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 처음 서로를 만날 때, 삶이라는 여정을 함께 하는 모습을 단순한 스케치와 너무 심플하다 못해 쏘심플한 문장들로. 가볍게 원나잇 상대로 여겼는데 그 사람이 내게 서서히 집착하기 시작할 때, 그 어리둥절함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난감해했던 이십대 후반에 잠깐 만나다 헤어진 이비인후과 닥터가 떠올랐다. 내게 집이 되어달라고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사람이었기에 이 동화와 겹쳐 떠오른 것. 그 사람은 알코홀릭이 되었지만 인정사정없이 유명해져 떼돈을 벌면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아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 인간과 진득하게 연애를 할 것을. ELO를 온종일 들었다. The whale을 반복적으로 듣는 동안 갓 만들어진 상처 안에서 새롭게 살이 차올라 피고름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할 말이 없어서 그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솔직하게 모든 걸 다 말하고플 때는 언제나 24시간 내내. 혀에 독이 묻은 채찍을 사정없이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구남편은 말하곤 했다. 그러니까 잘못을 저지르지 말고 죄를 짓지 마, 라고 시니컬하게 대꾸했던가. 하지만 그러기로 작정한 건 이혼을 결심할 무렵부터였다. 사랑이라는 말은 심심하다. 사랑을 느끼게 만드는 이들에게조차 사랑이라는 말을 표현하기는 이상하다. 인간은 인간을 만난다. 원가족이 아닌 이상 다른 인간을 만나 지인이 되어 친구가 되기도 하고 지인으로 평생을 지내기도 하고 연인이 되기도 한다. 가족이 되기도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감동을 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내면과 내면으로만 소통을 하고 그 소통하는 시간 동안 자유로움과 기쁨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고 그 당황스러움을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해야 하나 난감했다. 어려서 그러려니 하자, 했지만 속은 온통 뒤집어졌다. 사라져가려는 것들에 허탈함을 느끼는 것도 사치라는 것을 알았다. 내게 있는 이들에게 무심해지지 말자, 다시 다짐했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의 선택과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 다가올 이들에게 마음을 닫는 일도 하지 말자. 친구가 마음이 아프다 했다. 떠나보내는 이의 마음도 아프다 했다. 차갑게 마음의 빗장이 닫히는데 무심하게 마냥 수긍할 수는 없어서 확고하게 말을 하고나니 좀 가벼워졌다. 설거지를 마치고 디카페인으로 커피를 내리고 천천히 마시면서 한 장씩 펼치며 읽고 그림을 보았다. 계시처럼 마음을 쓰다듬어주어 편히 잘 수 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