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JUHEA KIM「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문학상을 수상한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2016년 문예지 《그란타>에 단편소설 「보디랭귀지Body Language」를 발표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을 비롯해 수필과 비평 등을 <인디펜던트>를 포함한여러 매체에 기고했고,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최인호의 단편소설 「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2021년, 대한민국의 역사를 장대한 스케일로 펼쳐낸 장편소설 데뷔작 『작은 땅의 야수들』을 펴냈다. 한국의 역사를 전 세계 독자에게 알리는 동시에 자연 파괴, 전쟁, 기아를 맞이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의미 있게살아야 하는지 제시하는 이 소설은 6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으로, 2022년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데이턴문학평화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24년 톨스토이 재단이 주관하는 러시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야스나야 폴랴나상(톨스토이문학상)을 받았다. 전 세계 14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TV 시리즈로 제작 중이다.

첫 소설에서 자신의 ‘뿌리(모국)‘를 다루었던 작가의 다음 주제는 ‘예술‘로 향한다. 2024년에 출간한 두 번째 장편소설 『밤새들의 도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파리를 배경으로 천재적인 발레리나의 사랑과 욕망, 구원을 그린다. 출간 즉시 리즈 북클럽 도서로 선정되었고, <보그> <하퍼스 바자》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 ‘올해의 책‘에 올랐다.
2025년에는 단편집 『세상끝의 사랑 이야기A Love Storyfrom the End of the World』를 출간할 예정이다. 한편 20여년간 비건, 동물보호, 친환경 운동을 이끌어온 작가는 현재 비영리 단체인 한국범보전기금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야생 호랑이와 표범의 한반도 복원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juheakim.com

2년 전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후 무대를 떠난 세계적인 발레리나 나탈리아 레오노바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그를 무너지게 했던 연인들, 끝내 버리지 못한 욕망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가장 높이 올리고 다시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사람들 앞에서 그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길은 재기일까, 또 다른 추락일까.
「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문학상을 받은 김주혜의 두 번째 소설 「밤새들의 도시는 삶이라는 예술에 바치는 헌사다. 시련 속에서도 끝내 품위를 잃지 않는 인간의 숭고함에 대한 비유이자, 깊은 상처를 감내할 만큼 간절한 순간을 지나온 우리 모두의 찬란한 삶에 대한 은유다.

나를 죄인이라고 부르고,
악랄하게 조롱하라.
나는 너의 불면증이었고,
너의 슬픔이었으니.

안나 아흐마토바, <작은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동이 틀 때까지
그 불이 나를 둘러싼 듯하였네.
그리고 나는, 그 눈동자의 색깔을
끝내 보지 못했다네.
모든 것이 떨며 노래하고 있었지.
그대는 내 친구였나, 적이었나?
그때는 겨울이었나, 여름이었나?

안나 아흐마토바, <파편>

보드카를 따른다. 그 맛은 한밤중에 옛 도시로 날아갈 때 느끼는 묘한 간절함과 같다.
동그스름한 비행기 창문 너머의 구름 사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불빛이 찬란히 어른거린다. 그렇지. 백야의 계절이다. 은색 상공에서 점점 낮아져 밤하늘보다 더 밤하늘 같은 육지로 향하다 어느 순간, 별밭으로 고꾸라지는 느낌이 든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후, 천천히 다시 뜬다. 이 도시는 지극히 익숙하면서 동시에 낯선곳이다. 한때 사랑했던 이의 얼굴처럼.
옛사랑과 우연히 마주쳤다고 치자. 공원에서, 아니면 공연장의 오케스트라석과 파테르석 사이 계단참에서 인터미션이 끝나 - P13

기 전에 서둘러 사 온 샴페인 한 잔을 손에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데,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옛 연인의 얼굴이 보인다. 그의 이목구비는 달라졌는데, 변치 않은 표정 때문에 그를 알아본다. 순간, 그사람일 리 없다는 의구심이 손바닥에 가시처럼 박히지만, 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내 받아들인다. 그를 훑어보는 동시에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모습이 어떨지 곱씹는다. 화장은 잘되었는지, 머리는 잘 만져졌는지, 옷을 입고 나오기 직전에 생각나서 굵은 알반지와 귀걸이를 착용했는데, 참 다행이다. 눈을 맞출까, 차갑게 무시하고 지나갈까, 미소를 지을까, 인사라도 건네야 하나,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사이 닳은 대리석 계단 위에서 서로를 스쳐 지나가고, 인터미션의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린다. 샴페인의 김이 빠지는 데 걸리는 것보다도 짧은 시간에 다 끝나버렸다. - P14

진정한 예술가가 무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것은 그의 춤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다.
10시 45분. 신발이 가득 담긴 가방을 챙겨 들고 마린스키로 가는 택시를 잡는다. 차에 탈 때 시선이 간 하늘은 우윳빛 구름을 짙게 드리워, 마치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진주알 안에 있는 듯하다. 광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을 때 이제 막 구름을 뚫은 한줄기 햇살이 피스타치오색의 웅장한 극장을 환하게 비춘다. 그 모습에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가빠져서 하마터면 걸음을 멈출 뻔했다. 근육에 각인된 기억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알고 싶다. 과연 내 기억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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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소설가 이야기 수집가
서울대 국문학과에 진학하여 박사과정을 수료할 때까지 신화전설 민담 소설을 즐겼다. 고향 진해로 돌아가 장편작가가 되었다. 해가 뜨면 파주와 목동 작업실을 오가며 이야기를 만들고, 해가 지면 이야기를 모아 음미하며 살고 있다.
장편소설 『거짓말이다」 「목격자들」 「조선누아르」 「혁명」 「뱅크」「밀림무정」 「조선마술사」 「아편전쟁」, 산문집 『아비 그리울 때보라」 읽어가겠다」 「독서열전」 「원고지」 「천년습작 등을 썼다.
영화 <조선명탐정> <가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천둥소리>의 원작자이다. 문화잡지 1/n을 창간하여 주간을맡았고, 콘텐트기획사 ‘원탁‘의 대표 작가이다.

오래전부터 엄마에 관해 쓰고 싶었다.
내 나이 서른살에도, 마흔살에도, 엄마의 삶이 궁금했다.
그때는 써야 할 이야기가 넘쳤으므로, 엄마는 자꾸 밀렸다. 언제나 내뒤에서 계실 거니까. 이번이 아니라도, 곧 돌아와 쓰면 된다고 스스로를합리화했다. 한번 미루니 두서너 해가 휙휙 지나갔다. 그렇게 나는 장편작가가 되었고 등단 20년이 지났지만, 엄마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며 문장으로 옮기진 못했다.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옮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너무 늦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이. - P8

기다린다는 말이 견딘다는 뜻임을 국민학교 6학년 때 처음 알았다. 단편에서도 썼듯이, 그해 나는 창원시 웅남국민학교에서 마산시 봉덕국민학교로 전학을 했고 폐결핵에 걸렸다. 다행히 전염성은 아니라서 휴학하진 않았지만, 체육 시간엔 언제나 혼자 남아 빈 교실을 지켜야 했고, 달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느릿느릿 걸으며 병이 완쾌될 때까지 1년을 기다렸다. 그때 나는 견뎌야 했다. 친구들처럼 운동장을 맘껏 달리고 싶은바람을 꾹꾹 눌러야 했던 것이다. 점심시간이나 체육 시간에 땀 냄새 풀풀 풍기며 들어오는 친구들을 피해 미리 뒤뜰로 나가 걸었다. 나무와 벤치 사이를 서성거렸다. 기다린다는 것은 견딘다는 뜻이고 견딘다는 것은 ‘혼자‘ 견딘다는 뜻임을 그때 또 깨달았다.
졸업을 며칠 앞두고 엄마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내 가슴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을 곰곰이 들여다보더니, 완쾌 판정을 내렸다. 더이상약을 먹을 필요도 없고, 달리기를 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병원을 나서자마자 집까지 달려가고 싶었다. 버스를 타도 열두 정거장이넘는 먼 길이지만, 그날은 달리고 또 달려도 지칠 것 같지 않았다. 발뒤꿈치를 들고 무릎을 구부리며 엄지발가락에 힘을 실어 달려나가려는 순간, 작은 울음이 뒤통수에 닿았다. 돌아보니, 엄마가 오른손바닥으로 입을 막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견디며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그런 나를 ‘혼자‘ 바라보며 견디고 기다렸던 것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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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말벌을 바깥에 버리고 창문을 닫자 마음이 약간 가라앉은 카헐은 아래층 화장실에서 소변을 한참 눴다. 변기뚜껑을 올릴 필요가 없어서, 다시 내리고 손을 씻거나 씻은척할 필요가 없어서 살짝 의기양양해졌다. 하지만 기쁨은금방 사라졌고, 그는 계단을 겨우겨우 올라갔다.
카헐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어느새 난간을 붙잡고 있었고, 뻣뻣한 몸을 억지로 이끌고 올라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샴페인 탓이 아님을 알았지만 어느새 샴페인을 탓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읽은 끝에 관한 문장이 떠올랐다. 나쁘게 끝나지 않았다면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했다.
그는 침실로 들어가서 셔츠 단추를 풀고 바지를 벗고 누웠지만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결국 눈을 감으니 옷장 문틈으로 비어져 나온 예복 셔츠의 흰 소매가, 뜯지도 않고현관 탁자에 쌓아둔 축하카드 더미가, 사빈이 그에게 굳이 - P48

보여주었던 웨딩드레스가, 그가 결코 갖지 못할 아들들이, 반품할 수 없었던 탓에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상자 안에서 반짝이고 있는 환불 불가 다이아몬드 반지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또다시 아주 또렷하게, 그렇게 뒤늦게 생각이 바뀌었다고, 그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들렸다.




너무 늦은 시간  - P49

저 앞에 작은 만灣이 있고 흰 절벽 아래에 깊고 깨끗한 물웅덩이가 있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양 떼가 다니는 길을 따라서 만을 향해 걸어갔지만 길이 곧 사라졌고 가파르고 무서운 내리막이 나왔다. 그녀가 선 자리에서 전부 다 보였다.
완벽한 깊이의 웅덩이, 바위, 수면 아래 뒤얽힌 거무스름한해초 그녀는 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 만 반대편으로 가서이탄지에서 흘러나오는 갈색 시냇물로 이어지는 다른 길을 찾아냈다. 평평한 갈색 돌을 조심조심 디디며 미끄러운길을 따라가자 하얀 햇살이 내리쬐는 만이 나왔다.
높은 파도에 쓰레기가 밀려들어 왔지만 그녀의 주변은 온통 표백된 돌들이 층층이 쌓여 반짝거렸다. 이렇게 예쁜 돌은 본 적이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발밑에서 델프트 도자기처럼 덜걱거렸다. 그녀는 이 돌들이 얼마 동안 여기 있었을까, 어떤 종류일까 궁금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그녀가 그러는 것처럼 이 돌들도 지금 여기에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한번 살피고 아무도 보이지 않자 옷을 벗고 물가의 거칠고 축축한 돌에 어색하게 발을 내디뎠다. 물은 상 - P60

상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했다.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는 곳까지 걸어가니 미끈거리는 해초가 허벅지에 닿아서 오싹했다. 물이 갈비뼈까지 올라오자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뒤로 누워서 멀리 헤엄쳐 갔다. 바로 이 순간 자신이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어느새 진정으로 믿지 않는무언가를 향해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이제 웅덩이가 넓어져서 바다와 이어지는 곳에 다다랐다. 그녀는 이렇게 깊은 물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더 멀리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꾹 참고 한동안 둥둥떠다니다가 해안으로 헤엄쳐 돌아와서 따뜻한 돌 위에 누웠다. 그때 저 높이 절벽 위에 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햇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살갗이 마를 때까지 누워 있다가 얼른 옷을 입고 가파른 길을 다시 올라자동차로 돌아왔다. - P61

그녀는 그동안 알았던 남자들을, 그녀에게 청혼을 해서그때마다 승낙했지만 결국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은 것에대해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애초에 청혼을 왜 받아들였을까 약간 의아했다. 그녀는 돌아누워서 집 주변 덤불을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오늘 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모든 여자에게 가끔 필요한 것, 즉 칭찬이었다. 뻔뻔스러운거짓말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녀는 칭찬을 자기가 먼저요구하는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 나이에 말이다. 아무것도 배우질 못한 걸까? 그녀는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잠들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끓였다. - P78

뵐의 서재로 갔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또 하루가 거의 지나갔지만 그녀는 어느새 책상 앞에서 그 유명한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 바깥에 넓은 바다와 높은 산, 벌거벗은 언덕이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의 종이 조각들을 보고 거기 적힌 메모를 읽은 뒤 한쪽으로 치웠다. 만년필 뚜껑이 빡빡했지만 결국 열고서 공책을 펼쳤다. 크림색 종이 - P78

를 실로 엮어 만든 새 공책이었다. 그녀는 종이에 만년필촉을 대고서야 손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애킬섬‘이라고 쓰고 날짜를 적었다. 그런 다음 잠시 멈추고 생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했다. 새벽 3시에 다리를 건넜던 것, 꽃이 지고 난잡하게 자란 진달래 덤불. 그녀는 절벽 너머로 몸을 던지던 통통한 암탉을 떠올리고 깔깔 웃은 다음 암탉이 어떻게 길을 건넜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설명하려 애썼다. 그리고 흰 돌들과 따뜻한 물도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글을 쓰다가 분명 뜨거운 돌이 해안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데웠음을 깨달았다. - P79

그녀는 돌 위에 누웠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걸어갈 때발밑에서 돌이 무슨 소리를 냈는지 썼다. 그녀는 절벽 위의 독일인을, 아래의 광경이 어떻게 보였을지 생각했다. 그날 밤 그녀는 체호프의 단편에 나오는 쾌활하고 복잡하며결혼하지 않은 여주인공을 여러 번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많은 사람들이 여기 오고 싶어 한다던 독일인 교수의 말을, 그가 그녀의 케이크를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었는지를 생각했다. 또 그의 성질을 생각했고, 교수의 아내가 그와 어 - P79

떻게 살았을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자땅 위로 흘러드는 빛이 보였다. 햇빛을 보니 자고 싶다는생각이 잠시 간절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제 막그에게 이름과 암을 주었고, 그의 병에 대해서 고심하는중이었다. 그녀가 작업하는 동안 태양이 떠올랐다. 거기 앉아서 아픈 남자를 묘사하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느끼자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또다시 자고 싶다는 생각이 새로이 솟구쳤다 해도 그녀는 그 갈망과 싸우면서 고개를 숙이고 공책에 집중한 채 계속 써 내려갔다. 이미 그녀는 장소와 시간을 절개하여 기후를, 그리고 갈망을 집어넣었다. 여기에는 흙과 불과 물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와 인간의 외로움, 실망이 있었다. 이 작업은 왠지 자연의 힘이 느껴지고 단순했다. 이제 그녀의 주인공은 식욕을 잃었다. 그녀는 친척들을 등장시키고 그의 유언장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그녀는아름다운 아내가 그에게 고깃국물을 주는 장면을 살펴보다가 문득 자신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리에서일어나니 몸이 뻣뻣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흔들리는덤불 너머 도로에 내려앉는 아침을 내다보고 잘 시간이 왔 - P80

다가 가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주전자를 가스불에 얹고 냉장고 깊숙이에서 케이크를 꺼냈고, 기지개를 켜면서이제 그의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 P81

마지막 작품인 「남극에서는 일탈을 꿈꾸던 
가정주부가 오랜 호기심을 실행에 옮기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말을 맞이한다. 평소 남편과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만 하던 주인공은 갖고 싶은 것이 없는지 계속 물어보고, 씻겨주고,
요리해주고, 설거지까지 혼자서 다 하는 낯선 남자를 만나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다. 하지만 작은 일탈은 주인공의 기대와 달리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어둡고 심각하지만 키건은 오히려 엉뚱함과 유머를 더해 서술하고,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잉글랜드의 유서 깊은 소도 - P118

시를 누비며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가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착지에, 눈과 얼음의 땅에 도착한다.
클레어 키건은 이 책에 실린 세 작품을 통해 남녀 관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불균형한 권력관계, 엉뚱한 결말에 도달하는 작은 호기심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그 결말은 씁쓸하거나, 귀엽거나, 섬찟하면서도 왠지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끝까지 읽는 순간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 싶어진다는 점은 아마 똑같을 것이다. 처음 읽을 때에는 작가가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짐작할 수 없어서 더듬더듬 길을파악하는 데 몰두하지만 두 번째로 읽을 때에는 이미 지났던 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꽃을, 조그만 웅덩이를, 따끔거리는 가시덤불을 가만히 서서관찰할 수 있다. 키건과 함께하는 산책은 평탄하지만은 않지만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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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이 책의 처음에 적힌 필립 라킨의 시 한 줄을 끝으로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시작된다. 그리고 여기 실린 세 편의 소설을 끝으로 우리의일상은 계속된다. 그래 한쪽 눈을 뜨면 옷장만큼이나, 언제나, 굳건히, 눈앞에, 서 있는, 그것. 소설을 빌리자면 크게 그것은 흙과 불과 물일 것이고, 작게 그것은 남자와 여자와 인간의 외로움, 실망일 것이다. "분필과 치즈만큼이나 전혀 딴판인 한쪽의 이야기. 한쪽이 사라져야 한쪽이 살아나는 이야기. 이거 너무 단순한 구조 아닌가 해도 클레어 키건의 터치는 그 컬러를 흑과 백이 아닌 회와 회로 붓칠하는 데 능숙함이 있고, 이거 너무 자명한 사실 아닌가 해도 키건의 필치는 그 사유를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게 흘러가게 하는 데 탁월함이 있다. 작가는 말한다. "수신자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똑같은 산더미 같은 편지를 쓰는 일"
이 삶이라고 지루한가, 따분한가 하여 온통 잿빛인가. 그럼에도 저기 매일같이출퇴근하는 사람이 있고 글쓰기의 충동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고 밥과 빨래를쉬지 않는 사람이 있다. 지극히 평범한 그들이 더없이 성실한 이유는 "얽히고설킨 인간의 싸움과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 이미 아는 사연일 터다. 그냥 너무현실적이라고? "우리 둘 다 앞으로 젊어질 것은 아니지 않는가!_김민정(시인)

클레어 키건이 간결하고 섬세한 문장을 쓴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얼음처럼 차가운 문장 같지만, 그 속은 온갖 감정들이 요동치며 들끓고있다. 때로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선명하게 드러낼 때도 많다. 얼음 속에서 끓고 있는 물처럼. 짧은 분량인데도 장편소설 못지않은 감정의 격랑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 역시 문장 하나하나가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클레어 키건은 문장을 꼼꼼하게 다듬고 날카롭게 벼린 다음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놓은 남성의 세계를 해체하려 한다. 클레어 키건은 문장으로 싸우는 사람이다. 그 싸움을 응원하고 싶다. 김중혁(소설가)

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 Aub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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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랬나. 케이팝과 응원봉의 물결을 보며 축제 같다고.
그런 면도 물론 있지만 이 집회의 가장 깊은 근원을 나는 그 순간에 본 것 같았다. 슬픔. 저마다 지닌 것 중에 가장 빛나는 것을 가지고 나간다는 그 자리에 내가 바로 그것을 쥐고 나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무사를 바라며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 남아 밤샘 집회를 하고 있다.
눈 내린다.
파주에도 서울에도 - P85

공식 집회가 끝나고 나는 자리를 떴지만 많은 이들이 어젯밤, 한강진 관저 앞을 떠나지 않았다.

‘한강진 대첩‘과 ‘키세스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아침뉴스를 통해 그들을 보았다. 서울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날 사람들 몸을 덮은 은박 담요 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전날처럼 또 누군가는 남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그런 모습으로 밤을 보낼 줄은 몰랐다. 그렇게 다시 서로를 돕고 살피며 밤을 보낼 줄은.
남태령 이후로도 이런 사건을 목격했다는 것은 이 나라 구성원으로서 내가 누리는 복일까.
도대체 이 마음을 어떻게 글이나 말로 정리해야 할지모르겠다.
너무 미안하고.
놀랍고.
고맙고.
그리고 미안하고,
고맙고. - P87

1월 15일 오후 여섯시 칠분
윤석열이 오늘 한남동 관저에서 체포되었다. 오전 열시삼십칠분.
그를 체포하러 공수처가 들고 간 수색영장에 ‘내란우두머리‘로 죄명이 기록되어 있다. - P98

목적이 뭘까.
뉴스를 읽고 보는 동안 어리벙벙해 계속 생각했다.
이 폭동이 자기들 목적에 어떻게 이로울 수가 있나, ‘국민의 저항권‘(저항권이야, 씨발)을 운운한 모양인데 어떻게 이토록 멍청할 수가.
영상 뉴스를 끝까지 보기가 어려웠다. 떼로 모여 바글바글 들끓는 것 같은 뒷모습들을 보며 여러번 껐다 말았다했다. 그 폭력들이 화면을 넘어 바로 곁으로 다가오는 것같았다. 법원 안을 뒤지고 돌아다니며 구속영장을 발부한판사의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가 너무 끔찍했다. 그 말투, 그 거리낌 없음, 그 오만함, 반드시 찾아내 치명적 상처를 입히고 말겠다는 적의며 앙심. 굳이 책상을 밟고 올라가 사무용품들을 내던지고 발로 차는 모습도 그 모든 게 내게는 정치적 입장의 표출이 아니고 어떤 욕구를 충족하려는 영역 표시로 보였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세상에 그 모습을 흩뿌리는 것 외에 목적이랄 게 없는 파괴들. - P101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 중 절반 이상이 이삼십대 남성이라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 같은 세대 여성들이 이 나라 민주주의와 헌법을 지키려고 추운 날 거리를 돌아다니고 서로를 돌보며 밤을 새우고는 할 때, 저들은 비틀린 세계인식과 자아 인식으로 국가기관인 사법부에서 난동을 부렸다. 대가를 치를 것이다. 동시에 이 광경을 봐야 하는 사회구성원들도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그들에게 그렇게 해도 된다고 가르쳐온 걸까. 1월 19일 새벽, 우리 사회가 그간 육성해온 일부가 크게 자라나 이 괴상망측한 열매를 거뒀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다, 이것도 과정이지, 결과도 아닐 것이다.
젊은 남성들의 이 고집스러운 고립이 징그럽다.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냉소와 혐오와 자기연민과 기만으로 가득한그들이 놀이 삼아 자신과 타인의 삶을 조롱하고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이제 더 보고 싶지 않다. 불법 계엄이라는 국가폭력이 그들과 너무도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스펙트럼으로 이 내란을 보면 윤석열이 그들의 일면이기도 할 테니까. - P102

2월 27일 목요일 오후 여덟시 오분
지난 2월 25일.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탄핵 재판의 최후 변론이 있었다. 국회 측 대리인인 장순욱 변호사의 최후 변론이 내게무척 아름다웠다. "오염"이라는 말로 내 상처의 원인을 부드럽게 짚어주는 것 같았다. 말헌법의 오염. 바로 그것을 내가 견디기 어려웠다. 정확한 말이 건네는 위안을 받았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피청구인은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언동을 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말했습니다. 헌법을 파괴하는 순간에도 헌법 수호를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헌법의 말, 헌법의 풍경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이 노랫말처럼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리도하루 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그 첫 단추가 권력자가 오염시킨 헌법의 말들을 그 말들이 가지는 원래의 숭고한 의미로 돌려놓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국민과 함께 이 사건 탄핵 결정문에서피청구인이 오염시킨 헌법의 말과 헌법의 풍경이 제자리를찾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 P112

3월 7일 금요일 오후 여섯시 이십오분
윤석열의 구속이 취소되었다.
지귀연 판사,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5부 재판장.

어제는 경찰 쪽에 윤석열 라인이 대거 승진했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오늘 법원에서 이런 판결이 있으니 몹시 불안하다. 사람들이 어떤 노력을 해 그를 구속했는데, 한 판사가, 전례 없고 법에도 없는 방식으로 구속 기간을 ‘날‘이 아닌 ‘시간‘으로 셈을 해 그를 석방하기로 했다. 각종 뉴스에 출연한 법조계 사람들도 이유를 몰라 당혹스럽다는 반응이다. 이 상황을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시민들의 불안이 얼마나 큰가. 사회를 향한 이 불신의 값을 누가, 어떻게 치르나. 그저 한때 공부를 잘해 그 자리에 들어간 한 사람이, 한사회 시스템과 공동체의 정서를 이렇게나 뒤흔들고 있다.
계속, 계속.
이것 봐. 나는 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싶은 사람도 아닌데. 시스템이 고루하다고 믿는 입장이고,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인데. 이 시국의 몇몇 사람들이 내게 다른 입장을 - P113

가능하지 않게 만든다.

읽을 책을 고르려고 책장을 넘기다가 우연히 본 문장. "연결성이라는 사슬로 이어져 모두가 동등하다." 나도 이런 말을 쓰고 싶다. 이런 시선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인간을 향해 돌돌 구부러드는 생각은 접어두고, 보고 듣는 것만을, 찰나의 생각만을 기록하며, 삶이 내게 주는 감각을 편견 없이 흠뻑 음미하고, 그렇게 살고, 쓰고 싶다. 그런데 자꾸 더러워진다. 산다는 건 결국 더러워진다는 것이지만, 더러운 도랑물을 마시며 사는 것이지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물줄기, 다른삶에서 내 삶으로 흘러드는 물을, 타인의 삶에서 흘러나온피가 스며든 도랑의 물을 내 도랑의 물로 받아 마시며 사는 일이고, 그래서 내가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삶이란 끊임없이 더러워지는 일이지만.
이런 오염은 싫다. - P114

이름들을 기록해두고 싶다.
윤석열, 한덕수, 최상목, 심우정, 이제 지귀연.

공부를 잘한다는 건 뭘까. 내란 이후로 엘리트 카르텔과 부패의 면면을 이렇게 속속 확인하고 보니 이 사회의 ‘공부‘가 틀렸다는 걸 새삼, 정말로 뼈가 아프게 알겠다. 이제 이 사회에서 어떤 이가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건, 그를 양육한 보호자들에게 경제적, 문화적, 인적자원이 충분했다는 것 말고,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그가 구속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안심되는 일이었는가를 오늘 알겠다. 윤석열이 구속되고 내가 꼬박 이틀을 잤다. 계엄 이후로 오늘이 가장 불안하다. - P115

3월 10일 월요일 오후 세시 사십이분
윤석열은 금요일에 구속 취소가 결정되고 하루도 되지않아 석방되었다. 일주일은 구속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며그 사이에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판결이 있을 수 있다는희망 어린 예측들이 있었으나 그는 석방을 미리 준비한 것처럼 바로 빠져나갔다. 개선장군처럼 퍼레이드를 하며,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초법적 존재들. 초법적 운명 공동체들.
초법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며 온갖 위법한 일을저지른 자들이 법의 보호를 이토록 꼼꼼하게 받아내고 있다는 것이, 내게 너무나 큰 무력감을 안긴다. 이 사회에 강고하게, 혹은 헐겁더라도 분명하게 장벽으로 존재했던 상식, 규범, 법규.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모든 것을 홀로그램인양 관통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걸 지금 매일 목격하고 있다. 저들에게는 저들의 도덕률이 있다. 나머지 다수의 세계가 비난하고 경악해도, 자기들끼리는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주고받고 납득하는, 되니까 되는, - P116

어떤 도덕, 어떤 상식, 어떤 자연율이 저들에게 따로 있다.

윤석열이라는 이름으로 일기를 시작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매일 부르고 싶다.

정신에 척력으로 작용하는 이 괴리를 다스리려고, 고사리 화분을 책상 근처에 잔뜩 가져다두었다. 이게 내 요즘의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보고자, 그런 것을 곁에 두고자하는 욕심으로 고사리를 키우고 있다. 매일 만지고, 물을 주고, 흙 상태를 살핀다. 다바나 고사리가 가장 좋다. 만지면 고불고불한 잎이 종이처럼 사각거린다. 블루스타펀의 제멋대로 뻗친 청록색 이파리들도 그 굴곡이 멋지고 사자 고사리의 애교가 느껴지는 긴 줄기도, 에버잼 고사리의 기세있는 초록도 모두 좋다. 그간 적록색 잎에 분홍 반점이 흩어진 베고니아 잎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게 되었고 필로덴드론 이파리 두장 사이로 새 잎이 올라오는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게 되었다. 스푼 아이비도 한 포트 받았는데 나는 아이비와 관계가 좋지 못해서 잘 클지 좀 걱정이다.  - P117

윤석열의 석방 장면이 내게 그랬던 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안긴 충격이 상당한가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까지 매일 동십자각에서 저녁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다.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는 메시지인 것 같다. 내란에 저항하는 모두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지난 토요일 집회에서는 비상행동 의장단이 단식투쟁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동십자각 앞에서 듣고 눈물이 찔끔 났다. 사람들이 또 몸을 다치는구나. 그게 싫다. 이날 행진은 평소보다 좀 길었는데 김보리는 잘 걷지 못했다.

오늘도 수 차례 가정한다. "탄핵이 인용되지 않는다면" 자,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걸 고민하면서 살아야하겠지. 지금보다 더.

머릿속이 맑지 않다.
제대로 생각하고 싶다. - P120

4월 4일 금요일 시간기록없음
윤석열이 오늘 파면되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 일치로 오전 열한시 이십이분에 선고되었다.

불신과 환멸과 걱정과 불안으로 말라 죽을 것 같던 마음이 단숨에 차올랐다. 세상을 향한 감이 그렇게 또 뒤집혀서, 나는 정말 얄팍하구나, 생각했다. 헌재 앞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을 뉴스로 들었다. "당신들하고 동시대를 산 덕분에 이걸 보았어, 영광입니다." 그 말을 내 집 거실에서 광장의 함성에 보탰다.

그 이름으로 시작되는 마지막 일기가 되기를 바라며 이만 마침.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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