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과 경제대국 일본 세계 석학들이 뽑은 만화 세계대역사 50사건 44
원유상 지음, 이한영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려운 아이들 역사공부에서 한시대를 지배했던 강대한 문명과 제국을 이끈 위대한 인물, 주요 사건들의 배경, 의미를 살펴보는 건 매우 중요한 공부. 단순히 사건이 일어난 연도별로 시험문제에 나올 사건을 밑줄 긋고 줄줄 외워야 하는 부담감없이 재밌게 배경지식을 쌓는 쉬운 방법으로 관련 도서를 많이 읽는 게 도움이 돼죠. 이 중, 세계 석학들이 뽑은 <만화 세계대역사50사건> 마흔 네번째 이야기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대부분 전쟁 피해를 입었던 경제대국,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알아봐요.

 

 일찍이 일본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바다가 생겨나지 않은 구석기시대부터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많은 교류가 있어 왔어요. 4세기 무렵, 야마토 정권을 중심으로 한 통일국가가 처음 등장한 이후에 

쇼토쿠 태자는 중국과 한반도의 불교와 여러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화려한 고대 문화를 꽃 피웠고요. 쇼토쿠 태자가 죽고 난 뒤 일본은 당의 율령 체제를 받아들이고 수도를 헤이조쿄로 정하면서 천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국가체제를 확립해가요. 실제로 헤이조쿄 모습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꼭 빼닮았을뿐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도 이때 처음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점차 천왕 중심의 통치를 거부하고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려는 귀족과 지방의 호족들 반발이 커지면서 지방 영주들은 힘있는 무사들을 고용. 지방 곳곳에서는 큰 규모의 무사단이 나타나기도 해요.  이때 무사들이 집권하는 가마쿠라 정치체제를 '가마쿠라 막부시대'라고 하는데 막부는 원래 무사들의 군사지휘 본부를 뜻하는 말로 막부의 최고 지도자를 쇼군이라 불렀대요. 그리고 100년 이상 쇼군의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가를 대한 계속된 혼란은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으며 끝이 났고 이전까지 문화교류에 큰 영향을 준 삼국과 가야와의 우호적 관계도 끝이 난 듯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야망은 시작되었어요. 

 

 

 

 

 1592년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미국이 자신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조선을 위협하며 개항을 요구하던 일본은 다시 천황을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 개혁을 이끌던 정부 변화로 교통, 산업, 군사, 교육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군대로 서양식으로 탈바꿈. 마치 아시아에 서양국가가 하나 있는 것처럼 보였데요. 무엇보다 일본이 서양의 발전된 기술과 문명만 받아들인 게 아나라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경제적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제국주의 모습도 배웠던 것이 처음부터 침략을 위한 서양식 군대를 키워 조선을 위협했던 거죠. 

 

 그러니 일본이 경제적으로 조선에 대한 침투를 강화하던 시기에 이를 견제하는 청나라가 그냥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는 입장에서 결국 일본의 선제 공격으로 두 나라가 조선을 두고 전쟁을 벌인 것이 바로 청일 전쟁. 당시 일본의 함대는 서양의 함대와 다를 것이 없어 청나라가 입은 피해가 엄청나게 컸어요. 전쟁이 일어난지 1년도 지나지 않은 1895년,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 후 청의 랴오둥 반도를 놓고는 1904년 러일 전쟁도 승리를 이끌더니 강제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중국 만주를 침략하는 등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위협하는 나라가 돼요. 

 

 이어서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도 국제사회의 여론을 무시한 일본의 자작극으로 강행. 며칠만에 중국 베이징과 텐진을 장악한 일본은 상하이에 이어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까지 점령하기 이르는데 난징은 다른 곳에서 피난 온 사람과 피난을 가는 사람으로 뒤범벅인 상황에 난징 성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 마침내 난징은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이때 죽임을 당한 민간인이 3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진 세계 역사에서 유례없는 민간인 학살로 기억. 난징 성 강동문 부근에 난징 대학살 기념관을 세우고 그 아픔을 잊지 않고 역사적 교휸을 기억하려는 중국인들의 마음이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편 일본은 중일 전쟁 중에 일어났던 제2차 세계대전에도 나섰으며 미국은 전쟁을 확대하려는 일본의 모습을 심각하게 걱정. 그래서 중국에게 전쟁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공급하는 등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자 일본은 그러한 미국에게 불만이 클수 밖에 없던 일본 내부 강경파 입장은 단호. 이로 인해 일본이 아시아와 태평양을 장악하기 위해 미국 전함들이 몰려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는 전면전을 선택. 1941년 야마모토 이소로쿠 장군이 이끄는 수십 대의 일본 전함과 잠수정이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로 향하는데 특히 미사일처럼 미국 전함을 향해 날아오는 일본의 자살 공격 전투기는 막을 방법이 없었어요.

 

 이때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일본과 미국, 동남아시아 등 태평양 일대에서 벌어진 전쟁을 태평양전쟁이라 명칭. 일본의 기습공격에 엄청난 대형 항공모함를 비롯한 수백 대의 전투기가 파괴되면서 미국 군대의 전투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다음날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의회에 전쟁 참여의 동의를 요청. 더 이상 일본군의 진격을 허용하면 안된다는 단호한 미국이 반격을 시작하면서 1942년 미국과 일본 두 나라의 산호해 해전에서 벌어진 항공모함 대결은 막상막하로, 결정적인 승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승패가 중요해졌어요.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습격과 산호 해전 등으로 항공모함과 전투기 피해가 컸던 터라 어떻게 일본의 막강한 항공모함을 막을지가 최대 고민이었죠.   

 

 이후 연이은 대규모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은 세계 최초로 사용된 원자폭탄이라는 잔혹한 무기로 패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떨어지면서 도시는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고요. 일본은 수도 도쿄를 비롯해서 전국 곳곳이 폐허가 되고 거리는 사상자들로 가득. 결국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일본은 전쟁에 대한 책임 처벌과 미국군 지휘, 감독아래 헌법이 개정되는 수모를 겪으며, 그럼에도 페허의 땅에서 일본은 다시 세계가 인정하는 경제대국으로 세계평화의 상징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세계 최고의 기술력으로 일궈낸 경제성장은 대단하지만 여전히 일본 교과서 왜곡, 묵묵부답인 위안부 문제, 지난 독도의 날 자체 제작한 동영상 파문 등 피해국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는 뒷전인 태도는 우리가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불편한 심기는 감출 수 없네요.

 

 

 

                                             

  <일본사 연표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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