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W.G. 제발트, 『이민자들』
/ 독서 기록

<아직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매우 경솔하게도, 처음 책 제목을 보았을 때 나는 그들만의 ‘특별한’ - 소설이라면 흔히 기대하게 되는 - 이민 이야기를, 나와는 철저히 분리된 채, 그저 청자로서 듣게 될 거라 단정했다.

하지만 소설 속 이들은 공간의 이탈을 넘어 정체성과 존재 기반을 잃어버린, “일종의 상실”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본질적인 결핍을 품은 존재들. 그리고 화자는 조용히 무너져가는 이들의 행로를 그저 묵묵히 짚어간다. 자신의 발자취를 어디에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한 침묵의 리듬 속에서, 이 소설은 여느 보통의 인생들처럼 무던히 흘러간다.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나와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이 큰 아픔을 겪은 뒤, 내 앞에 있을 때, 그가 겪은 상실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막연하게 가늠 잡히는 순간이. 이 소설도 그렇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분명 상실에 잠겨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시대의 음영, 눅눅히 깔린 공기, 인물들의 일화엔 무거운 분위기가 배어 있지만, 이들의 삶은 특별히 불행하지도, 특별히 행복하지도 않다. 다만 고향을 떠난 뒤, 그 어디에도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 아슬하게 쌓아 올린 탑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필연적으로 균열을 일으켰다. 처음엔 그 위태로움이 삶의 일부인 양 받아들여지다가도, 그곳은 너무나 취약해서 가끔의 사소한 흔들림에도 집요하게 파고들어 간다. 그리하여 상실은 또 다른 상실을 낳고, 그 연쇄의 시작은 어디였는지, 언제부터, 어떤 선택에서 비롯된 것인지 짚어볼 새도 없이 삶을 잠식해 간다.

책 속에서 듬성하게 번쩍이는 과거의 기억들은 현실의 시간과 교차하며 고통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고, 때로는 결말을 암시하기도 한다. 어떠한 연유로 인지, 혹은 자신조차 모르게 잊혀버린 기억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끝에 다가설수록 돌연 수면 위로 떠오른다. 때때로 소름 끼칠 만큼 생생하게. 그리고 그 기억은, 마치 늘 거기 있었던 것처럼,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일상의 틈 사이로 평범하게 스며든다.

불완전한 고립감은 그렇게 아무런 경고 없이 삶의 결을 조금씩 침식해 가고 어느 순간부터는, 꺼내볼 수조차 없이 묵혀진 상실의 찌꺼기들에 켜켜이 덮인 채, 종국에 무거운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다.

어떠한 형태로든, 누구에게나 ‘상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골이 깊어질수록, 사실과는 무관하게, 흐릿하고 알 수 없는 형태의 잔흔만이 남는다. 본래의 모습을 기억할 수도, 완전히 잊어버릴 수도 없게끔.

뿌리 깊이 자리 잡은 상실의 요새에는, 돌연 수차례 형태가 바뀌는 일종의 변덕이 깃들어 나를 분노하게도, 체념하게도, 회피하게도, 단절하게도 만든다. 그리고 종종 이 심연에서 저 심연으로 무작정 나를 데려가기도 한다. 비워져 버린 마음의 한 자리에, 그렇게 줄곧 불청객은 불쑥불쑥 찾아오기 마련이다.

삶은 여기부터 여기까지 시작과 끝을 정할 수 없을뿐더러, 원하는 삶의 부분만을 취하며 살아갈 수 없다. 이미 예속되어 버린 상실을 없었던 채 살아갈 수도 없다. 우리는 언제나 연속적으로 존재한다. 상실의 파문이 내 삶에 어떤 결말을 불러올지, 내 인생에 어떤 형태로 발현될지조차 알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의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는 것뿐.

아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나비채를 든 행운의 사신을 알아볼 작은 여유가 남아있다면, 케이지 속 나비들을 저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는 작은 용기가 있다면, 그 끝이 침묵 속에만 갇히지는 않을 것이라 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