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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 19,800원 (10%1,100)
  • 2024-05-21
  • : 50,083

 어린 시절 우리는 민주주의와 함께 다수결의 원리를 배웠다. 물론 이때 소수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고 배웠다. 또 어린 시절에 우리는 승패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또 어린 시절에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자랄수록 이 세계가 이런 가르침들이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니 이 상식이 나날이 무너져가는 것을 목격해야만 한다면?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를 읽노라면 내가 사는 이곳이나 ‘자유’라는 영역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미국이나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익히 배워온 이 상식이 무너져 가고 있음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 대한민국과 미국만 그러한가. 정치적으로는 이른바 선진국임을 자부하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조차 ‘상식’과는 거리가 멀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극단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고, 각국의 정당 및 정치인들은 그 극단 세력을 끊어내기는커녕 교묘히 연합해 자기 잇속을 채우고 세를 불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는 사이에 인권이나 자유, 평등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퇴색하다 못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세계는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답답한 마음에 이 책을 펼쳤다.

 ‘극단적인 소수’가 ‘다수’를 지배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진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시행되는데, 어떻게 소수의 다수 지배가 가능한지 의아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이 미국, 그것도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를 배경으로 쓰였음을 이해한다면 소수의 백인-엘리트 집단이 다인종으로 이루어진 다수의 시민들의 자유 및 인권을 억압하는 형태로 유지되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유권자가 직접 대통령을 뽑는 방식이 아닌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이런 방식 때문에 표를 행사하는 다수의 의지와는 어긋나는 인물이 선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때문에 민주당 출신 후보가 더 많은 표를 얻고도 선거에서 패하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게다가 소수의 거부권(필리버스터)을 유지하는 세계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대법원 판사의 종신제 또한 권력을 소수의 엘리트들이 차지하고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형태로 흘러가기 쉽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런 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저건 우리와는 정치체제가 다른 미국의 상황이지 않은가? 우리는 국민 개개인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완벽하게 다수의 원리가 작동하는 나라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극단적인 소수가 다수를 지배한다는,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진단은 이곳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닌가?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이 책에서는 극단 세력 때문에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상황이 처음 몇 쪽부터 그려진다. 그런데 이 모습은 지난해 12월 3일, 이 땅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그 이후 벌어진 반민주적인 작태들과 너무나 흡사해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저자는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무늬만 민주주의자를 구분한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앞서 말했던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상식이라고 여겨지는 것들-그러니까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결과를 존중하며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 또는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을 사용하는 전략을 분명하게 거부한다. 그들에게 군사 쿠데타나 폭동, 반란을 조장하고 폭탄 투척 및 암살 등 다양한 테러 행위를 계획하거나 폭력배를 동원하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반민주주의 세력과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하지만 무늬만 민주주의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도리어 이런 반민주 세력과 손을 잡는다.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보호하거나 옹호한다. 나아가 이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면서 마이크를 쥐어주기까지 한다.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이런 극단 세력이 외면당한다. 이런 세력과 결탁하는 것은 자신들의 평판에 좋지 않기 때문에 언론은 물론 정치인, 기업가, 제도권 인사들이 당연히 이들과의 접촉을 꺼린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이런 세력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손을 잡고 이용할 때 극단적인 이념이 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면서 민주주의 지형은 달라진다. 계엄 후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 사태 및 그들을 변호해주던 집권 여당, 계엄을 옹호하는 국회의원이 나서서 반공청년단과 백골단을 자처하는 단체를 국회까지 데리고 온 일 등등이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 게다가 그들은 부정선거음모론을 펼치며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모습을 줄곧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파면당한 전 대통령은 법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 기술적 차원에서 합법적인 형태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 사용하고자 했다. 이 모든 행태들이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답은 없는가? 답답해지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민주주의 시스템에서는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도리어 소수의 지배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도구는 극단주의자나 반민주적인 몇몇의 손에 들어갈 때 특히 위험해진다. 사회가 이런 위험에 놓였을 때는 정부의 권한과 법률을 적극적으로 활용, 반민주 세력을 축출해서 그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진보와 보수의 연정으로 반민주세력을 봉쇄하는 정책도 효과적이다. 그러나 봉쇄는 단기적 전략으로 쓰여야 하며 장기적 연합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릴 수 있다. 봉쇄와 배제는 제한적 방식으로 작동해야 하며 투표를 더 쉽게 하고 (미국의 경우) 선거인단 제도를 보통 선거로 하거나 대법원 종신제를 폐지하고 헌법 수정을 더 쉽게 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투표- 궁극적으로 유권자가 나서야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에서 내내 민주주의 파괴자로 묘사된 그 트럼프가 유권자의 선택을 통해 다시 돌아왔다. 어떤 시스템도 인간의 선택이 상식을 벗어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건 아닌가 싶어지는 지점이다. 그러나 모든 제도에는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만들어진 법이 극단주의자와 엘리트들의 잇속을 차리는 데 이용되듯이, 또 헌법이 독재자나 파시스트 정당에 교묘히 이용되듯이, 유권자 모두에게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진 것 같지만 투표 시간이나 장소 등을 어렵게 만들어 결국 보통 선거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듯이. 그렇기에 제도를 만들고 그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시민들이 눈을 부릅뜨는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개혁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p.365)이라는,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선다는 말은 우리 자신을 위해 일어선다는 뜻”(p.369)이라는, 결국 “민주주의의 병폐를 치료하기 위한 약은 더 많은 민주주의”뿐이라는 제인 애덤스의 말은 지금 이 땅에서 꼭 필요한 상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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