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 / 현암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장장 500페이지에 걸쳐 쓰인 내용은 퍽 단순하다. 주인공 프라츠 요셉 무라우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보고 온 이틀 후 부모님과 형의 사고사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른다. 이렇게 단 사흘 동안의 기록이다. 그 사흘 동안 주인공은 과거에 대한 회상, 주변 인물 및 주변 세계에 대한 관찰과 기록으로 500페이지를 채운다.

나쓰메 소세키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소멸’의 무라우 역시 부잣집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독문학을 가르치며 ‘정신적인’ 세상에 몰두하며 살아간다.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혐오’ 그 자체다. 특히 그의 혐오는 가족을 향할 때 절정에 다다른다. 나치의 수하로 살아왔던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의 인형으로 살아가는 데 만족한 두 여동생, 그리고 정신적인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단순하기만 한 형- 이런 가족과 그들이 살고 있는 고향집 ‘볼프스엑’에 대한 혐오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볼프스엑이 우리 가족의 손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오로지 이익을 챙기는 일에만 신경 썼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생산지, 즉 농경지-지금도 2천 헥타르나 된다-와 광산에서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을까, 하는 문제만 생각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재산을 잘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늘 경제적인 이윤 추구 외에 다른 무언가를 도모하는 척하면서 문화, 심지어 예술 같은 것에 관심을 두는 것 같지만 그런 것도 사실 보잘것없어 부끄러울 정도였다. (21~22쪽)


가족 외에 그의 고국인 ‘오스트리아’에 대한 혐오도 굉장하다. 실제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쓴 모든 작품을 저작권법 유효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공연되고 인쇄되거나 낭독되는 것을 스스로 금했다고 하니, 고국에 대한 혐오가 어찌나 컸는지 짐작가능하다. 그런 그의 분신이 주인공 ‘무라우’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이 국가를 증오한다, 나는 이 국가를 증오할 수밖에 없으며, 이 국가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을 것이고, 불가피한 경우라면 절대 필요한 선에서만 관계할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이 국가는 더 이상 국가로 인정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개성을 잃은 비굴함을 종종 입증해 보였고, 매일같이 가능한 모든 장소에서, 가능한 모든 기회에 사회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나라이며, 언제나 하는 말처럼 민주주의 국가라고 떠들어대지만, 실은 가공스럽고 비굴하며 수치심을 모르는 국가이고, 자신의 가공스러움과 비굴함, 수치심을 모르는 철면피함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끔찍함을 대외적으로 자랑하기까지 한다. (341쪽)


가족과 고국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도 엄청나다. 무라우가 좋게 평가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인물들의 특징은 하나 같이 비정신적인 세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즉 물질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 사치와 허영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이다. 문학과 예술처럼 정신적인 활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특히 반(反)정신으로 대표될 수 있는 인물인 ‘어머니’에 대한 혐오는 엄청나다.

하지만 무라우가 혐오하는 세계, 그가 쏟아내는 거짓과 위선, 허영에 가득 찬 인물에 대한 독설이 통쾌하다가도 ‘그런데 이건 좀 아닌 듯’한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었다. 특히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지나치게 이분법적이라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볼프스엑’에 있는 정원사 집단과 사냥꾼 집단을 묘사하는 방식이나 그 집단에 대해 갖는 느낌이 특히 그렇다. 식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이고 동물 사냥이나 하는 사냥꾼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는 다분히 실망스럽다. 게다가 무라우에게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촌과 무라우가 비정신적인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갖는 지나친 선민의식도 계속 보다 보니 조금은 역겨워졌다.

게다가 그가 그토록 절실하게 추구하는 ‘정신적인 세상’은 역시 나치에 협력하며 가문을 지켜 온 부모의 재력에서 비롯된다(이것은 나쓰메 소세키 작품을 읽을 때도 느껴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다. 나쓰메 소세키의 ‘한량’ 주인공들 또한 부모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았거나 일을 특별히 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을 추구할 수 있었다). 무라우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처럼 굳어버린 세계를 도망쳐 이탈리아처럼 자유로운 곳에 머물며 독문학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결국 비싼 집을 구하고, 문학과 예술로 대표될 수 있는 정신적인 세계로 끊임없이 도망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던 것은 그가 그토록 혐오한 ‘볼프스엑’의 부유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무라우가 ‘볼프스엑’을 끊임없이 비난하고, 욕하는 태도에 나중에는 좀 질려버리더라. ‘그렇게 혐오스럽다면 경제적인 지원을 비롯하여 아예 다 끊어버리던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결국 부모와 형의 죽음으로 졸지에 모든 재산의 상속인이 된 무라우는 본격적인 ‘소멸’ 작업에 들어간다. ‘세계가 다시 정상이 되려면 우선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159쪽)’라는 생각으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속 ‘한량’ ‘선비’형 주인공들을 볼 때처럼 ‘무라우’라는 녀석을 보면서 ‘하이고, 그래 너 혼자 고결하신 지성인이다.’라는 생각도 불쑥 들었다. 자기만 잘났다는 거야 뭐야? 이런 심정. 그러나 결국 무라우 역시 자기 자신조차도 혐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나쓰메 소세키의 냉소와 혐오, 까칠함과는 다르다고 느낀 것은 무라우의 혐오는 분노에 가까운 혐오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나약하다는 느낌은 거의 없다. 혐오스러운 주변 인물들 때문에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일은 거의 없는 느낌. 무라우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통해 끊임없이 상처받았다고 서술하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다지 절실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베른하르트에 비하면 나쓰메 소세키는 그래도 인간에 대해 조금은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었구나 싶어지기도 하고. 

이 책에서 언급되는 ‘오스트리아’는 ‘한국’으로 바꿔도 무방할 듯하다. 이 작품에서 무라우가 끊임없이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 또한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기도 한다. 부끄러움이나 자기반성, 수치를 모르는 채, 거짓과 위선, 사치와 허영, 경제적인 것에 모든 것을 바친 삶을 사는 그런 사람들. 덧붙여 자기가 태어난 집과 가족, 그리고 고국을 멀찍이 떨어져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사람에게는 분명 필요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한 번 더 느껴본다.

괜찮은 작품임에도 살짝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고, 초반의 충격이 갈수록 약해졌던 이유는 너무 방대한 분량 때문인 듯하다. 특히 막판에 좀 괴로웠던 이유는 무라우가 지나치게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해서랄까. 250페이지 정도는 덜어냈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점이 조금은 아쉬웠다.


 

사진이란 평소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지 못한다. 누구를 찍든 누가 찍든 상관없이, 사진이란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손상하고 자연을 엄청나게 왜곡하여 인간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24쪽) 

네 아버지는 언제나 겉만 번지르르한 대학 졸업장이 바로 고도의 정신 능력을 보증하는 것이라 생각했단다. 잘못된 생각이지. 나는 평생 동안 이런저런 타이틀을 지닌 자들을 증오했단다. 그런 사람들보다 더 역겨운 것은 없더구나. 대학교수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불편하단다. 타이틀이란 대부분 멍청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뿐이지. 대단할수록 그만큼 멍청하다는 거야.  (42쪽)

네 아버지가 읽는 신문은 ‘오버 오스트리아 농민지’뿐이고 읽는 책이라곤 <회계장부>뿐이란다. 그들은 정기 회원권을 이용하고 있어서 연극을 보러 린츠로 가서는 끔찍한 코미디를 보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단다. 언제나 볼륨을 최대로 올려서 음향이 엉터리로 울리는 브루크너 하우스에서의 우스꽝스러운 콘서트도 보러 간단다. 이 사람들은, 너의 부모 말야, 연극이나 콘서트 때문에 정기 회원권을 쓰는 게 아니었단다. 그들은 삶 전체의 근거를 정기 회원권에 두고 있지, 매일 같이 극장에 가서 끔찍한 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있단다. 엉터리 음향만 울려 퍼지는 역겨운 콘서트를 보는 것 같은 그런 삶을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지. 그들은 나름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란다.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고 삶에 대한 정열이 있어서가 아니라 삶을 정기 회원권으로 예약해 두었기 때문이지, 극장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듯이 그들의 인생에서 엉뚱한 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는 셈이지. 콘서트에서 환호하듯이 살면서 환호할 것이라곤 전혀 없는데도 계속 환호한단다. (47쪽)

그들은 인생 그 자체를 경시하면서 졸업장이나 타이틀만 보고 그 밖의 것은 전혀 보지 않는다. 졸업장이나 타이틀은 거실의 벽에 걸어둔다. 도축 장인, 철학자, 보조 요리사, 변호사, 파나는 집 안에 증서를 걸어 놓고 평생 동안 탐욕스럽게 응시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타이틀이 있는 사람, 이런저런 졸업장을 딴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사람과 교제하고 있다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졸업장을 딴 사람들이나 이런저런 타이틀이 있는 사람과 사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별 망설임 없이 사람끼리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졸업장이나 타이틀끼리 교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터놓고 말하면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졸업장과 타이틀이다. (63쪽)

그들에게서 나는 오늘날의 20대가 얼마나 피상적이며 무분별한 향락 말고는 얼마나 만사에 무관심한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춤을 추지 않으면 그들은 정말 멍청할 정도로 빈둥거렸고, 평생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인상을 주었다. 결국 치명적이 될 이 권태에서 벗어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벌써부터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면서 인생을 완전히 망쳐 버렸고 온통 직업과 여자, 쓸데없는 외형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 머릿속에 든 것이라곤 형편없는 천박함과 특히 앞으로 받게 될 노후의 연금과 자동차 생각뿐이다. (261쪽)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고 만나면 기뻐서 악수를 청하겠지만, 얼마 안 있어 그가 이젠 한낱 멍청이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대개 나이 든 사람은 최소한 그로테스크한 면이라도 있지만, 젊은 사람은 나이 든 사람보다 더 멍청하다. 우리 자신이, 어떤 쪽으로든 발전해 온 것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발전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으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쪽으로든 전혀 발전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지거나 더 못한 것도 없이 그냥 나이만 먹었을 뿐, 정말 어느 한구석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인간들이다. (263쪽)

다른 사람들이 멍청한 표현들을 사용하면 우린 계속해서 흥분하지만, 우리 자신이 바로 이런 형편없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고 감베티에게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한다. (364쪽)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사람들과 악수를 하면서 반감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특히 내 취향과는 분명 거리가 먼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면 나는 항상 그러지 못했으며 그들의 허풍이 역겨웠다. 그들이 입고 있는 값비싼 의상은 틀림없이 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구입한 것으로 지금 그들은 말하자면 마지막 리허설 무대에서처럼, 남들 앞에 과시하기 위해 이 의상을 입고 나와서는 우쭐거리며 대단히 교만을 떨었고, 불쾌한 기분이 들 정도로 자만심에 차 있었다. (372쪽)

사유하는 인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단 한 가지,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입니다. (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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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1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소설에 몰두하는 내공이 깊은 것 같네요. 부럽습니다. *^

잠자냥 2016-02-17 18:01   좋아요 0 | URL
네~ 문학을 좋아하고 소설 읽기를 즐겨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내 서가 속 열린책들' 이벤트를 보며 이웃들 서가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도 몇 권 있지.... 하다가 한 번 모아봤다. 집 책꽂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녀석(?)들을 모아보니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다. 읽고 나서 지인에게 선물하며 넘긴 것도 있고, 책이 늘어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알라딘 중고서적에 다시 판 책들도 있고.... 이런 이벤트 할 줄 알았다면 그러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잠시 떠올랐다.



한 군데 나란히 모아봤다. CD장 위에 모아봤더니 금세라도 쓰러질듯 위태위태하다. 평소에 저 아래칸은 저대로 꽂혀 있고, 위에 쌓아올린 책들은 다른 책꽂이에 꽂혀있던 것들을 임시로 가져왔다. 사진 촬영 후 다시 흩어짐. 다 모아놓고 보니 역시 열린책들은 화려~하다. 같은 시리즈가 판형을 계속 달리하기도 한다. 이건 좀 사실 열린책들에게 불만이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 가운데 가장 아끼는 책들은 줄리언 반스 작품들이다. 줄리언 반스가 요즘처럼 우리나라에서 크게 인기(?)를 얻기 전부터 그의 책을 사봤다. 생각해보니, 반스의 다음 작품은 또 언제 나오는지 열린책들 출판사에 직접 메일을 보낸 적도 있었다. 물론 출판사로부터 친절한 답변을 곧 받기도 했다.


한 권 한 권 출간되어 나올 때마다 반스의 작품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길 바랐는데, 정작 반스를 크게 알린 작품은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바람에 좀 안타까운 심정이 들기도 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다른 사람이 챙긴 듯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신재실 선생 번역본으로 읽은 반스가 내겐 어쩐지 더 익숙하다.


<태양을 바라보며> 라든지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같은 작품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나중에 사서 소장하려고 했는데 그 새 절판되어버려서 무척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렇긴하다. 이 두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싶다. 알라딘 회원들이 중고로 팔기는 하던데... 반스의 인기가 오른 뒤 중고 가격을 좀 터무니 없게 받고 있어서 그걸 사긴 좀 그렇다.... 저 가운데서도 절판된 책이 몇 권 있다.


그리고 재미난 사실은...... 난 책을 읽을 때 겉표지는 분리해서 읽는 습관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 발견한 사실 하나....



이 책도 이렇게 받아서는......



책 겉표지를 걷어내고 읽던 중이었는데!!!!!




<메트로랜드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걸 어쩐담.....



내가 가진 책은 2007년 초판본...


저 사실을 발견하고 열린책들에 메일을 보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전국 도서관에 <메트로랜드>는 <메트로랜드봐>로 꽂혀있을 걸 생각하니 크게 웃었던 기억이난다(보통 도서관은 겉표지를 떼어내고 저렇게 양장 상태로 꽂혀있다. 때문에 도서관에서는 보통 열린책들 책을 찾을 때, 파란색 양장, 노란색 양장, 검은색 양장, 또는 저렇게 회색 양장을 찾으면 된다).


아마도 <메트로랜드>를 여러 사람에게 꼭 보게 하고 싶은 마음에 <메트로랜드 봐> 라고 표기한 게 아니겠느냐고 친구들끼리 우스개 소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으로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시리즈는, E.M. 포스터 전집이다. 전집을 한번에 구입한 게 아니라 하나씩 사 모았더니, 책 판형이 조금 다르고, 책 등의 저 우아한 'F.O.R.S.T.E.R'를 완성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크흑.


<전망 좋은 방>은 두 권이다. 두 권인 이유는 ㅎㅎ 서재를 합치다 보니 저렇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한 권을 보통은 처분하기 마련인데, 포스터니까! 차마 그러고 싶지 않더라. <전망 좋은 방>도 좋긴 하지만, 저 작품들 중 내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모리스>다.



그리고 또 내가 아끼던 시리즈 중 하나는 조르주 심농의 일명 '매그레 시리즈(Maigret Series)' 이 시리즈를 모두 발간한다고 해서 역시!!! 열린책들 하면서 크게 기뻐했는데 중간에 무산되고 말았다. 국내 출판 시장이 그토록 열악하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여전히 아쉽긴하다. 저 시리즈 중 내가 산 책은 사실 얼마 되지 않지만 읽기는 거의 다 읽었습니다(네네. 빌려 읽었...;)


이렇게 돌아보니 열린책들은 참, 그때로서는 다른 출판사에서 선뜻 도전하지 못한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해서 전집으로 내놓는 일을 턱턱, 용기있게 잘도 했다 싶다. 도스토예프스키 시리즈야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아끼는 줄리언 반스도, 포스터도 열린책들이 아니었으면 어찌 알았을까 싶다. 모두 완간되지는 못했지만 조르주 심농 시리즈를 발간한 것도 그렇고....


최근 나온 전집 가운데 탐나는 시리즈는 로베르토 볼라뇨 컬렉션.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전화> 한 권 뿐이지만.... 언젠가는 꼭 갖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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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랑 2016-02-16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서가속 <열린책들>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시리즈를 주로 읽고 소장 했었는데, 잠자냥 님은 애정하는 작가님이 `줄리언 반스` 였군요.
타 출판사에서 지난해 출간된 [용감한 친구들]이 제가 갖고있는 유일한 작품인데, 저도 다른 작품 찾아 읽고 싶어지네요. 특히, 가장 먼저 [메트로랜드 ...봐..] 를 !

잠자냥 2016-02-16 14:50   좋아요 1 | URL
제 기억으로... 저도 아마 베르나르 베르베르로 열린책들을 처음 만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갖고 있는 책은 얼마되지 않지만...

그러고보면 열린책들이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좋은 작가들을 참 많이 발굴, 소개했죠. `줄리언 반스`도 그렇고요. 열린책들에서 나온 줄리언 반스 작품 가운데 <내 말 좀 들어봐>와 그 후속작인 <사랑, 그리고>가 참 재미있었습니다. <메트로랜드>는 반스의 초기작이라 그의 유년시절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랍니다. 언젠가 꼭 한번 <메트로랜드... 봐>요. ㅋㅋㅋ

별이랑 2016-02-16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해주신 작품들은 신간으로는 볼수없는 몸값 귀하신~ 책이 되었네요.
출판사 대표 저자 소개에도 빠져있고... 저작권 계약이 어찌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느긋하게 재출간 기다려봐야겠어요. 일단 재출간 + 중고 저렴이 ^^ 알림 신청은 해놨어요.

잠자냥 2016-02-16 15:58   좋아요 0 | URL
네, 아마도 짐작으로는 판권이 만료되어서 더 연장하지 않은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는 사이 반스는 국내에서 유명해져서~ 중고 가격도 껑충 오르고요. 아쉬운대로 동네 도서관을 이용해보셔도 좋을 듯 싶네요.
 
슈베르트 : 즉흥곡 D.899, 세 개의 소품 D.946 / 베토벤 :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2CD]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외 작곡, 소콜로프 (Grigory Sok / 유니버설(Universal)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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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익숙하고 어찌보면 밋밋하기까지한 슈베르트의 곡들이 이토록 다르게, 이토록 아름답게 들리다니. 모두 소콜로프의 연주 덕분이다. `아름다움` 그 자체인 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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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론
가와카미 하지메 지음, 송태욱 옮김 / 꾸리에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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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오늘날 문명국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하다”라고 이 책은 시작한다. 이 문장만 보면 근래에 쓰인 책인가 싶은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세상에 선을 보인 문장이다. 정확히는 1916년 9월부터 12월까지 '오사카아사히신문'에 소개된 글로, 1917년에 책으로 묶여져 나온 <빈곤론(貧乏物語)>의 서두이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일본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다. <빈곤론>은 그가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이전에 세상에 선을 보인 책이었고 때문에 몇몇 오류도 보인다. 책을 읽다 보면 이렇게 해서 세상의 빈곤이 해결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상주의적인 모습이 종종 보인다. 그럼에도 그 이상주의자의 모습을 보면서 울컥하는 것은 그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이 책에서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빈곤론>은 크게 3장으로 나뉜다. 가와카미는 첫 번째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가를 따져본 뒤 두 번째로 왜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지 연구한다. 끝으로 어떻게 해야 가난을 근본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100년 전의 경제학자들에게 가와카미의 이론이 비판받은 것은 마지막장인 ‘빈곤을 퇴치하는 방법’이 제도적인 방법보다는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는 지나치게 도덕적, 윤리적인 면을 강조한 태도 때문이었다.

가와카미는 가난한 사람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부자에 비해 가난한 사람으로 경제상의 불평등에서 비롯된 가난을 꼽았다. 두 번째는 구휼을 받는 사람(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다른 사람의 자선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사람)으로 이는 경제상의 의존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물질을 갖지 못한 사람으로 경제상의 결핍에 해당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세 번째 의미의 사람을 말한다.

이 책에 따르면 100년 전에도 부의 불평등은 심했다. 가와카미는 영국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당시 영국은 세계 최강의 경제력을 지녔음에도 도시 빈곤층의 비율이 30%에 달했다(경제적 의존과 경제적 결핍에 해당하는 이들). 이는 부의 분배가 공평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불과 2%에 지나지 않는 최고 부유층이 부의 72퍼센트를 소유했다(프랑스는 60%, 독일 59%, 미국 57% 100년 전 기준).

가와카미는 열심히 일을 해도 노동자는 낮은 임금밖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파헤침으로써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의 근면 성실한 태도와 노력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그는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사치스러운 소비를 하지 않는 것과 현격한 빈부 격차를 줄이고 사람들의 소득 격차를 줄이는 것, 마지막으로 각종 생산업을 개인의 돈벌이에만 맡겨두지 말고, 군비나 교육처럼 국가가 직접 담당하도록 경제 조직을 개편할 것을 제안한다.

당시 대부분의 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의 사치 근절을 빈곤의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이 책을 폄하했다. 학자들의 비판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와 사회 빈곤을 폭로한 이 책은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빈곤의 해결이 단순히 ‘사치 근절’처럼 인간의 마음, 윤리적 소비와 윤리적 생산에 호소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와카미 역시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당시 30판이 넘게 팔렸던 이 책을 스스로 절판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많은 경제학자들이 그의 영향으로 경제학자가 되었고 일본의 출판사에서는 그가 스스로 절판한 책을 다시 출판하여 4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부르주아 경제학자였던 가와카미는 <빈곤론> 이후 점차 마르크스주의자로 변모했으며 결국 일본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가 되었다. <빈곤론>에서의 오류를 수정하여 후에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인류의 경제사적 발전과정을 설명한 <빈곤론 2>를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많이 읽혔고, 지금도 여전히 많이 읽히고 있는 책은 이론적으로 완벽한 <빈곤론 2>보다 <빈곤론>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빈곤론>에서 가와카미 하지메의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뜨거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자발적 가난이 아니라 결핍의 공포를 동반하는 진짜 가난한 사람들의 극빈한 삶을 그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가난이 인간의 존엄성을 헤치는 상황을 진심으로 우려한다. 그리고 그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연대와 도덕성 회복을 주장한다. 그런 그의 주장이 담긴 <빈곤론>은 학자들에게는 ‘이상주의적’이라고 비판을 받았을지언정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 절실하게 와 닿는다.

가와카미 하지메라는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졌다. 구제원에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주고 온 사람. 그것도 모자라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입고 있는 옷을 제외하고는 모든 옷을 기부하고 온 사람. 마지막에는 영양실조와 노쇠로 죽어간 사람. 교토대의 교수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가 사회주의자로 찍혀 사상의 전향을 강요받고, 감옥살이까지 하면서도 꺾이지 않았던 이유는 인간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가와카미 하지메의 <빈곤론>이 세상에 선을 보인지 100년이 지난 지금, 세상에는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넘쳐난다. 부의 불평등은 말할 것도 없다. 가난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세계에서 넘쳐난다. 100년 전의 학자들이 ‘이상주의적’이라고 비판했던 그의 주장은 여전히 바보 같은 소리일까. 그래도 나는 인간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사회 제도 보다도 그 제도를 만들어냈고, 그렇기에 그 제도를 고칠 수 있는 인간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의 외침은 10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 책에 따르면 1906년 영국에서는 빈곤 계층 아이들의 학습 능력 및 열악한 신체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식사공급조례를 만들어 의회에서 통과했다고 한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이 역시 의회에 있는 이들이 빈곤한 계층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은 선거를 앞둘 때마다 무상급식을 비롯해 가진것 없는 이들을 위한 복지를 화두로 여야가 싸움을 벌인다. 그들이 정말 빈곤한 계층의 마음을 헤아린 것인지, 그저 표를 얻기 위한 쇼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모든 이들이 차별 없이 복지를 누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하지만 이땅에 과연 그러한 날이 올지........



   학교에 다니는 아동은 몇 명이라도 자유롭게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다. 다만 무료로 식사를 제공받는 아동에 대해서는 위원회에서 그 아동의 가정 실태를 조하하고 그 사정에 따라 무료 제공을 허락하거나 식비의 일부 내지 전부를 납부하게 한다. 아동은 그 사회계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같은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무료로 제공받는 아동과 식비의 일부나 전부를 부담하는 아동을 차별하기 않고 모두 똑같이 대우한다. 따라서 아동들은 서로 그런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100년 전 영국에서 식사제공 조례가 통과한 뒤 블랫포드 시에서 시행된 내용. 가와카미 하지메, <빈곤론>,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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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자유다 - 수전 손택의 작가적 양심을 담은 유고 평론집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수전 손택은 크게 세 가지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심미안을 가진 예술 비평가로, 열렬한 투사로 그리고 작가로. 분류하기 애매한 책들도 있지만 굳이 나누자면 <해석에 반대한다>, <강조해야 할 것>,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우울한 열정> 같은 책에서는 그 누구보다 뜨겁게 예술을 사랑했던 비평가로서의 수전 손택을 만날 수 있으며 <타인의 고통>, <사진에 관하여>, <은유로서의 질병>과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의 제3장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하노이 여행’ 등에서는 다양한 목소리를 억압하는 사회, 집단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폭압에 저항하는 투사로서의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화산의 여인>,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인 아메리카>에서는 스스로 그 어떤 이름보다 ‘작가’로 불리기 원했던 수전 손택의 문학적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문학은 자유다 : At the Same Time (2007)>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굳이 나누자면 어떤 분류에 들어갈 것인가?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에서 유추하기로 문학가로서의 수전 손택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은 그 어떤 분류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모든 분류를 포함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1장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비평가로서의 손택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으며 2장 ‘미국의 야만성’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9.11테러 이후 미국 사회의 파시즘적인 행태(특히 부시행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쓴 소리가 펼쳐지고 있어 ‘투사’로서의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마지막 3장 ‘투쟁하는 독자’는 그녀가 쓴 소설이나 희곡이 실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사회에서 작가의 의무, 작가란 어떤 위치인가, 번역의 의미(와 중요성) 등 문학 전반에 관한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책의 성격상 수전 손택을 처음 만나는 사람이거나, 그녀에 대해서 깊이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적합한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나는 이 책을 2장, 3장 그리고 1장 순으로 읽었는데, 이렇게 장의 순서를 바꿔 읽어도 전혀 상관이 없을 정도로 각 장은 개별적이다. 그렇다면 전혀 상관없는 에세이들을 엮어놓은 산만한 책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러나 각 장을 다 읽고 책을 덮을 때 즈음 머리 속에 그려지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자기 부족에서 떨어져 나오기, 자기 집단에서 나와 정신적으로는 더 넓지만 수적으로는 더 작은 세계에 들어가기. 고립이나 반체제에 익숙하고 편안한 사람’ (p.242 ‘용기와 저항’)으로서의 수전 손택의 모습. ‘저항해 보았자 부당함을 막을 수 없다고 해서, 진심으로 깊이 숙고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행동하는 걸 포기’(p.252 ‘용기와 저항’)하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이다.

'문학, 세계문학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국가적 허영, 속물주의, 강압적 지역주의, 알맹이 없는 교육, 결함 있는 운명과 불운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길이었습니다. 문학은 더 큰 삶, 다시 말해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게 해 주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독서와 내성內省의 가치가 끈질기게 위협 받는 요즈음, 더더욱 문학은 자유입니다.' (p.274 ‘문학은 자유다’)라고 그녀가 말했듯 손택에게 문학은 이 세상의 진실을 향해서 거침없이 나아가도록 이끌어준 세계였고, 문학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1장의 ‘소멸되지 않음’에서 그녀가 찬미한 ‘빅토르 세르주’의 삶에서 수전 손택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오버랩 된다. 자기 자신은 작가로 불리기를 원했지만 작가보다는 거대한 헤게모니와 맞서 평생을 싸운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더욱 확고했던 것까지. 빅토르 세르주의 삶과 묘하게도 닮았다.

베스트셀러를 내놓고 싶고, 문학계의 한 판을 차지하고 싶고, ‘작가’라는 타이틀로 거드름을 피우며 사회의 지식인 노릇을 하고자 하는(혹은 하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들에게도 수전 손택의 문학에 대한 생각과 그녀가 찬미한 세르주의 삶은 ‘작가’란 과연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따라서 문학은(여기서 저는 단순히 그렇다고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자의식이고, 회의고, 양심의 거리낌이고, 깐깐함입니다. 또한(이번에도 역시 그럴 뿐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래고, 자발성이고, 찬미고, 환희입니다. (p.203 ‘말의 양심’)


양심이나 이해관계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자발적으로 나서고 논쟁에 뛰어들거나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의견(도덕주의적인 문구)을 내놓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거기 가 본 적도 그런 일을 한 적도 없으면서 이건 지지하고 이건 반대한다는 식으로. 작가는 의견을 내놓는 기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시를 쓰지 않는다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비난을 받던 미국의 흑인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지요. ‘작가는 주크박스가 아닙니다.’ (p.206 ‘말의 양심’)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행동을 스스로 기록하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적어도’ 혹은 ‘특히’ 미국에서는 실제 사건을 실시간으로 찍는다는 앤디 워홀의 이상이(삶은 편집되지 않는데 왜 삶의 기록은 편집되어야 하는가?) 인터넷 중계에서 당연한 기준처럼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일상을 기록하여 저마다 리얼리티 쇼를 방송한다. (p.183 ‘타인의 고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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