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아고라 - 조선을 뜨겁게 달군 격론의 순간들!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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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선을 뜨겁게 달군 5가지 논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태조에서 태종까지 한성 천도 논쟁, 세종의 공법 실시 논쟁, 현종때의 1차 예송 논쟁,

2차 예송 논쟁, 마지막으로 정조때의 문체반정 논쟁으로 결말을 맺는다.

 

군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볼때 수직관계 였겠지만, 왕이 모든일을 자신의 독단으로 처리하는 것은 아니였다. 나중에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뜻대로 밀고 나가는 일도 많았지만, 신하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었다.

어쨋든 다수결이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거면서 신하들의 의견은 왜 물어보는거지?? 그런 생각도 들곤 하였다.  좋은 의견을 받아들이고 신하들의 뜻을 존중하기 위함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명분이 필요해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나혼자 결정한 일 아니다 라는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기 위함에도 이유가 어느정도는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 재미있었던것은 서로의 의견대립도 있었지만, 이 글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재미있었다. 군신과의 대화가 그때 상황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게 해주었다. 거기에 자세한 설명들이 진지한 격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왕이 삐진다라는 표현이 참 재미있었는데, 역시 신하된 도리로써 왕을 화나게 하면 좋지 않은 일이므로, 달래준다거나 듣기좋은말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행동들 역시 지금의 우리 사회조직의 모습을 보는것 같다.

 

세종의 공법 실시 논쟁을 통해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세의 문제는 과장 큰 문제이고 국민들이 잘 살기 위한 기반이다. 지금도 조세의 문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수가 없다. 누구를 위한 개혁인지 말이다. 국사책에서 조세문제가 가장 어려웠다. 뭐 이리저리 주체없이 끌려다니는 개혁안은 폐단의 폐단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세종의 공법 실시문제는 조선 최대의 마라톤 토론이 되었다. 답답한 부분들도 많았지만, 어쩔수 없는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도 법 하나 개혁할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들에게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 딴지걸고 통과를 시켜주지 않으니 말이다. 그 당시에도 딴지 거는 사람이 한 둘 이였겠는가?

 

예송논쟁의 본질은 단순히 상복의 문제가 아니라, 효종의 변칙 승계에 있으며, 그 아래에는 조선의 현재 왕이 정통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시간과 상황가 위세에 밀려 대충 마무리 지어진 1차 예송 논쟁의 문제점들이 곪아 다시 터진 것이 2차 예송의 본질이다.

결국 자기 마음대로 원칙을 바꾸려던 왕의 이기심과 하늘이 두쪽 나도 안 된다는 신하들의 융통성 없음이 충돌한 결과가 바로 2차 예송 논쟁이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예의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였지만, 본질을 벗어나 서로의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세력이나 권력이 무섭긴 한 것 같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으나 현실과 이상은 동일시 될 수 없다. 자신들의 이상을 찾기 위해선 그들이 옳다 생각되는 것을 따라야 하고 그럴려면 많은 부딪침이 있을 수 밖에 없을것이다. 서로의 옳은 뜻을 펼치기 위한 격돌이다.  그러다가 서로의 치졸한 부분들을 드러내고 본질은 잊고 만다.

 

문체반정이란 '잘못된 글을 올바른 것으로 되돌린다' 라는 말이다. 정조는 죽는날까지 삶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을 것 같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도 그렇지만, 그가 살아있기를 바란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쫓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많지 않은 나이에 갑작스레 죽었다. 참 의문스러운 점들이 많다.

정조는 자신에게도 다른사람에게도 엄격했다. 그리고 여러방면에 총명했던 정조가 그의 개혁을 성공하였다면 조선이 어떻게 변모했을까~

 문체 반정의 결말은 저자의 말대로 정조의 취향이 아닌것을 어찌하겠는가~~

 

안타까운점은 역사는 되풀이 된다라는 점이다. 지금도 과거의 조선과 지금의 우리나라는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진바가 없다는 것이다.

링컨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국민의 일부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속일 수는 있다. 또한 국민의 전부를 일시적으로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국민 전부를 끝까지 속이는 것은 불가능 하다' 라는 링컨의 말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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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연출디자인의 원류 프레데릭 J.키슬러
야마구치 가쓰히로 지음, 김명환 옮김 / 미술문화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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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미술의 아웃사이더 키슬러를 ’건축가’라는 말로 단정지을수 있을까?

그는 극장설계, 무대장치, 실내디자인, 디스플레이, 회화, 조각, 제품디자인, 가구디자인등 순수미술에 걸쳐 폭넓게 전개되었다. 전문화와 분업화를 외치며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로써는 한가지만 해내기에도 벅찬것이다. 그렇지만, 키슬러는 이 모든것을 소화해내었다.

예전의 예술가라 불리우던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 뛰어난 역량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많았다. ’건축가’의 의미가 사람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액자틀과 같다. 사람의 능력은 무한대 일수도 제한적일 수도 있다.

설계를 할때 공간의 의미는 단지 네모박스는 아니다.

무엇을 설계할지에 따라 그 공간은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키슬러가 근대기능주의를 부정한 이유는 기계생산 시스템 및 자본주의 구조를 지나치게 신봉한 나머지 인간이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략하는 것을 걱정하였다. 그는 기계기술문명의 모순을 직시하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현실’의 구축을 목표로 했다.

즉 사회적 인본주의적 도덕관에 바탕을 둔 사상적 제안이었다.

 






<앤드리스 극장 모형과 단면도 평면도>
연극이 아닌 극장공간에 대한 변혁은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전의 극장은 군주제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상류층의 좌석을 무대 전방에 배치하고 그밖의 좌석을 차지한 관객들은 연극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장내의 어떠한 장소에서도 완벽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앤드리스 극장>을 통해서 연속되는 곡면의 공간 속에서 역학조건을 충족시키면서도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성공하였다. 구형의 건축물 내부의 공간 및 그 안에서 자유롭게 전개되는 드라마가 바로 그가 구상한 이상적 형태의 연극이였던 것이다.  

 

나는 살아 숨쉬는 건축을 꿈꾸고 있다. ’공간도시’ . 그리고 기능적인 건축을!  건물은 ’생태기능’에 자유자재로 접목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키슬러의 공간전시의 새로운 생각, 그는 화랑을 디자인하면서 그림을 전시만 하는 공간이 아닌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의 입장에 주목하고 다양한 장치를 고안한다. 그림이 벽에 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지지물을 만들어 그림을 고정하거나 관람객을 위해 책장과 비슷한 그림장과 그림을 놓을 수 있도록 이동 가능하게 설계된 일종의 ’픽쳐 스탠드’를 고안한다. 얼마나 멋진 계획안인지.

 

 위의 사진처럼 앉아서 편안하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에 가면 좋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음에도 지루함을 느낀다. 액자의 틀에 갇혀서 벽에 고정되어 있는 그림이 일반인 눈에 멋지게만 보인다면 그 사람은 천재적인 감각을 타고났다 생각된다. 전시 공간이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는다.

 

 



<프리-포름>의 컨셉 드로잉과 <푸리-포름>18가지 기능에 관한 스케치

 

키슬러는 건축이든, 디자인이든, 조각이든 제작자의 사고방식을 수용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사용자, 수용자, 보는 사람들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프리포름>은 미술관이 안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인 관객의 피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이며, 동시에 인간의 신체적 조건에 적합한 형태를 띠고 있다.

<프리포름>의 디자인이야말로 미술관을 방문하는 관객의 입장을 반영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앤드리스 하우스 1층, 2층 평면도>

 





<앤드리스 하우스 실내 디자인 제 1안의 드로잉과 제 1안의 모형>

 

키슬러의 작품에 등장하는 각체구조는 달걀이나 조개껍질 등에서 볼 수 있는 곡면의 연속적인 구조와 같은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초기작품인 <엔드리스 극장>의 계획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연속적인 구조체의 원리에 입각한 나선형 구조의 원리를 <앤드리스 하우스>에 적용한다.

<앤드리스 하우스>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도 말했듯이 태어나기 전이였던 어머니의 뱃속이 우리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이라 말한다. 앤드리스 하우스는 연속되어 있으면서도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주택은 단절의 공간이 아닌 대화의 장으로써 각자 개인의 쉼터이기도 하다.

 

 앤드리스 하우스를 통해서 우리와 가까운 곳에 ’인공적 우주’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살기 쉽게 하기 위한 장치’ 따위는 필요하지않았다. 대신에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각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작용하고 있는 우주의 힘이 우리를 끊임없이 성장시켜 물질적으로, 감성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무한하게 발전시켜 줄 것이다.

 

 키슬러는 1890년에 태어나 1965년 12월에 생을 마감한다.  그가 해온일들은 ’건축가를 위한 건축’이 아니라, ’거주하는 사람을 위한 건축’을 하였다. 기존의 건축가들은 거주자를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의 건축물들은 마천루를 보고 있는듯 하다. 거대하고 무서울정도로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 편리함과 고도의 전문화된 솜씨로 금방 지어지는 건축물을 볼때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의 환경에 동화되지 못하는 초건축물이 안타깝기도 하고 우리는 무엇때문에 높이 쌓기 경쟁을 하는지 모르겠다. 편리함에 젖어 네?? 아닌지. 그걸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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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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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나무의 가지였던 나는 무심하게 박씨의 손에 꺽이고 말았다. 몸이 무거워진 암소가 기적소리에 놀라 뛰쳐나가 버리고 박씨는 화가나서 나를 꺽어 들고는 암소를 쫓아갔다.

 

우리는 무심코 꺽어버리곤 하던 나뭇가지에 무슨 생각이 있어 그런 행동을 했을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필요할때 요긴하게 쓰다가 휙 던져버리곤 했다.

아무 마음의 꺼리낌도 없이 하찮게 여기던것들이 어디 한두가지였겠는가?

내가 좋아하는 정채봉님의 동화가 생각이 난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동화.

왜 제목이 똥친 막대기 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처음엔 더럽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암소를 때릴 회초리로 사용될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암소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열심히 일을 해주었다.

 

나는 비극을 맞이할 준비만 갖추고 있는 꼴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운명의 길에 내맡긴 채 어떤 기적이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기적만이 나를 회생시킬 수 있다는 믿음도 가치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는 자신을 운명에 맡기었지만,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박씨를 따라서 재희의 집에 가고 싶었던 소망대로 그의 집에 도착하였다. 막대기에 감정을 불어넣은 섬세한 표정들이 똥친 막대기에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는 재희를 아프게 할 줄 알았다면 오고 싶지 않았을테지만. 새들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하는대로 이리저리 움직일 수 밖에.

똥이 무러지게 하기위해서 박씨를는나를 더러운 오물사이로 휘저었다. 박씨의 손에 이끌려서 나는 똥친 막대기가 되었다. 신세한탄을 하면서 그 순간에도 난 재희가 어떻게 해주지 않을까 하고 바랬다.

재희는 나를 데리고 논두렁으로 갔다. 거기에서 난 낚시바늘이 되었다 논두렁에 버려졌다.

모내기철이라서 촉촉한 흙이 나를 반겨주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한순간도 삶의 끈을 놓지않았던 우리의 똥친 막대기..

 

분수에 넘치는 욕심은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더욱 부대끼고 시달려 지레 죽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허리가 싹둑 잘려나가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함께 했을땐 소중함을 알지 못했던 어미나무의 희생적인 보살핌을 떠올리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사람이 성장하듯이 막대기 역시 백양나무가지에서 여러차례 변화를 겪으면서 자신이 뿌리를 내려야 할곳을 찾았다.

 

나는 비로소 홍수에 떠내려 오면서도 살아야 한다는 내 꿈을 접은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침착하게 내 운명의 속살 안으로 가만히 손을 내민 행운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사방 어디를 살펴보아도 내가 뿌리를 내리고 다시 새잎을 피우려는 작업을 훼방놓을 천적은 없었습니다. 그 대신

나는 필경 외로울 테지요. 그러나 외로움을 사르며 자라나는 나무는 튼튼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사랑하는 어미나무가 그렇게 살아왔기 떄문입니다.

 

똥친 막대기의 성장과정을 통해서 기나긴 여정에서 올 고난을 충분히 버티어 나가리라 생각된다.

사람의 삶 또한 흘러가는대로 그렇지만, 자신의 최종 목적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외롭지만 견고하게 잘 자랄수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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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는 왜 난쟁이 집으로 갔을까?
모봉구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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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루하루 산다는게 무엇이고 바르게 산다는 의미와 기준도 잘모를때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 일과를 마치고 누울 때까지 많은 갈등과 고민과 선택과 스트레스를 받으며 반복되는 하루가 지나간다. 과연 잘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각자 기준이 다르겠지만 어느 순간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분간이 안갈 때가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하고 있는지 아니면 삶에 굴레에 빠져 그냥 그렇게 보내고 있는지도 구분이 안갈 때 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나이는 점점 30을 향해 가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이는 것이 없고 허무할 때 문득 이길이 내길이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궤도를 수정해야 하는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 자기개발서라고 나오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 중 이 책은 10편의 동화를 통해서 인생에 필요한 마음가짐과 살면서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에 대한 일들을 쉽게 풀이 해놓은 책이라 하겠다.

누구나 알고 있는 쉽고 교훈적인 동화를 이렇게 삶과 관련해서 보따리 풀어놓듯 하나 하나 풀이해놓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아마 백설공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첫 번째 긍정에 관한 이야기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전에는 착한 백설공주가 행복하게 잘살았다고 여기면 즐겁게 보았던 책이었는데 주인공들이 등장해야만 하는 필연성과 왜 백설공주가 일곱난쟁이한테 갈 수밖에 없는지.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통해서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말하고 싶은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한다.

 

 금도끼와 은도끼에서는 단호한 결단력이 기회를 살린다. 도끼는 결단력을 의미하며 산속은 개인적인 공간을 뜻한다. 연못이라는 공간은 결단력이 침체되어 우유부단함을 나타내고 있다. 나무꾼이 금도끼와 은도끼를 선택하지 않고, 쇠도끼를 선택한 의미는 과감하고 최상의 결단이 되어 그 결단력은 빛나며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다.

 

황금거위 이야기를 통해서는 눈앞의 작은 이익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함으로써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큰부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의 사람은 첫번째가 지하실의 술을 다  마시는 사람, 두번째 산더미 같이 쌓인 빵, 세번째 바다로 가고 땅에서도 가는배를 말하고 있다. 이것의 의미는 첫째는 돈에 취하지 않으며, 두번째는 돈에 배불러 하지도 않으며, 세번째는 모험과 안정이라는 서로 상충하는 자리속에서 자신의 사업을 이끌어 나갈수 있는 리더로써의 자질을 상징하고 있다.

 

동화는 옛날 옛적으로 시작해서 결말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꿈속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에 비추어 자신의 삶에 대입해서  나은 대안을 제시하는 지침서로써 재발견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동화 이야기들의 다양한 관점에서의 해석이 삶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나의 좁은 시안이 넓혀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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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걸작, 어떻게 이해할까? 미술문화 inter/ART 어떻게 이해할까 16
토마스 R. 호프만 지음, 심희섭 옮김 / 미술문화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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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해할까? 명화걸작의 첫장을 펼치면 지도가 나오는데 거기에 그림이 소장되어 있는 미술관과 나라가 함께 표시되어있다. 이부분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이 그림들을 보러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이 책을 통해 명화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것이 기쁘다. 왠지 실제로 명화들을 보면 어떤 감동에 빠져들런지.

그 누구처럼 그림의 강력한 이끌림에 빠져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그림들은 실제인물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나를 응시하던 눈동자가 무언가 말을 하는것 같기도 하다. 여행을 다니면 건축적으로도 뛰어난 미술관과 그림을 함께 감상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겠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관건은 어떻게 명화를 바라볼까? 였다.

우리에게 친숙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살펴볼까?

이 작품은 도미니크 교단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의 식당 북쪽 벽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림속 공간이 완벽한 비례를 이루고 있고, 그로 인해 13명의 인물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무대 같은 공간이 완벽한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녕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배반하리라"라고  한 말에 대해 각기 다른 감정적 동요를 보이고 있다. 또 소실점 투시도법에 따라 전개된 공간은 식당이라는 "실제공간"을 벽면 너머까지 연장해주고, 이를 위해 레오나르도는 식당에 흘러 들어오는 자연광의 조명까지도 철저히 염두해 두었다.  이 작품의 크기는 대략 폭 90m 높이 5m로 직사각형 형태의 식당 정면 벽전체, 약 50에 이르는 벽면을 덮고 있다. 그러니까 18평정도 된다는 것.

 생각만 해도 어머어마 하다. 책으로 보던 이 작품을 실제로 무지 보고 싶어졌다. 복구에 돈을 많이 들였다는데 원상태로 보존하기는 매우 힘이 드는것 같다. 
아마 지금가서 본다면 예전에 섬세한면까지 보지 못해 안타깝겠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다.

이 그림의 유명세는 무엇일까? 20대 중반의 여인이라고 믿기지 않을정도의 연륜이 묻어나는 미소.이 여인은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리자 델 조콘도 이다.
그림안에서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는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녹여냈다. 이 유명한 기법이 스푸마토이다.

즉 윤곽선을 희미하게 처리하는 기법을 말한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것 같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프란스 스니더스, <메두사의 머리>


바로크 시대는 전 유럽에서 회화의 양상이 아주 다채롭게 전개됐던 특징적인 시기이다.

감정의 영역은 하나같이 장렬한 스펙타클을 전개할 수 있는 주제였고 이렇게 장관을 연출하는 그림들은 강렬한 색채와 웅장한 구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그림은 나에게 아주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막 튀어 나올것 같은 눈동자와 메두사 머리의 꿈틀거리는 뱀들은 흡사 손에 잡힐듯 하다.

메두사의 목이잘린 낭자한 피의 강렬함~  

 



 

얀 베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하녀> : 일상의 마력


지금은 보기 힘든 광경이였겠지만,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였겠다.

빛의 환한 느낌이 느껴지는 옐로우 계통과 대조적인 블루계통이 차분한 느낌을 준다.

빛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분위기의 표현과 빵과 빵조각의 약간은 포토샵에서 이미지가 깨진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뚜렷하지 않으면서도 빛이 반사되는 점들이 작은형태로 반짝거린다.

 



  

앙투안 바토의 <피에로>
 

이 그림을 하반신을 보지 않았을때는 자살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의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팔과 몽롱해 보이는 표정을 보면 그가 허공에 떠있는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피에로는 인물의 비례가 완벽하고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의복의 주름과 주변과는 대조되는듯한 느낌을 준다. 




 

에드바르트 뭉크 <절규>

 

뭉크의 절규를 볼때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곤 하였다. "악 어떻하면 좋아."

그 사람의 절규가 나에게 느껴지기도 하고 영혼이 빠져나가버린것 같기도 하다. 이 그림을 보면서 종종 따라해보곤 하는데 정망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절규는 뭉크가 그린 그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되기 떄문이다. 그리고 단순화한 절규와 어디로 흘러들어갈지 모르는 소용돌이속의 외침이 강하게 와닿는다. 


그림을 보는 즐거움, 알아가는 즐거움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시대마다의 특성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짧지않았던 어떻게 이해할까? 명화걸작은 그림에 대한 나의 안목을 높여주었다.

그동안에 어렵다고만 여겨져왔던 그림과 내가 가까워진것 같아서 즐겁다. 그리고 더  알고싶은 호기심이 마구 일었다. 누군가는 그림이나 음악을 해석하려고만 든다면 진정한 그림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멍하니 바라보는것 보다는 앎을 바탕으로 그림과 대화를 나누는것이 좋다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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