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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의 서재
  • 탕핑주의자 선언
  • 익명
  • 9,000원 (10%500)
  • 2025-04-01
  • : 440

예전보다 이목을 끄는 신간이 없지만 그중에 간혹 눈길을 이끄는 책이 있다. 물론 관심이 가는 책들은 새 책 목록을 직접 읽으면서 고르거나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며 발품을 팔 때 더 많이 찾게 되지만. 이 책은 전자의 경우를 통해서 알게 된 책이다. 


제목이 탕핑이다. 음? 탕핑이라니? '탕핑'은 드러눕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탕핑주의자'는 '드러누운 사람들'이란 의미다. 드러누움으로써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례적 삶에 저항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애써 일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중국의 젊은이들을 파고들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몇 년전 '욜로'라는 말이 뜰 때가 기억난다. 이것은 지금도 통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지난 부모 세대 아래서 너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며 깨달은 바 있는 청장년층의 의지가 담긴 삶의 패턴이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욜로'적 삶의 연령층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 중 하나인 것 같고. 예를 들면 '인생 뭐 있어?'한 태도 말이다.

그렇지만 탕핑주의자들이 하는 말을 언뜻 생각하면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너무 천하태평 아니야? 게으름을 조장하는 행위 아니야?'로 볼 수 있는데 사회적인 요인들이 더해지면 그렇게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눕는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손쉬운 행동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로, 탕핑주의자들은 오히려 누워버리는 그 순간부터 이미 국가의 외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또 다른 종족집단을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몸을 뉘인 그 땅조차 이전의 국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편제 바깥의 땅이 되어버렸다. 만약 이러한 상태에서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길 원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주권이나 재산권과는 무관해야 하지 않을까?


처음에 '드러눕는다'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떠올린 장면은 전장연의 지하철 파업의 모습이었다. 파업을 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권리를 빼앗겼을 때, 내 목소리를 이웃 또는 사회가 들어주지 않을 때, 애초에 그마저도 권리 영역 자체가 없을 때가 아닐까. 절박함에 나오는 행동의 발로라 생각된다. 도저히 살아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면 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 전장연 파업 때 유독 신문지상에서 본 단어는 그것이었다. '오죽하면 그럴까.' 그들의 파업으로 불편을 겪었을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하철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위해서 턱을 넘어야 하고 더 긴 시간을 돌아서 가야만 한다. 이마저도 모든 지하철에 관련 시설이 존재하지 않고 들쭉날쭉하다. 지하철만 예로 들었지만 다른 교통수단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애시당초 선택권 자체가 없는다는 것이 차별의 시작이 아닐런지. 


몸을 일으켜 문을 나서면, 마치 시시포스의 거대한 바위를 방불케 하는 어렵고도 힘든 일이 될 수 있을까. 영원히 그 문을 나설 수는 없겠지만, 계속해서 걷고 또 걷는다. 밥 먹을 때든, 아니면 잠을 잘 때든 말이다. 잠결에 꿈 속에서도 마치 이미 오랫동안 걸어서 쉬지도 못하는 것처럼, 노동의 의지는 이처럼 우리가 배척하는 노동의 신체 안에 관철된다. 앞서 찾아온 미래에서 우리는 이처럼 치유할 수 없는 가속주의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파업이라는 단어가 낮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 삶이 정상적으로만 흘러가는 경우가 오히려 더 드물었다. 급여를 받지 못해 소송을 걸어야 했을 때가 있었고 집이 날아가 길거리에 나앉아야 했을 위기도 있었다. 대통령의 무능과 아집에 칼을 들었던 촛불집회부터 시작하여 불과 몇개월 전 내란을 일으켜 국가적 위기 또는 재난에 봉착해 '이러다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니야?' 생각하여 국민적 행동을 해야 했던 일까지. 개인적 파업은 사회적 파업과도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드러눕는 행위는 '거부권'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를 확장해서 볼 수도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책에서도 관련한 언급이 나온다. 비단 이는 특정 계층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 전체에서 흘러나올 수 있는 이야기라고 말이다. 


탕핑주의는 어떤 한 사회의 순환로에서 벗어나 발생하는 게 아니라, 모든 고리로부터 발생한다. 탕핑주의는 특정 사회계층과 신분집단의 결별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에서 발생한다. 입시와 일, 보육과 가정을 이루는 것에 대한 거절을 연결시키고자 했고, 그렇게 해서 그것은 자연스럽게 현 질서 하에 억압받는 모든 세대를 연결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강요와 복종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 남성과 여성, 노동자와 실업자, 시민과 농민, 유목민, 건달, 학생과 지식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그리고 그밖의 성소수자들, 노숙인과 마이너스 주택 대출자들을 연결하고자 시도하는 것에 있다. 이보다 더 비밀스러운 협약 속에서 천천히 진행되는 총파업이 또 있을까?


아주 얇은 책이라 짧은 시간 내에 읽을 수 있지만 이처럼 생각을 확장할 수 있다. 특별한 것은 한글 뿐 아니라 한자, 영어로도 실려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독자를 위한 배려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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