며, 몸을 앞으로 내밀고 조용히 걸어갔다. 그들은 파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풀 먹인 것은 니스를 바른 것처럼 번쩍이고, 손목 부분에는 하얀 실로 수놓은 조그만 문양이 있었으며, 뼈가 드러난 상반신 부분은 부풀어 올라 마치 날아갈 준비가 된 풍선처럼 보였다. 그 작업복에서 머리와 두 팔, 두 발이 나와 있었다. - P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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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맑은 정신으로 헛것을 볼 만큼 심신미약자도 아니고 오컬트 신봉자도 아니며 술에 취하지도 않았어요. 예, 물론 생맥, 마시긴 했어요, 오백 딱 한 잔. 과일 안주랑 소시지볶음이 나왔지만, 나는 이름이 좋아 팀장일 뿐 갑과 을의 관계를 성사시키거나 최소한 부드럽게 조율하기 위한 접대 자리란걸 망각하지 않기 위해 접시에는 젓가락 한 번 가져가지 않았어요. 그래도 우리 기획안이 채택될지 모르는, 아니 꼭 간택받아야만 하는 중요한 자리에서 상대방 기분 맞춰가며 오백으로 끝났으면 양호하지 않은가요. 알코올 분해 효소가 아주 없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그 정도로는 문제없어요. 끝까지 내 허벅지 한번 만져보겠다고 온갖 수작을 다 걸던 거래처 전무의 손을 어떻게든 기분 상하지 않게 떼어내려 애썼고, 아니 완전히 팩 소리 나게 떨쳐내지는 못하죠, 그랬다간 기획이고 뭐고 다 날아갈 판국인데. 귀싸대기야 맘속으로나 수십 번 왕복으로 날려줬지, 아무튼 그 작자를 콜택시에 태우고 90도로 허리를 꺾을 만큼의 분별력도 남아있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평소 고객이나 거래처를 접대할 때 삼천은 기본이고 양주 회오리도 불사하는내가 오늘은 딱 오백에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는 게 핵심이에요. - P7

남자가 등을 돌릴 때, 나는 틀림없이 보았어요. 뇌수까지얼어버릴 것 같았지만 그 순간 정신은 갓 세공된 거울만큼맑고 감각은 사포로 버린 송곳처럼 예리했어요. 그만큼 충격이었거든요. 어깨를 살짝 덮는 길이의 젖은 머리카락이목에 들러붙어서 그의 귀 뒤에 호모양의 홈이 팬 것이 보였어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호가 덜 닫힌 마가린 통 덮개처럼 살짝 벌어지며 물이 조금 흘러내렸지요.
착각이 아니냐고요. 계속 물속에 있던 사람인데, 그냥 목이 젖었던 건지 갈라진 틈에서 새어 나온 물인지를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것도 어둠 속에서. 저도 처음에는 보통의 상처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거라면 그만한 크기와 깊이에 당연히 피가 흐르고 더구나 물과 섞인 피가 아래로 번졌겠지요. 생긴 지 오래되어 피부에 완전히 자리 잡은 상처라면 그렇게 뚜껑을 열었다 닫듯이, 입술처럼 벌어지거나 움직이지 않는다고요. 아시겠어요? 거기에 달빛을 받은 그의 목은 사람의 살결이라기보다는 섬세한 그물무늬를 가진 비늘처럼 빛나 보였다는 사실도 보탤게요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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