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은 필요 없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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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며 피해자인 척한 적은 결코 없으니까.
"기모노 차림의 여자 분은 친구십니까?"
"질문은 하나만 한다고 했지?"
나는 훗 하고 웃어버렸다. "그렇군요. 하지만 당신을 위해서 도움을 주고 죄를 무릅쓸 정도로 사이가 좋은 사람인가 해서요."
"친구인걸. 친구란 그런 거잖아?"
"저 같으면 친구에게 그런 일을 부탁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뒤가 켕기는 신세를 지기는 무서우니까요."-125쪽.쪽

‘오리아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서로 양보하여 매듭짓는 일. 타협."
그리고 ‘타협’은 "쌍방이 서로 양보하여 일치점을 찾아 일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알듯 모를 듯한 이 설명 속의 진실은 하나. 어쨌든 어느 쪽도 ‘양보할’줄 모르는 관계라면 ‘타협’은 일절 존재하지 않으며, ‘오리아이’는 나빠질 뿐이다.
…만일 자신이 꺾인다면, 그 순간에 자신이 받치고 있던 세계가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두 사람 다 교각이다.
큰 다리는 바싹 붙여서 세우는 법이 아니다. 하지만 위쪽 어딘가에서 인간을 인간계로 내려 보내는 역할을 하는 누군가 씨는 때때로 실수를 범한다. 그 실수가 일으킨 대소동을 츠토무는 철이 들면서부터 죽, 속속들이 관찰해 왔다.
…그 전투의 진창에서 튀는 ‘흙탕’은 거의 어김없이 츠토무 쪽으로 날아왔다.
…충돌이 일어날 대마다 츠토무는 무력한 유엔군 마냥, 두 독재자 사이에서,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화가 나는 것을 느끼며 작은 백기를 흔들고 퇴각했다.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들고 있는 ‘비단 깃발’이 언제나 모조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가짜이기 때문에 더 요란하게 빛이 난다.-134~135쪽.쪽

츠토무는 인간들 중에는 어떻게 해도 공존할 수 없는 타입이 있다는 것을 열두 살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것은 죄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나나와 밤은 같은 정원에 심을 수가 없으니까.-137쪽.쪽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기계가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크기도 모양도 딱 성냥갑 2개를 나란히 가로로 늘어놓은 정도의 검은 상자였다. 재질은 플라스틱. 장방형 한쪽 끝에 코드가 두 개 뻗어 있고 그 끝에 악어입 집게가 하나씩 붙어 있다. 그 악어입 집게가 전화기 본체 안에 있는 빨간 코드와 하얀 코드를 각각 물고 있다. 다른 부분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즉, 이 작고 검은 상자는 악어입 집게 두 개만으로 전화기의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악어입 집게가 무리하게 들어가서 빨간 코드와 하얀 코드를 집고 있는 모양이 왠지 음험하다고 할까―.-147쪽.쪽

전화를 걸어 누군가와 이야기한다. 그래도 정말로 알고 싶은 건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 수가 없다. 전화를 끊은 후, 상대방이 전화가 놓여 있는 곳에서 옆에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 진실이 있으니까. 본심이 있으니까. 자칫하면 잔인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이, 괜찮아. 상관없어. 바나나와 밤을 같은 정원에 심을 수 없으니까. 떨어져 있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조합도 있는 거야.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은 있어.
태어났을 때부터 따라붙어 다니는 읽기 힘든 희귀한 성처럼.
아무리 연습해도 극복할 수 없는 서투름과 같이.

그래도 알아줬으면 좋겠어. 같은 정원에 심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쓸쓸해한다는 것을.-169~170쪽.쪽

"현금 서비스인가, 카드 한 장으로 간단히 돈을 인출할 수 있는 시대야. 소액 무담보 신용 대출도 그래. 카드로 간단히 빌릴 수 있지. 머리를 숙일 필요도 없고 수치스러운 기분을 맛보지 않아도 돼. 아, 이렇게 편하게 자기 것이 되는 돈이라면, 처음부터 자기 돈이나 마찬가지다―라고 착각하는 젊은이가 나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194쪽.쪽

"아까 당신은 오우라 미치에 씨의 짧은 커트머리를 지금 파리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녀가 머리를 자른 것은 어젯밤 오후 아홉 시경의 일입니다. 그전까지는 신문에 나온 사진처럼 긴 머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헤어스타일을 바꾼 후 아파트에는 돌아오지 않았죠. 끝내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건 알겠습니다. 그녀는 돌아오는 길에 육교 위에서 살인자와 만나, 그에게 떠밀려 죽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그녀의 짧은 머리에 관해서 말할 수 있었을까요?"
-204~205쪽.쪽

"…이 여자는 오늘밤 이 시각에 조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남자가 있으면, 그것은 경찰이라고 예측했던 게 아닌가―하고 말이야."

208~210쪽.
과연 도쿄라는 곳은 실재하는 걸까. 그런 것은 이런 종류의 잡지나 텔레비전에서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젊은이들이 ‘그곳에 가면 누구든 행복해질 수 있다’고 꿈꾸는,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도시가 아닐까.
…‘도쿄’는 환상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환상이다.
…어차피 허상이다. 밖에서만 볼 수 있는 움켜잡을 수 없는 도시.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는 도시.-208쪽.쪽

요시코가 말한 대로 속기 따위는 이미 구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녹음기 성능은 무서울 만큼 좋아졌고 워드프로세서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직까지도 음성을 자동적으로 문장으로 변환시켜주는 기계는 실용화되어 있지 않고, 되었다고 해도 그것 하나로 온갖 경우에 대응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의심스럽다. 사람 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분명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은 과도기라고 신지는 생각한다. 시대가 어떻게 발전해 갈지 모르지만, 지금은 분명히 속기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전문가가 아니면 안 되는 일도 있다.-230~231쪽.쪽

"‘둘시네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같은 가게가 아니야. 오히려 당신 같은 사람이 가끔 기분 전환하러 와서 즐기는 가게야. 나는 그럴 마음으로 해 왔어. 가게가 손님을 고르다니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야. 난 어떻게 해서든 마음대로 생겨버린 그 벽을 부수고 싶었어."-242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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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23 09:55   좋아요 0 | URL
하하하핫.... '츠토무'
내가 잘 아는 누군가의 이름과 같아서 잠시 너털웃음이...
이 '츠토무'라는 성은 그다지 흔하지 않아서요. (긁적)

302moon 2007-05-23 21:48   좋아요 0 | URL
그렇더라고요- 헷갈리기 쉬운 한자에, 그 발음도 오묘하고 -_-

비로그인 2007-05-24 13:10   좋아요 0 | URL
발음은....촌스럽다고 그 친구에게 대놓고 말한 적도 있는데......(긁적) 하핫...;;;
그러고보니, 저는 그 사람의 예명으로만 불렀지, 실명을 제대로 불러준 적이 없네요.
그러나...이제 와서 실명으로 불러주면 오히려 서운해할 것 같고. 이거 참..(긁적)
 
황혼녘 백합의 뼈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황혼녘 백합의 뼈.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기록할 사항은, 나 자신의 페이스, 문장의 호흡에 다소 익숙하다고 느껴 환호했던 소설이었다고 할까. 마치, 소설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가, 보랏빛 날개를 활짝 편 나비의 모자이크 영상을 바라보는 듯했다. 스타트의 미묘하고도 환상적인 묘사에, 피아노건반에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빠져들었던 소설이었다.
전지적 시점이었던 터라, 시선의 이동이 퍽 흥미로웠다. 무언가 암시를 주듯, 순간이동처럼 필터교체가 되고 있었다. 포토샵의 가루시안 블러 효과를 쓰듯 눈동자에 희끄무레한 막을 차례차례 집어넣는 것 같았다. 좀 어리둥절했다가, 찌릿찌릿한 감각을 느끼고,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 조만간, 뭔가 사건이 크게 터질 것 같은 느낌이 확 다가온 것이다.
중반까지는 이렇다 할 번쩍한 사건이 터지지 않는다. 주피터의 정체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보다 사건 전개가 빨라졌다는 것을 인식했다. 바짝 조여들고, 긴장감은 배가 되었지만, 갑자기 예고 없이 허무가 찾아들기도 했다. 주인공의 악에 대한 인식, 좀 더 깊숙하게 파고들었더라면 좋았을 법한데, 라는 개인적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191쪽. “한 가지 더 충고해 줄까. 아직은 비밀을 떠벌이지 않는 게 좋아. 그 열쇠, 소중히 간직해 둬. 그 가벼운 입과 자기 결점을 떠벌이는 악취미는, 분명 당신의 수명을 단축시킬 거야. 옛날부터 비밀을 빨리 폭로한 등장인물은 그 즉시 사라지는 법이니.”

이 부분은 복선의 구실을 했다. 바로 그 다음, 리야코가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말이다. 저 대사를 접했을 때, 멈칫했다가, 예상이 들어맞으면 굉장히 절묘하겠다 싶었다.

결말은 좀 흐지부지한 게 아닌가 생각을 했다. 이것저것 벌려놓고 수습은 대강 해치워버리듯 너무 빨리 매듭을 지은 것 같은 껄끄러움이 남았다. 이리저리 흩어지고 허공에 둥둥 뜬,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한 암시들을 허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주인공 리세의 활약을 좀 더 부각시켰으면?, 혹은 주인공 리세의 갈등을 좀 더 세심하게 드러낸다거나 다른 각도로 접근해보면서, 제 3의 이야기 망상을 펼치지만 어째서인가 의식 속에서 비집고 나온 부족함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는다. 작가가 장치한 겹겹의 복선과 반전에 너무 기대를 모은 나머지, 허를 찔렸다고 하나, 아무튼 그것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한숨만 푹푹 내쉬고 내가 내쉰 그 한숨에 허우적거릴 만큼 지리멸렬한 타입의 글은 아니었기에 커버를 덮을 때, 내심 만족하고 히죽 웃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와타루라는 이름을 발견하는 내내 싱글싱글 웃었던 덕분(?)도 한 몫 했고. 소설 속 공간이 아닌, 혼자 4차원 세계에서 둥실둥실 마구 떠다니다가, 겨우겨우 자리를 되찾아가기도 했던 상황.
되새겨보면, 소설을 읽는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지하실까지 가지를 뻗은 환상이, 회색빛과 보랏빛이 적절하게 섞여 들어간 소설 이미지가, 환각 증세까지는 아니더라도, 스크린 속 질주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멋대로 생각하면서 어설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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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문한 책.
- 나의 소소한 일상.
매장 신간코너에서 바로 구입하려던 것을,
말끔한 책이 없어 마구 툴툴거리다가,
잠깐 미뤄둔다는 게 지금에 이르렀다.
(책 상태가 좋아야 덩달아 신이 나는;)
오늘에서야 갑자기 생각났고
(어마어마한 이끌림에 지금 주체 못함),
역시 끌려서 선뜻 장바구니에 담았다.
- 면장 선거.
이라부 시리즈를 유쾌하게 봐서,
별다른 갈등 없이 장바구니로 보내기-
-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보통의 사색 수첩을 들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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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2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스앤텔이군요. :) 저것도 좋습니다.

302moon 2007-05-2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사실은 부분 베스트셀러 작가 기피증이라, 좀 밀쳐두고 있었는데, 동물원에 가기와 행복의 건축을 읽으면서, 점점 빠져들었답니다.(웃음)
 
 전출처 : 마늘빵 > 의심하라. 모든 것을 처음부터 의심하라.
데카르트 & 버클리 :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지식인마을 2
최훈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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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임없이 의심하라. 의심하라. 데카르트는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이 문구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이 문구가 어떻게 도출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철학자들의 언명만을 줄줄 욀 뿐 그들의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그 문구들이 왜 어떻게 뽑아져 나왔는지 과정엔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내 입에서 내뱉으려면 최소한 그들이 거쳐왔던 사유과정을 나 또한 거쳐야 할 것이다. 

  단순히 지난 철학자들의 말씀을 달달 외움으로써 철학을 했다고 하면 그건, 철학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철학사를 공부한 것에 불과하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철학사는 필요없다. 칸트가 이랬어요, 플라톤이 이랬어요, 레비스트로스가 이랬어요, 하고 그들이 했던 말을 외우고 반복해서 말 할  필요 없다. 물론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이 철학을 하는데 있어 필요하다. 하지만 공부가 끝난 뒤에는 철학사는 잊어라. 그리고 자신의 철학을 해라. 결과는 필요없고, 과정이 중요할 뿐이다. 내가 지금 내뱉고 있는 말이 어떤 사유과정을 거쳐서 나왔는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철학함'이다.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철학은 의심으로부터 시작한다. 의심은 철학만의 소유물은 아니지만 철학은 타분야와 의심의 차원이 다르다. 양초에 불을 붙이면 촛농이 뚝뚝 떨어지는데 왜 그럴까, 왜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를까, 머리를 안감으면 왜 떡이질까, 등등의 의심을 하면서, 의심을 풀어나가면서 과학은 발전해왔다. 하지만, 철학은 이러한 의심과는 다르다. 어떤 현상을 보고 저게 왜 저럴까, 의 차원이 아니라, 나는 왜 저걸 보고 저럴까 라고 의심을 할까, 의 차원이다. 내 남자친구가 어젯밤 외박을 했는데 어디에 있을까, 가 아니라 내 남자친구가 어젯밤 외박을 했는데 어디에 있을까 라는 질문은 어떻게 가능하지, 의 차원이랄까. 

  다시 한번 묻자.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물의 현상을 가리켜 저건 왜 저럴까 라고 묻지 않는다. 우리는 그걸 인식하고 있고, 그 인식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를 묻는다. 내가 오늘 아침 고기를 기름에 찍고 상추에 싸서 쌈장 듬뿍 발라 입안으로 넣었는데, 아 맛있더라. 그런데 이건 정말 지금 내가 느끼는 맛일까,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느낄까, 내가 지금 입으로 뭔가를 넣었다는건 확실한가. 의심하라. 그것이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의 의미다.

  철학에서는 이를 인식론이라고 한다. 서양의 근대에는 데카르트라는 철학자와 버클리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데카르트로부터 흔히 합리론이라고 불리우는 철학이 시작했고, 버클리로부터는 경험론이라는 철학이 시작했다. 둘의 공통점은 모든 것을 의심했다는 것이며, 둘의 차이점은 데카르트는 사고의 결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고,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사유과정을 마무리지었다. 결과는 엄연히 다르다. 

  두 사람의 차이는, 내가 보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먹는 것, 만지는 것, 냄새 등등 모든 것들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믿을 수 없다. 이런 악마녀석 나에게 마법을 걸다니. 그런데 아! 내가 지금 이렇게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난 존재하는구나. 와  경험한다고 다 존재하는건 아니야. 빨간사과를 봤다. 그런데 내가 본건 '빨간사과'가 아니라 '사과의 빨감'이다. 정말 확실한건 지금 내 눈에 빨강이라는 것을 경험했다는 사실 뿐이다. 사과를 봤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과를 본게 아니라 사과의 시각경험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표상을 보고 있는 것 뿐이다. 그것조차도 믿을 수 없다. 이렇게 정리해보자. 우리는 외부 세계의 대상을 지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관념만을 지각한다(실재는 확실하지 않으니까). 고로 외부 세계의 대상들은 관념이다. 사과의 색깔도 냄새도 크기도 모양도 죄다 관념이다. 로 정리해볼 수 있다.  

  데카르트에게 문제는, 끝까지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사고를 더 밀고가면, 결론은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다. 5분전 나는 분명 이와 같은 의심을 했다, 그런데 5분 뒤의 나는 5분 전의 나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없다. 그 생각을 한 것이 나라고 확신할 수 없다. 지금 5분 전의 나를 의심하는 나는 나지만 그전의 나는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또 시간이 1,2초 흐르면 1,2초전의 나는 지금의 나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없다. 이걸 끝까지 밀고 간 이가 흄이다. 흄은 그건 우리가 확실하게 경험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가설일 뿐이라고 한다. 버클리는 데카르트의 한계를 지적했을 뿐이다. 같은 빨간 사과를 봐도, 데카르트는 '빨간사과를 봤다'고 하겠지만 버클리는 '사과의 빨감'을 봤다고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일반인의 눈에는 데카르트나 버클리나 흄이나 다 미친놈으로 밖에 안 보일 것이다. 이런 미친. 먹고 맛있으며 되고, 보이면 보이는대로 말하면 되지, 얼어죽을 의심은! 그래 우리 눈에는 저들이 미친놈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방에 가둬놓고 혼자서 천장 바라보면서 어 왜 천장은 위에 있고 평평하지 라고 생각하거나 평평하다는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지면 증명가능할까,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게 놔둬야될 거 같다. 저자 최훈은 이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안겨준다.

  "철학의 임무가 상식을 보존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과학 이론이  상식과 어긋난다고 해서 잘못된 이론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철학 이론의 장점과 결점도 상식과 부합하느냐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다른 확립된 이론과 충돌하지 않는가, 충돌한다면 더 그럴듯하게 설명해낼수 있는가, 그 이론 내부에 모순은 없는가 등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철학이 아무리 의심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이다. 끊임없이 의심하라. 그리하면 지금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 속을 하얗게 비우고 처음부터 단계를 쌓아나가자. 그럼 나름의 결론에 도달할테니.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다. 삶에서 겪는 온갖 고민들은 처음부터 의심함으로써 해결된다. 고민이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으면서 머리를 아프게 하는건,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머리가 복잡할 땐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의심하라. 그리하면 길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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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waits > 간편하고 안전한 기념
5.18민중항쟁 역사 다시 읽기 3
김진경 지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원래 인간이 좀 촌스러워서, 특정 날짜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다. 언제부턴가 일종의 습관이 되어버려서, 꼭 의식하고 있지 않더라도 즈음이 되면 절로 시선에 밟히는 것들이 있고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곧 때가 다가오는구나 자각하게 된다. 게다가 살짝 기념주의자이기도 해서, 혼자서라도 뻘짓거리를 하고 넘어가야 스스로 불편하지가 않다.

 문득 책장에 꽂힌 '윤상원'에 눈길이 멎은 게 보름쯤 전. 그렇구나, 다시 5월이구나. 5월은 참 바쁜 달이다. 이래저래 이름 붙은 날들이 많은, 자식 없는 무학의 고아가 아닌 다음에야 완전히 피해갈 수 없는 기념일 과잉의 달. 와중에 백화점이니 할인마트는 각종 선물세트 팔아먹기 바쁘고, 평소에 잊고 지내던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게 나쁠 리는 없건만 그래도 아주 마땅치는 않다.

 물론 나 역시 '5월'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그 날이 다시 오면'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돌이켜보면 사실 대학시절 이미 '5월 광주'는 금기라기보다 무심히 잊혀진 사건이었다. 희생자들이 명예회복되고 생존 피해자들이 배상을 받고 국가적으로 기념하는 '공식 역사로 등재'된 후에는 4.19만큼이나 박제화되어 멀어져버린 것도 같다. 국립묘지로 단장한 신묘역의 번드르르함 만큼이나 광주는 더 이상 아프고 통절한 무엇이 아니라, 때가 되면 되새기며 '지금의 민주화'를 지키기 위해 전범 삼아야 할 기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광주는 너무 이르게 '해치워버린' 사건인 것 같다.

 강풀이 만화를 그리고 누군가는 영화도 만들고 책이야 무수히 쏟아져 나왔지만, 광주의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두가 우방이라고 믿고 있었던 미국의 실체를 드러냈다는 것, 단지 폭도들이라고 매도 당한 광주 시민들이 열흘 간 만들어냈다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재현을 강조하는 것, 총칼로 무차별학살을 자행한 군부에 저항한 시민들의 민주 염원이 만들어낸 시대정신을 기억하는 것, ... 

 무어라고 해석한다고 해도, 어쩐지 우리 모두가 '5월 광주'를 너무 떨이로 해치워버린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역사의 무게에 가위 눌려 모두가 우울한 낯빛을 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뭐 그런 걸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미 갈 데까지 간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4.19세대 운운하며 민주를 향한 투쟁의 역사를 외투 삼아온 현실을 생각하면, 말 많은 '386'을 넘어 이제 너도 나도 '5월 광주'의  적자임을 내세우는 역겨운 꼴을 보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소위 특수공공법인이라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부터 기념되는 혁명과 인물들에 대해, 아니 그들의 기념 관점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쓰잘데기 없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는데... 더 이상 파헤칠 묻혀진 진실의 가능성이 없다고 믿겨지는, 공공의 기념이 가리는 무언가가 여전히 남아있지 않을까. 명예회복과 배상을 통한 공식화 속에서, 목격자들이 할 말을 잃고 희생자들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이 만약 광주의 현재라면, 결국 그냥 그런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만이 남게 되는 건 아닐까 주제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음... 책은, 대학시절 마일드한 필독서 몇 권의 저자였던 김진경 선생이 '솔'이라는 고등학생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한참 지난 역사적 사건을 시시콜콜 전달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사람은 무엇으로 사람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다고 서두에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아주 쉽고 친절하게, 물론 동세대로 '광주'를 겪은 저자의 심사야 간단치 않았겠지만 참으로 담담하게 서술된다.

 지난 주 이래저래 받는 뉴스레터들에서 같은 시를 몇 번이나 마주쳤다. 찬사 일색의, 심지어 어느 뉴스싸이트에서는 오월 광주가 소녀 천재시인을 낳았다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기사를 마주치기도 했다. '그 날'이라는 제목의, 질펀하게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그 짧은 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탁월한 시적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인 듯 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겪지 않고도 그리 선하게 그려내는 게 오히려 무섭고 이상했다. 그리고 나 역시 80년 5월의 광주에 대해 어떤 직접적 체험도 없으면서 선험적 고통의 근원이라도 되는 듯 무겁게 반응하는 게 오히려 의심스럽기도 하다.

 황석영의 책을 다시 집어드는 건 솔직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언제 사놓았는지 기억에도 없는 얇은 책이 하나 있었다. 하얀 바탕의 매끈한 표지, 한 시간 남짓이면 다 읽어버릴 수 있는 초박형 두께, 물론 중간중간 저릿한 느낌이 없지야 않았지만 책장을 덮고 나도 별 감흥(?)이 없다. 2007년 나의 광주, 어쩌면 2007년 우리 모두의 광주가 지금 이런 모습은 아닌가 싶다. 부담없고, 깔끔하고, 그리고 여운이 없는. 올해는 그렇게 지나버렸다. 안전한 기념으로 머물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조차 좀 부끄럽고 무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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