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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4
원백대 / 보람 / 1995년 12월
평점 :
절판
女皇帝 則天武后
原百代
[ 제 4 권 ]
투혼의 화신
밀고자 출신의 사형수였던 내준신과 가난한 페르시아인 색원례에 이어 이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잔인한 혹리 주흥이 현직 관리 중에서 나왔다. 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안하무인이던 회의가 소양사에게 무례하게 굴다가 조신들에게 몰매를 맞는 일이 발생한다. 천금공주는 희망대로 태후의 양녀가 되어 성을 무씨로 바꾼다. 유위지가 태후를 배신하였다가 유배되었으나 몇 년 뒤 사면되어 다시 돌아 온 일도 있었다.
태후는 명당을 건립하기로 하고 회의를 감독으로 하여 건원전을 헐고 공사를 시작했다. 학상현이 모반의 죄를 덮어쓰고 사형 직전에 태후와 회의의 관계를 사람들 앞에서 까발렸다가 집안이 전부 풍비박산이 나버린다. 그렇지만 그가 한 이야기는 그 후 꼬리를 물고 물어 태후는 희대의 색정광으로, 회의는 초인간적인 거근 괴물로 둔갑하여 후세에 갖가지 음담패설이나 그 책의 소재가 되었다.
태후는 자신이 여제로 등극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공을 들여 왔다. 그녀는 등극의 마지막 마무리를 위하여 불교를 크게 융성시키고 이를 뿌리 깊은 민간 신앙인 도교의 신비성과 결합시키고자 자신을 성모신황(聖母神皇)으로 부르게 했다. 이씨 황족 사이에서는 명당이 준공되면 연회를 핑계로 이씨 종실들을 모아놓고 전부 죽일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황족들은 조만간 자신들에게 들이닥칠 위험을 알아차리고 은밀히 서로의 뜻을 전하고 있었는데 태후 역시 이런 정보를 사전에 포착하고 있었다.
박주 자사인 낭아왕 충이 5천여 병사를 거느리고 거병했다. 하지만 변변한 전투도 치르지 못하고 오합지졸들은 흩어졌고 결국 자기가 뽑은 농민군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황족들의 거병은 의견도 통합되지 않았고 행동 또한 통일되지 않아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뒤를 이어 아버지 월왕 정이 거병하였지만 정은 자결하고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들 이후 태후는 황족들에 대한 숙청의 칼날을 휘두른다. 이씨 황족 및 조신 가운데 태후에게 반심을 품은 자들은 모조리 소탕되었고 이일은 그 후에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마침내 명당이 완공되었고 이 화려한 명당을 만상신궁(萬象神宮)이라고 명명하였다. 태후는 완공 축하 향연을 열었고 대향연의 대의(大儀)를 집행하면서 처음으로 천자의 예장인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용했다. 이때 예종은 아들 성기와 함께 황태자의 성장을 하고 있었다.
다시 숙청 2파가 몰아닥쳐 이씨 종실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서경업의 난으로 영남의 수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그의 막내 동생 경진이 돌궐로 투항하기 위해 유배지를 벗어나 낙양을 거쳐 북상하다가 붙잡히고 그를 도왔던 사람들도 함께 단죄되었다. 이 같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에서 색원례, 내준신, 주흥의 활약이 눈부셨다. 이런 공포정치 하에서는 조신들조차 전전긍긍하였고 혹리들은 그들 밑에 밀고 전문의 건달 수백 명씩을 고용하고 있었다. 당시 사회는 밀고로 일약 위세 당당한 법관으로 출세한 혹리들을 보고 다른 법관들도 혹리 기질을 발휘하여 승진하려는 풍조가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
태후의 은밀한 명을 받고 설회의는 ‘역성혁명’의 최종적 무대 마련에 부심하다가 법명이란 승려와 의논하여 미륵 신앙을 생각해 낸다. 태후가 당조를 폐하고 새 왕조를 창립하려면 이씨를 수호하고 있는 도교와 귀족사회의 뿌리 깊은 유교사상을 물리쳐야 하기 때문에 불교를 그 수단으로 선택하였으며, 미륵보살이란 남천축의 파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존의 불위를 계승하는 보처의 보살이 되었지만 석존보다 먼저 입적했다. 그러나 56억 7천만 년 뒤에 또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하생(下生)하여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당나라 불교도들은 그 하생이 금방 실현되었으면 하고 강렬히 바라고 있었다. 법명은 대운경 4권을 편찬하고 그 속에 태후야말로 미륵보살의 하생이며 당나라를 대신하는 인간세계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쓰고는 이를 백성들 사이에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자 혹리 중의 한 사람인 부유예가 백성들을 선동하여 역성 혁명의 주청을 공식적으로 올리게 되고 이어서 문무백관을 비롯한 계층별 청원이 줄을 잇는다. 이렇게 되어 명목뿐인 황제 예종도 ‘무씨 성을 주십사’하는 청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후는 무씨의 원조가 주나라 무왕이라고 천하에 선언하고 주력(周歷)을 채용했다. 봉황이 날고 주작이 모여 들었다는 얘기들이 퍼졌고 예종은 양위를 제의했다. 3번의 사양 끝에 드디어 천수 원년(690) 무조의 나이 63세로 대주(大周) 제국 성신 황제가 되었다. 논공행상이 실시되었고 은혜로써 죽음을 그치게 하는 방침이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