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기에 정지해 있다 <등대로>
새파랑 2025/04/24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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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대로
- 버지니아 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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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 2014-02-07
: 1,929
N25037
"내일 날이 맑지 않더라도...내일은 또 다른 날이 될 거야."
어느날 과거의 특정 순간의 기억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똑같은 장소에 다시 갈 때, 혹은 어떤 생각을 할 때, 혹은 음악을 들을 때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때 그랬었지, 그때 누군가를 좋아했었지, 그때 정말 기뻤거나 슬펐던 과거의 감정들.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내가 이 순간을 애뜻하게 떠올릴 줄 알았을까? <등대로>를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등대로>는 큰 사건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다. 줄거리를 보자면, 과거에 등대에 가려고 했으나 날씨기 안좋아 등대를 못갔었고(1부), 이후 많은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변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라졌지만(2부), 현재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등대에 가려고 하는(3부) 이야기이다. 줄거리만 보면 엄청 간단한데 결코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 작품답게 문장들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있고, 주인공 격인 렘지부인, 릴리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 자신들의 생각을 늘어놓는다. 게다가 타인에 대한 감정은 시도때도 없이 바뀌고 이에 맞춰서 화자도 계속 바뀐다. 텍스트만 따라 읽다보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생기기도 했다.
[바로 지금, 고통스럽게도 인간관계의 불완전함, 가장 완벽한 관계에도 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진실에 대한 본능적 갈구 탓에 진실을 직시하려 하지만 견딜 수 없던 바로 그 순간에, 고통스럽게도 자신의 무가치함이 입증되었다고 느끼고 이런저런 거짓과 과장 탓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순간에, 고양된 기분의 여파로 이처럼 비참하게 초조해진 바로 이 순간에, 카마이클 씨는 노란 슬리퍼를 신고 발을 질질 끌며 지나가고 있었고, 내면의 어떤 악마적 충동으로 그녀는 지나가는 그를 소리쳐 부를 수밖에 없었다. ] P.86
머리속에 있는 생각을 모두 글로 끄집어 내어 한편의 그림처럼 묘사한 작품이 <등대로>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등대로>를 읽으면서 각 파트별로 같은 장소에 대한 세편의 그림을 그려봤다.
1부 : 창
일몰이 조금 지난 저녁 시간, 별장의 창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 등대가 있다. 그 등대 주위로 파도가 높게 친다. 별장 옆으로는 몇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거닐고 있고, 별장 안에서는 만찬이 이뤄지고 있다. 어른들의 표정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아이들의 표정에서는 실망이 엿보인다. 그리고 아이들 옆에있는 엄마는 아이들을 달래고 있다. 등대를 가고싶어 하는 아이들, 그리고 날씨가 안좋아 등대에 갈 수 없다고 단정짓는 어른들.
[그날 오후에 다른 일로 이미 느꼈던 것처럼 사물에는 응집성과 영속성이 있다. 덧없이 흘러가고 사라지고 유령처럼 형체를 잃어버리는 것에 맞서 변화를 초월한 어떤 것이 루비처럼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그녀는 반사된 빛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창문을 힐끗 바라다보았다.) 그래서 오늘 밤에 다시 그녀는 이미 낮에 한 번 느꼈던 감정, 평화로움과 평안함을 느꼈다. 앞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진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순간이 남을 것이다.] P.234
2부 : 세월이 흐르다
밖은 한밤 중이며, 집안은 적막이 느껴진다. 가족들은 촛불을 켜놓고 테이블 주위에 모여 있다. 이젠 더이상 아이들이 아닌 청소년들 처럼 보이는데, 숫자도 줄고 표정도 좋지 않다. 하지만 별장의 바깥에는 여전히 등대가 보인다. 희미하지만 빛나는 빛을 비춘다. 파도는 어둠에 가려 보이지는 않는다. 좋은 날씨일까, 나쁜 날씨일까.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아빠의 모습은 어딘지 외로워 보인다.
[램지 씨는 어느 어둑한 날 아침에 비틀거리며 복도를 따라 걷다가 양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가 팔을 내민 전날 밤에 램지 부인이 다소 갑작스레 죽었기에, 그의 팔은 텅 빈 채로 남고 말았다.] P.287
[그해 여름 프루 램지는 출산 중에 죽었다. 정말 비극적인 일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녀보다 더 행복해야 할 사람은 없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P.297
[포탄이 폭발했다. 프랑스에서 청년 이삼십 명이 포탄에 맞았고, 그중에 앤드루 램지가 끼어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즉사했다.] P.299
3부 : 등대로
해가 떠 있고 별장의 창 밖으로 등대가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는 등대 주위의 파도가 잔잔하다. 그리고 등대 주위에 작은 배가 한척 보인다. 그곳에는 대여섯명의 사람이 타고 있는데 아마 등대로 향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등대와 작은 배를 그리고 있는 한 여인이 보인다. 한 가족이 등대로 가기 까지의 우여곡절을 다 보고 있었던 건까? 장소는 그대로다. 등대는 계속 거기에 있었다. 다만 시간이 흘렀을 뿐이고 많은 것이 변했다. 사람도, 감정도 말이다. 그래서 옛시절이 그립다. 변한게 없었다면 그리울게 있겠는가.
[그녀는 그림을 보았다. 어쩌면 그림이 그의 답일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그녀’가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것, 그 무엇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 그러나 단어들이나 그림은 그렇지 않다는 것. ] P.401
예전에 열린책들 버젼으로 등대로를 처음 읽었고, 이번에 민음사 버젼으로 다시 읽었는데, 확실히 재독하니까 안보이던게 보이고 훨씬 이해하기도 쉬웠다. 괜히 명작이 아니었다. 다음번에는 <댈러웨이 부인>을 재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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