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 호소하여 정의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전호리 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 P437

무슨 계획이 있는 거지, 그렇지? 원숭이 왕이 물었다.
실은 아무 계획도 없어. 그냥 시간을 버는 거야.
- P443

계약서의 법률 조항은 길고도 복잡했지만, 
핵심 문구는 단 여덟자에 지나지 않았다.
上賣莊稼, 下賣田地
계약 조건은 채무자가 담보물 환수권을 채권자에게 매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문구에 따르면 과부 이 씨는 사촌에게 ‘위의 작물과 아래의 토지를 판다‘라고 약속한 셈이었다.
"흥미롭군요. 아주 흥미롭습니다."
전호리는 계약서를 든 채로 머리를 연신 끄덕거렸다. 역 지현은자신을 낚으려는 수작인 줄 알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대관절 뭐가 그리 흥미롭다는 게냐?"
"아아, 진실을 티 없는 거울처럼 밝게 비추시는 영명하신 지현 나리, 이 계약서는 나리께서 직접 읽어 보셔야 합니다."
어리둥절해진 역 지현은 아역에게 계약서를 가져오게 했다. 잠시후, 지현의 눈은 튀어나올 듯이 동그래졌다. 계약서에, 검고 또렷한글씨로, 매각의 핵심 조건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上賣莊稼, 不實田地
"위의 작물은 팔되, 토지는 팔지 않는다." 지현이 중얼거렸다. - P444

"장담은 못 하겠소. 병 중에는 약이 없는 병도 있고, 모든 도망자가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목숨을 건지는 것도 아니니까. 
- P447

그들은 알았을까?
자신들이 실은 죽은 이들의 뼈 위를 밟고 다녔던 것을?
망자들이 외치는 단말마의 절규를 무시했던 것을? - P453

"나도 영웅은 아니야. 그저 내 힘이 필요할 때 해야 할 일을 했을뿐이지." - P455

원숭이 왕은 쿡쿡 웃었다. "어쩌면 그리 영리한 자는아니었을 거야. 그래서 살아남는 법을 몰랐던 거지."
- P456

하지만 왕수초는 자기가 목격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어. 
그 열흘동안 죽어간 사람들이 100년 후에도 기억될 수 있도록 말이야.그 책을 쓴 건 용감한 일이었어. 오늘날 그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만주족에게 쫓기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내가 보기에 왕수초는 영웅이었어." - P457

"전호리, 세상에 영웅 같은 건 없어. 사가법 상서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지만 겁쟁이이기도 했고, 유능한 인물이면서도 어리석은 자였어. 왕수초는 기회주의자였기 때문에 살아남았지만 한편으로는영혼이 고결한 인물이었고, 난 이기적이고 허풍이 심하지만, 가끔은 나 스스로도 내가 한 일 때문에 놀랄 때가 있어. 우린 누구나 평범한 인간이야. 뭐, 내 경우엔 평범한 요괴라고 해야겠지. 그렇게 평범한 우리가 특별한 선택에 직면할 때가 있어, 그 선택의 순간에, 영웅적인 대의는 우리에게 자신의 현신이 되라고 요구하기도 해."
- P458

"전호리, 양주의 백성들은 100년 전에 죽었어. 그건 무슨 수로도바꿀 수 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과거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계속 살아가게 마련이고, 그래서 권력을 쥔 자들은 언제나 과거를 지우고침묵시키려 해, 원혼들을 땅속에 묻어 버리려고, 이제 자네도 과거를 알아 버렸으니 더는 무지한 방관자가 아니야. 만약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자넨 황제와 그가 부리는 혈적자와 한패가 되는 거야. 그들이 저지르는 이 새로운 폭력, 과거를 지워 버리는 작업에서 말이야. 왕수초가 그랬듯이 이제는 자네가 목격자야, 왕수초가 그랬듯이 자네도 어떻게 할지 선택해야 해. 결정을 내려야 해. 언젠가 숨을 거두는 날 오늘의 선택을 후회할지, 안 할지를." - P458

나한테 이야기 하나만 해 줘. 전은 원숭이 왕에게 말했다. 딴 데정신이 팔려서 이놈들한테 굴복하지 않게 말이야.
- P463

난 영웅이 되기는 글렀지, 안 그래? 나한테도 진짜 용기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자넨 특별한 선택에 직면한 평범한 사람이었어. 그때 자네가 한선택을 후회 하나?
아니, 전호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고통 때문에 의식이 흐려지고 이성의 빛이 천천히 꺼져 가는 동안, 굳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코 후회하지 않아.
그 이상 뭘 더 바라겠나, 미후왕(美候王) 손오공은 그렇게 말하고나서 전호리 앞에 허리 숙여 절을 했다. 황제 앞에서 굽실거리는 절이 아니라 위대한 영웅에게 바치는 경배였다.
- P469

역사적 사실 자체가 오랜 세월 동안 은폐되었기 때문에 또한 어쩌면 지금도 어느 정도는은폐되고 있기 때문에, 양주 대학살의 희생자가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영영 밝혀지지않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그들의 기억에 바친다.
- P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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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10/19)

쓴 약에 당을 입히면 한결 먹기 쉽습니다. 그렇듯 낯선 경제에 익숙한 스토리를 입혀보면 어떨까요. 그런 고민에서 나온 책이 『영화 속 경제학(2016)』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문학으로 갑니다. 이 책은2015년부터 <중앙이코노미>에 게재된 원고를 원본으로 재정리했습니다.
- P8

경제학자들은 때로 문학작품에서 경제학적 영감을 얻습니다.
문학작품 주인공들의 행동 속에도 경제원리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대중에게 친숙한 문학작품은 경제논리를 설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문학이 품은 경제용어, 어떤 게 있을까요?
- P16

파랑새는 어느새 ‘행복의 상징‘이 되었다. 찌루찌루와 미찌루로 알려진 『파랑새의 주인공의 원이름은 ‘틸틸‘과 ‘미틸‘ 이다. 일본어판을번역해 국내에 들여오면서 잘못 알려졌다.
- P57

파랑새가 어디 있는지는 아주 작은 행복‘들이 안다.
한 행복이 틸틸에 묻는다. "나를 모르겠어?"
틸틸이 답한다. "모르겠는데… 너희를 본 적이 없어."
행복이 말한다. "우리는 늘 네 곁에 있어! 언제나 너와 함께 먹고,
마시고, 잠들고, 깨어나고, 숨쉬면서 지내왔단 말야."
알고 보니 이 행복은 ‘집에 있는 행복‘ 이다. 틸틸이 놀랜다.
"우리집에 행복이 이렇게 많다고?"
건강하게 지내는 행복, 부모를 사랑하는 행복, 맑은 공기의 행복,
파란 하늘의 행복, 햇빛이 비치는 시간의 행복, 해질녘의 행복, 별을바라보는 행복, 빗방울의 행복, 겨울 난로의 행복, 천진난만한 생각의행복… 집에는 정말이지 셀 수 없는 행복이 있다.
- P60

새 작품을 위해서는 이 같은 자신의 보장된 세계를 깨야 한다. 제 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갈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다 깎여나갈 수도 있다.
시장에서도 ‘제 살 깎기‘를 의미하는 경제용어가 있다. ‘카니발리제이션cannibalization‘이다. 카니발리제이션은 사람이 사람을 먹는 카니발리즘annibalism에서 비롯된 용어다. 카니발리즘의 어원은 카리브족Caris에서 나왔다고 한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 카리브해 섬에 사는 카리브족이 사람을 먹는 식인종ramibal 이라고 유럽에 알려졌다. 카니발리제이션은 시장에서는 ‘자기잠식‘ 또는 ‘자기시장 잠식‘ 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 P64

소녀는 당돌하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소년이 어이없어한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카니발리즘에 눈 뜬 거야?" 소녀가 답한다. "옛날 사람들은 아픈 곳이 있으면다른 동물의 그 부위를 먹는대. 그러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소녀가 또 말한다.
"내가 죽으면 내 췌장을 (네가) 먹게 해줄게. 누가 먹어주면 영혼이 그 사람 안에서계속 살 수 있대. 실제 식인종들은 인육을 배가 고플 때 먹었지만 병을 고치기 위해, 복수를 하기 위해, 혹은 죽은 자와 하나가 되기 위해 먹기도 했다.
소년은 독백으로 답한다. "나는 네가 되고 싶어. 나는 사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소녀도 죽기 전 편지에 속마음을 남긴다. "나는 하루키가 되고 싶어, 나도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흔치 않은 사랑 고백이다.
- P68

누군가에게 길들여지도록 자신을 내맡긴 사람은 눈물 흘릴 각오를 해야 해 - 어린왕자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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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슨 바보 같은 소리인가.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성명을 발표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더 나은 상황에서 소리 높여 말하다니 버스를 탄 애들 몇 명이 뭘 바꿀 수 있다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거나 마음을 고쳐먹는 사람이 있을지는잘 모르겠어. 하지만 상관없어. 나한테는 내 아들이 입을 다물지 않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비밀은 그 애 덕분에 조금이나마 지키기 힘들어졌으니까. 그건 의미 있는 일이야 - P417

나는 베티의 말을 되씹어 본다. 자기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입을 열고 의견을 밝히는 것은 미국인 특유의 집착이다. 미국인은남들이 묻어 두려 하는 것, 무시하고 잊어버리려 하는 것에 관심을집중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 P418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내다 보니 식구들의 삶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고, 내 감정을 설명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간의 경험 때문에 내가 얼마나 냉정해지고 무뎌졌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본 것 중에는 결코 입 밖에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거북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 몸을 둘러싼 껍데기 때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거북이가 된 느낌이.
- P423

나는 정을 조금 작은 것으로 바꿔 들고 조각을 시작한다. 도안은단순하다. 서로 이어진 타원 세 개. 사슬이다. 그 사슬은 대륙 두 개와 대도시 세 곳을 하나로 묶는 고리이자, 목소리를 영원히 묵살당한 채 이름마저 잊히고 만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던 족쇄이다. 그 사슬 속에는 아름다움과 경이가, 공포와 죽음이 있다.
한 번 또 한 번 망치를 두드릴 때마다. 허물어지는 기분이 든다.
나를 둘러싼 껍데기가. 마비 상태가. 침묵이.
비밀을 지키기가 조금이나마 힘들어지게 하는 것. 그건 의미 있는 일이야.
- P429

하지만 베티가 내 머릿속에 심어 놓은 이미지는 좀처럼 사라지지않는다. 조용한 어둠 속에 서 있는 소년, 그 소년이 말을 한다. 소년의 말은 비눗방울처럼 둥둥 떠오른다. 그 말이 터지면서 세상은 조금 더 환해지고, 숨 막히던 침묵도 조금 느슨해진다.
- P418

그 여자한테 딱히 미안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는 너무 피곤했으니까.
- P419

나는 예비 인원으로 뒤쪽에 대기시켜 둔 포로들에게 보조 터널입구에, 즉 앞서 들여보낸 인원들의 등 뒤에 다이너마이트를 매설하라고 지시했다. 속으로는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차피 골수 공산당 테러분자들이라고, 십중팔구 이미 사형 판결을 받은 자들일 거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포로들은 머뭇거렸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기 때문이었고,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몇몇 포로는 미적미적 움직였다. 다른 포로들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 P426

"제발, 제발 꺼내 주세요. 전 그냥 돈 몇 푼 훔쳤을 뿐이에요. 죽을죄를 진 게 아니에요.."
남자는 내게 민난어로 얘기했다. 내 모어로, 나는 충격에 빠졌다.
이 사람은 포모사에서 끌려온 잡범이었단 말인가? 만주에서 생포된 중국인 공비가 아니라?
- P427

나는 무너진 터널 이쪽에 있는 죄수들에게 명령했다. 우리는 틈새를 다 막고 나서 뒤로 물러나 다이너마이트를 더 설치한 다음, 한번 더 폭파하여 돌더미로 확실히 밀봉했다.
작업이 다 끝났을 때, 분대장은 부하들에게 남아 있는 죄수를 모조리 사살하라고 지시했고, 우리는 또다시 폭발을 일으켜 돌무더기속에 그들의 시체를 은폐했다.
포로들의 집단 봉기 발생. 공사 방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모두 자살함..
분대장의 사고 경위 보고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고, 나도 보고서에 서명을 했다. 그런 보고서를 그런 식으로 쓴다는 것은 누구나아는 사실이었다.
- P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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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집단에게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고투를 벌여야 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외롭고 두려울 것이다
그러나 독립적인 삶을 위해 지불하는 값은
아무리 높아도 비싼 것이 아니다
-니체

현실은 회피할 수 있지만
현실 회피의 결과는 회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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