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의 물리학》함께 읽기
(원제: Nine Musings on Time)
존 그리빈 지음 [휴머니스트] (2024)
과학책 읽기 모임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 책은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존 그리빈의 《시간의 물리학》입니다. 저자의 저서는 꽤 오래 전부터 국내에 많이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과학자를 비롯하여 폭넓고 다양한 과학 주제로 글을 써온 과학저술가입니다. 부인인 메리 그리빈(Mary Gribbin)과 함께 많은 과학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번에 함께 읽은 책은 70대 후반의 노(老)과학자가 현업 작가로서 2022년에 출간한 책입니다. 시간 및 시간 여행에 관해 쓴 이 책을 함께 읽다보니 과학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열정과 호기심, 그리고 무엇보다 SF에 대한 그의 오랜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Nine Musings on Time》입니다. 여기서 musings는 우리가 영감의 원천으로 언급하는 뮤즈(muse)라는 용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동사로는 ‘사색하다, 골똘히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곧 musing은 ‘숙고/사색’을 의미하기도 하죠. 그러니까 이 책은 ‘시간’에 대한 과학자의 생각을 모은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주목해보는 지점은, 번역서와 원서의 차이입니다. 번역서에는 다양한 그래프와 과학개념을 소개하는 그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원서에는 대부분 과학자를 비롯한 인물 사진만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원서에는 없는 그래프나 그림들을 출판사/역자가 적극적으로 배치하는데요, 이 작업은 분명히 번역자 혹은 편집자의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저자가 시간과 시간 여행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독자에게 ‘꼭 알려주고 싶다’는 의도보다는, SF 덕후인 그가 시간 여행을 다룬 과학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이 책을 읽는 과정이 한결 가볍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이번 읽기 모임에 오신 한 참여자분은 저자가 청년 시절 흥분하며 읽었던 SF잡지 <어스타운딩 Astounding>의 표지 사진을 스티커로 만들어 선물해주신 분도 있었습니다. 본인의 SF사랑을 모임에서 한껏 나누어주셨으므로, 저자가 이 책을 쓸 때 바라던 대로 실천하신 것이 아닐까요.
한편 모임 중에 몇 가지 과학 개념들을 짚고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참여자분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바로 ‘시간’임을 알 수 있었는데요,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떻게 (과학적으로) 이해하면 좋을지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책을 읽고 보니 과연 ‘시간’의 정체에 대해서는 과학자들마다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견해차가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봅니다. 과학자들이 열역학적인 관점(엔트로피 관련)에서 시간의 의미를 설명하더라도, 일반인인 우리에게는 여전히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자는 몇몇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시간이 흐른다’라는 설명을, 인간의 감각에 기반 한 환상이라 본다는 견해도 제시합니다.
‘유유히 흐르는 시간’의 비유는 그 역사가 깊습니다. 자연철학서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은 시간의 정체를 궁리하다가 ‘영원히 움직이는 모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을 강의 이미지와 연결 짓는 역사가 이미 충분히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서구 기독교 교리의 토대를 마련한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자신의 《고백록》에서는 아예 작정하고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내게 물어서 설명해주려고 하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라는 것이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지요. ‘흐르는 시간’의 개념이 여기에서도 발견됩니다.
현대인은 우주의 기본 구성 요소로 만든 원자시계를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년/시/분/초의 개념은 지극히 인간적인(혹은 지구적인) 시간 개념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개념은 인류가 살아가는 지구의 조건과 떨어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주기, 지구의 자전주기, 달의 지구 공전 주기 등은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 체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지만, 이것이 ‘유효한’ 조건은 역시나 ‘지구에 한해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SF의 단골 주제인 ‘시간 여행’ 방식 중에서 원하는 시대(과거든 미래든)에 타이머를 맞추어 가는 방식은 분명 불가능합니다. 또 우연히 시간여행이 가능한 문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원래의 지점으로 되돌아올 수는 없다고 말해줍니다.
나아가 ‘질량’을 가진 존재가 시간 여행을 하기 위해 광속에 준하는 속력이 필요하다면, 이것은 상대성 이론에 의해, 태양계에 존재하는 에너지보다도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해집니다. 그럼에도 저자의 입장은 ‘시간 여행은 과학적으로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과학적 조건들을 검토합니다. 실제로 물리학자들은 질량이 없는 ‘빛’으로 시간이동을 가능하게 한 실험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정보를 광속보다 빠르게 ‘과거로’ 전달함으로써 말입니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시간여행’을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대신 ‘빛’을 이용하여 시간이동을 할 수는 있다, 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이때 이동한 시간의 차이는 (아직까지는) 지극히 찰나에 가깝긴 하지만요.
이번에 읽은 책을 통해 저자가 SF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SF는 저자가 과학자가 되도록 이끈 영감과 열정의 원천임을 알 수 있었거든요. 물론 SF는 저자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준 장르이기도 합니다. 현재 실현된 과학기술 가운데 많은 것들이 과거의 SF에 이미 등장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SF를 단순히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무시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요? 적어도 저자 존 그리빈에게 SF는 그를 과학이라는 지적활동의 세계로 이끌어준 원동력이었으며, 읽기와 쓰기에 대한 열정을 불어 넣어 준 뮤즈였던 셈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읽은 《시간의 물리학》은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SF에 보내는 저자의 오마주이자 사랑고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한 뒤로 시간여행은 줄곧 나를 매료했다."(7)- P7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현대 과학이 직면한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 중 하나다."(37)- P37
"몇몇 과학자(그리고 철학자)는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이 인간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50)- P50
"빛이 빛보다 빠르게 움직이려면 양자 터널링으로 알려진 현상에 의존해야 한다."(71)- P71
"쾰른대학교의 귄터 니미츠 연구팀은 정보를 광속보다 빠르게 과거로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81)- P81
"아서 C. 클라크의 유명한 격언이 시사했듯이 충분히 발달한 과학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는 법이다."(126)- P126
"(프레드) 호일은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끊임없이 흐르는 강이라는 시간의 이미지는 ‘그로테스크하고 부조리한 환상‘이라고 단언한다."(136)- P136
"과거에 존재했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것은 언제나 존재하며, 우리가 역사나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는 감각은 오로지 우리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137)- 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