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읽는 감정 수업 - 관계 속에서 상처받은 내 마음 회복하는 법
송귀예 지음 / 빌리버튼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10년간 그림책 테라피스트로 활동해온 저자는 ‘그림책’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찾는 법을 알려준다. 저자는 삶을 조금 더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다양한 감정의 파편들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도서관이 휴관중이라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림책을 찾아보지 못한 게 아쉽다. (그림책 전체 줄거리는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림책을 통해 내면 속 치유되지 않았던 감정을 만지기도 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게도 한다

처음엔 내용이 가볍다고 생각했는데 읽을수록 좋았다
어른인척 했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았던 마음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어른이 읽고 나누는 그림책에는 삶이 녹아져있어서 더 깊은 통찰력으로 나눔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들레는 민들레입니다.
길모퉁이에 있어도 민들레,
꽃이 져도 민들레입니다.

물음표,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기도

물음이 찾아오는 순간이 나를 만나줄 때입니다. 진정한 나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몰입할 것인지에 따라 나의 나머지 인생은 달라집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 것인지,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것인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마음의 문제는 대부분 가정 안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무의식속에 남아 있어 인생에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잘 지내다가도 상처가 건드려지는 일이 발생하면 이성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왜인지를 모르고 정신없이 살아가다 물음을 만나고 변하고 싶어집니다.

"당신은 귀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참모습을 회복하세요. 당신은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축복합니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들꽃과 나무, 바람, 햇살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지구가 이렇게 아름다웠었던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열정이 샘솟아 무엇에든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고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알게 됩니다. 어떤 순간에도 어떤 상황에서도 무슨 일을 겪어도 나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요.

길에 피어도 민들레, 지붕에 피어도 민들레. 담벼락에 피어도 민들레이듯이 당신은 어디에 있어도 무엇을 해도 변함이 없습니다. 민들레가 민들레이듯이 당신은 당신입니다. 당신의 참 존재를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어린 시절에 누구를 만나고 어떤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삶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재능뿐만이 아니라 나의 재능에도 한계를 짓고 금방 멈춰버리는 순간이 많습니다. 아니,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작조차 하지 않습니다. 남을 의식하고 더 잘하고 싶지만 그렇게 못할 것 같아 창피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존재이고 싶습니다. 특출나고 싶고 자신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멋진 모습이고 싶습니다.

아이가 무슨 일을 한 데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 아이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눈에 비친 아이의 모습은 미숙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려고 하는 열정과 호기심은 가득하지만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부모의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 어떤 부모는 자신이 다 해줘버립니다. 아이가 어지르지 못하게 말끔하게 다 정리해놓고 아이가 손도 못 대게 합니다. 그리고 늘 "안 돼. 하지 마."라고 하며 행동에 제약을 가합니다.

내가 먼저 충족되면 타인이 보입니다. 나의 재능과 끼를 맘껏 발산할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도전하십시오

선생님이 베티를 지지하고 격려하듯이 내가 나를 지지하고 격려해주면 됩니다. "잘했어. 멋져. 정말 작품이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었어." 하며 나 자신에게 칭찬을 듬뿍 해주면 됩니다.

하고 또 하고 또 하다보면 능숙해집니다. 처음에는 미숙할지라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두각을 나타내는 순간이 반드시 다가옵니다

독수리는 자꾸 닭장으로 가서 닭들처럼 행동합니다. 날고 싶지 않습니다. 그동안 편안하게 살았는데 모험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의 안정된 생활이 좋습니다. 자신은 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닭이지 독수리가 아니에요. 잘못 보신 거예요.’ 하고 말하고 싶습니다.

천리마는 한 섬의 곡식을 먹어야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주인은 천리마인지 모르고 다른 말들과 똑같은 양의 먹이를 줍니다. 천리마는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힘이 없어 늘 누워 있고 털은 윤기를 잃었습니다.

스스로를 무한한 능력의소유자라고 믿을 것

자신이 닭인 줄 알고 살았던 독수리처럼, 자신을 보통 말로 착각하며 살았던 천리마처럼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나 자신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사실은 다 아는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할지 모릅니다. 자신의 가치를 모르고 닭 모이를 먹고 닭들처럼 살아가는 독수리처럼 닭장에 갇혀 지낼것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시도해보았나요?

자신의 삶을 사랑하세요.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세요.
당신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는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행태가 부쩍 늘어가는 일본에 대해 품게 되는 의문에 가장 근본적이고 균형 잡힌 관점을 제시한다. 현장 취재와 다양한 현지 언론 보도, 각종 통계 자료 등을 토대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일본 사회의 본질과 비밀스런 심층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책은 단지 나쁜 나라가 아닌 깊이 병든 일본의 환부를 통해 한일 관계는 물론, 집단주의의 폐해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20.12.16---
나는 일본을 나쁜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쁜 나라‘가 아닌 ‘아픈 나라‘라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게 될 지, 반대하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관점으로 ‘일본‘을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무라하치부는 마을 전체가 특정 구성원이나 가족을 따돌리는 방식으로 징벌하는 행위를 말한다. 잘못을 저지른 이를 제재하기 위한 마을 공동체의 ‘공동 절교’ 행위라고 보통 정의하는데, 한 가족 전체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우메보시와 일본도(梅干と日本刀)》(2000)에서 이 같은 주장을 펴기도 했다. 죽음으로 인해 누군가와 이별하거나 불이 나는 비극이 일어났을 때만큼은 모든 마을 사람이 슬픔을 공유했다는 해석이다

절연을 하더라도 슬픈 일만은 나누자는 것이 무라하치부다. 이것은 일본의 의리, 인정의 마음과도 깊은 관계가 있겠지만 이렇게 마음씨 착한 징벌 풍습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우메보시와 일본도》 중에서)

일본 국민이 ‘집단의식’이 강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집단에서 떨어져 나가선 안 된다. 집단에서의 이탈은 곧 사회적 존립 근거를 잃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선택이라는 잠재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지메의 경우 가해자에게 ‘모델’이 있다는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했다거나 다른 곳에서 이지메의 대상이 된 아이가 거꾸로 ‘가해자’가 된다는 것으로, 가해자가 ‘피해자’의 면모를 함께 가질 수 있다는 관점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일본 사회의 여러 가학적 성향 속에서 아이들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희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이지메는 1980년대에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인식됐고, 해외에도 ‘이지메(苛め)’라는 일본어 단어가 ‘학교에서의 집단적 괴롭힘’이라는 뜻으로 그대로 전해졌지만, 사실 일본은 역사적으로 ‘무라하치부’라는 어두운 전통을 가지고 있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이미 일본 사회에 깃들어 있던 성향이 학교라는 특정 공간에서 또 다른 형태로 발현되기 시작한 현상이 ‘이지메’라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어긋난 관계들을 제대로 회복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이 순간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원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매 순간을 감사히 여기고, 헛되이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라는 이름으로 미루고 있는 일들이 있다면, 지금 바로 시작하십시오. ‘언젠가’는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미루고 있는 일들 중에서 특별히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더더욱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세요.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상처로 남지 않을 죽음을 위해서 마음껏 사랑하고, 삶에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감사함으로 죽음이 아닌 이별을 준비하길 바랍니다.

죽음이라는 것도 충분히 따뜻하고 빛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슬프지만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죽음,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은 죽음이 그렇습니다.

나이 오십을 넘기다 보니, 친구 부모님의 부음을 심심찮게 접합니다. 더러는 또래 친구의 안타까운 부음도 전해 듣습니다. 그때마다 죽음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바쁜 일과 중에는 슬픔도 사치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껏 슬퍼해야 마음껏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눈물로 비워낸 정화된 가슴이라야 사랑이라는 싹이 단단히 뿌리를 내립니다.

<호스피스>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이 편안하고도 인간답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위안과 안락을 베푸는 봉사 활동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호스피스 완화병동의 아침이 오늘도 어김없이 밝았습니다. 누군가는 또 하루의 생을 얻었고, 누군가는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터입니다.

내 주위 사람들은 "이제 7년 정도 일했으니 죽음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겠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병동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하나도 같은 게 없습니다. 각각의 죽음은 제 나름의 이야기가 있고, 제 나름의 향기와 빛깔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의 죽음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이로써 죽음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 되는 것이지요. 끝까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죽음이 머지않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힘든 시간입니다.

다행히 그들 곁에 호스피스라는 좋은 친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호스피스의 존재조차 아예 모르기도 하고, 알아도 모른 척합니다. 끝내 죽음을 부정하며 고생을 자처하기도 합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만남이 수많은 우연과 필연을 거듭하면서 전생의 어느 지점과 맞닿은 연유로 해서 이어진다고 합니다.

사랑이 깊은 만큼 슬픔도 깊어져서 무력감과 공허함에 ‘나도 따라 죽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함께하며 기억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슬픔과 고통을 공감하며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사별가족 관리를 하면서 더욱 애틋하게 깨달았습니다

떠난 가족들은 하늘의 별이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어, 우리가 닿는 시선 어디든 머물러 있습니다. 땅의 꽃이 되고, 물이 되고, 공기가 되어, 우리가 내쉬는 숨결 하나에도 존재하고 있을 영혼들에게 영원한 안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삶의 곁에 죽음이 있고, 죽음의 곁에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아 있는 삶을 어떻게 가치 있게 보내도록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죠. 죽음은 인간이 태어나서 필연적으로 겪는 인생의 과정입니다. 죽음은 연습할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앞날이고,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음이 다가올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의 죽음을 통해 나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덜어 쓰는 삶의 유한성을 아는 만큼,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는 겸허하고 편안해야 할 것입니다

‘웰빙well-being을 통한 웰다잉well-dying’도 중요하지만 ‘웰다잉을 위한 웰빙’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떠나는 사람이 있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남아 있는 가족들이 살아내야 할 삶도 있습니다.

부모가 없는 삶, 배우자가 없는 삶, 자식이 없는 삶, 형제자매가 사라진 삶. 그 삶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상실의 삶이 잘 치유되려면 떠나보내는 죽음 자체가 고통스럽지 않아야 합니다. 가족 간의 화해와 용서가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불의의 사고나 예기치 못한 급작스런 죽음에 비해,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죽음은 다행히 예견된다는 점에서 준비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나마 상처가 덜하지 않을까 싶지만, 죽음이라는 과정은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설명을 들어도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준비할 수 있는 행위는 아닙니다.

임종 징후가 보여주는 각종 지표나 수치를 통해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이성적으로는 느끼면서도, 심정적으로는 ‘설마 설마’ 하는 것이 가족의 마음입니다. 심전도 기계가 ‘0’이라는 숫자를 가리켜도 말이지요.

"난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해도 실제로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죽음의 언저리에 있으면서도 죽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만큼 아직은 살고 싶기 때문이겠지요.

떠나는 사람과 떠나보내는 사람 모두에게 ‘슬픔’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다만 각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슬픔의 색깔과 깊이는 서로 다릅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떠나는 사람에게도, 떠나보내는 사람 그 누구에게도 상처로 남지 않을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소리 내어 우는 것조차 비통함을 인정하는 것 같은 생각에 울지 못했다고 합니다.

‘냉정해지자. 지금까지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면, 이제는 잘 갈 수 있도록 보내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졌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삶의 나이>라는 시가 떠오르는 밤이었습니다. ‘일 년 뒤 오늘, 삶의 나이를 한 살 더해서 전해줘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예쁜 편지지에 시를 곱게 옮겨보았습니다. 이제 추억이 될 그와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을 기억하며.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맞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내 삶의 일부입니다. 수많은 죽음을 보는 것 역시 내 삶의 일부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죽음을 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는 많은 죽음과 함께하면 할수록 더욱 깊어집니다.

유일하게 면역이 생기지 않는 것이 사별의 슬픔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위로가 어제보다 더 어렵고, 오늘의 눈물이 어제보다 더 뜨거운 것을, 매일 하루씩의 삶을 더해가며 더 크게 느끼고 있으니까요.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의 시간이 있었기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그는 더없이 편안해 보였습니다

죽음이 나의 일이 아니었던, 그래서 그때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사별의 애통함과 슬픔은 경험해보지 못한 힘든 감정이라는 뜻이겠지요.

나는 27세에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보내드리고, 30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말기암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사고로 한순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일이 얼마나 잔인하고 충격적인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사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기억합니다. 또한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의 충격, 투병 과정의 고통과 위기 상황들, 암세포와의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말기 판정, 시한부 삶…. 그리고 안녕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시절이었지요. 아니,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가 오히려 상처가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지요. 그래서 지금 환자 가족들의 "선생님은 모를 거예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과 준비된 죽음을 경험하며, 삶 속에 사별의 슬픔을 녹여내어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듬고 간호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프고 힘들어도 살아지더라"는 사별가족들. 아마도 사랑의 기억이 가슴 깊이 남아 있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에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별 상실을 인지하고 애도하는 시간이 충분하더라도 ‘직면’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직면은 사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기에 피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별 상실의 과정 중 한 부분일 뿐이고, 직면을 해야만 ‘건강한 애도과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절차나 확인 없이도 조용한 직면도 있고, 긴 시간 동안 미루어진 직면도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충분한 위로는 원망과 억울함의 감정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자신만이 가장 힘든 일을 겪은 것처럼 갇혀 있던 시선에서 벗어나 주변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오느라 정말 아팠겠다. 그렇지만 이제 괜찮아. 너는 이전의 네가 아니야. 넌 힘도 있고 뭐든 잘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야. 잘할 수 있어. 괜찮아."

"사랑해. 고마워. 그동안 잘해왔어. 괜찮아. 잘하고 있어. 다 좋아질 거야. 넌 소중한 사람이야. 있는 그대로 너는 사랑스럽고 멋져. 널 사랑해."

인정과 사랑을 외부에서 갈구하는 마음은 무언가를 이루고도 허탈하게 합니다. 성취를 한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뇌가 그 상황에 금방 적응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 익숙해지면 뇌는 더이상 행복 호르몬인 도파민을 분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더욱 새롭고 자극적인 쾌감을 얻는 상황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런 상황을 맛보기 위해 시도하는 것 중 부정적인 현상이 중독입니다. 중독된 상황에서도 도파민이 분출되어 가짜 행복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외부에서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여 끊임없이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삶은 공허합니다. 진정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자기다운 삶이자 내 영혼이 기뻐하는 일입니다

부모님의 사랑 방식이 일관적이지 못하고 들쑥날쑥한 경우에도 아이는 불안을 느낍니다. 자신이 진정 사랑받을 가치가 있나 의심합니다. 그런 아이들은 충족받지 못한 사랑을 외부에서 충족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타인들의 사랑을 갈구하고 계속해서 확인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피곤할 정도로 말입니다.

일을 미루고 게으름을 피우는 경우는 대부분 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대충 해서 잘 못 했다고 평가를 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인정보다는 지적을 많이 받고 자란 경우가 많습니다. 무언가를 완벽하게 처리해서 비난을 면하려고 하기 때문에 시작이 두렵습니다. 완벽하게 해야 하는 시간이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는 시작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무의식에서 말합니다. 그 두려움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게 합니다.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사랑해주고 인정해주고 알아주고 보듬어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향한 엄마의 선물을, 매일 양분을 주듯이 주어야 합니다. 오늘도 여기까지 잘 살아온 당신을 안아줍니다.


"괜찮아! 사랑해! 고마워!"

간절하게 염원하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이가 손을 내밀어줄 때까지 수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당신의 모습과 닮아 있지는 않은가요?

누군가 선택해주기를 바라면서 다른 이가 먼저 기회를 잡으면 좌절하고 무기력해지는 삶을 반복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자아실현을 하며 살아가는 삶이 행복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실현하지 못하고 소수의 사람만이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누구는 선택하는 삶을 살고, 누구는 선택되는 삶을 삽니다.

나의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이루어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의 행복이 우선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게 되면 행복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 일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나의 일에서 확신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나의 분야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분야의 책을 읽고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선택을 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가 만들어놓은 안정된 틀 안에 갇힌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개척하고 개발하는 창의적인 사람이 되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해야 할 일들을 지혜롭게 정리하고 우선순위를 실행하며 성찰하고 변화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내가 선택하고 통제하는 삶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꿈이 가슴속에 살아 있는 사람은 생기가 넘칩니다. 눈빛은 반짝이고 걸음은 활기찹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를 소중하게 가꾸어나갑니다.

어떤 고난의 순간이 와도 현재를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결국 그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비전, 간절히 바라던 자유를 성취했습니다.

"내 삶은 어떻게 끝나게 될까?"


그것은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물음이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밑져야 본전입니다. 달리지 않으면 잡힙니다. 해봅니다, 죽을힘을 다해서. 앞에는 절벽이 있습니다. 이 절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뒤로 가면 잡힙니다. 어차피 잡혀서 돌아가면 다시 노예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바에는 목숨을 걸고 절벽을 뛰어넘습니다.

소년이 말한 자유가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파블로에게 뛸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줍니다. 눈을 질끈 감고 현실의 고통을 옆에 두고 뛰어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뛰기 전에는 무척 두려웠습니다.

‘카우보이들에게 붙잡히면 어떡하지? 저 절벽을 내가 과연 뛰어넘을 수 있을까? 저 절벽을 넘으면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소년이 말한 정말 그런 천국 같은 세계가 있을까?

원하는 삶을 위해 무엇을 해보았는가

"내 삶은 어떻게 끝나게 될까?"라는 파블로의 물음 속에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의 삶이 초라하게 끝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나도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어.’라는 마음이 담겨 있던 건 아니었을까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 어떻게 사는 것이 나의 나머지 인생을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사는 방법일까?’
‘나 자신의 행복과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내가 이 땅에 와서 뭔가를 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파블로처럼 자유로운 삶을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목숨을 걸 정도로 원하는 그것에 정열을 쏟아본 적이 있나요? 만약 인생에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면 당신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나와 멀어 보이기만 했던 나만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의 모습이 멋있고 좋아 보여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누구나 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한 분야에서 빛을 발하며 살고 있는 이들은 누구에게나 눈부신 존재로 보이니까요.

자신의 옷을 딱 맞게 입고 있으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맞는 편안한 옷을 입고 있나요?

할 수 없이 현실에 안주하며 또 다른 도전을 하는 이들을 부러워하며 동경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한번 태어난 인생 나만의 빛을 발하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신만의 색깔을 찾기 위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지만 그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목적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니까요. 그 과정이 편하지만은 않더라도 그리 절망적이지도 않습니다. 가끔 실패하고 좌절하더라도 괜찮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더 단단하게 다져진 나로 성장하게 되니까요.

한 가지 일을 3년 정도 최선을 다해서 해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기간에는 실력 향상이 어렵기도 하고 그 분야가 자신의 적성에 정말 맞는지를 알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분야에 심혈을 기울여 그 일을 어느 정도 잘하게 되면 재미를 느낀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재미있는 일은 그다지 없습니다. 처음 시작한 분야는 자신이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익히느라 바쁘고 실수도 잦아 즐겁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분야가 내 적성에 맞는지는 금방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몰입해서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하고 경험을 꾸준히 하고 좀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조금씩 일이 익숙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일이 쉬워지는 단계까지 가게 됩니다. 그 일이 쉬워지면 드디어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 것입니다. 전문가로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단계까지 가면 뿌듯함이 올라옵니다.

10년이 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재능이 없었어도 꾸준하게 노력하고 실력을 기르기 위해 훈련하고 경험한 사람은 멈추고 중단했던 재능 있는 사람보다 훨씬 실력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최상의 모습을 위해서는 멈추지 않고 가야 합니다. 생기가 넘치고 의욕이 날 때 뿐만 아니라 울적하고 움직이고 싶지 않을 때도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닌 내가 마음을 통제하고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매일매일 나아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성공한 이들은 이것을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당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펼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특별한 사람은 없습니다. 특별한 노력이 있었을 뿐입니다.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가는 길은 꾸준한 노력과 현명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조금씩 나아지기 위해서, 자신의 의식 성장을 위해서 오늘도 가는 것입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그것을 꼭 해내는 것, 그것이 오늘보다 나은 내일로 가는 길입니다.

삶은 재미와 놀이라고, 인도의 영성가 오쇼가 말했습니다. 철학은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던 저는 ‘삶은 심각한 것이 아니라 재미와 놀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살다보면 가끔 마음이 울적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한쪽에 두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봅니다.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가 햇볕을 쬐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초목의 자연을 만납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걷다보면 땀이 나고 걸음이 가벼워집니다. 한참을 걷고 나면 울적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바람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전에 자신의 삶에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삶의 기쁨을 자신이 정말 싫어한다고 생각해왔던 것에서 느낍니다. 삶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어제 내가 아니라고 했던 것을 좋아할 수도 있고, 어제 내가 좋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맞는다고 생각했던 일이 오늘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를 함께 누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일을 놀이처럼 하는 것입니다. 일이 놀이가 되려면 나의 일이 천직이어야 하겠지요. 자신의 일이 천직인지는 그 일을 많이 해보고 공부하고 경험해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천직을 찾아 그 일을 할 때 신이 나는 삶은 축복입니다. 커다란 은총이고 은혜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 내가 신나는 멋진 일을 찾아 실현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