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으로 대표되는, 수도사와 기사의 겸업집단인 종교 기사단은 십자군의 산물이다. 수도회와 기사단은 그 밖에도 있었지만, 그 둘을 겸하는 집단은 십자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현상이 제1차 십자군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을 주목했으면 한다. 제1차 십자군을 이끈 제후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프랑스 왕보다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던 대영주들로, 그 봉건제후의부하 기사나 원래부터 주군이 없는 떠돌이 기사는 제1차 십자군 시대에 로렌 공작이나 툴루즈 백작의 군대에 가담해 오리엔트로 올 수 있었다.- P34
제2차 십자군의 실패는 무엇보다 중근동 현지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교도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 사람들은 유럽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프랑스 왕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알고 있었다. 그 양대유력자가 병사를 이끌고 와서, 실제로 적과 싸운 것은 나흘에 불과한짧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전투를 하고는 군대를 물려 돌아가버린 것이다. 유럽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P118
초기 연구자들은 이 성채들의 건축양식이 비잔틴제국 성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얼마 전,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한 연구자가 이에 이론을 제기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중세시대 성을 조사한 뒤 중근동에서의 실지답사를 통해 얻은생각에 기초해 쓴 연구논문에서, 십자군 시대의 성채 대부분이 비잔틴제국이 아니라 동시대 유럽 성채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젊은 학도의 이름은 T. E. Lawrence. 이후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나중에 로렌스는 역사학이 아닌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지만, 그의 주장은 이후의 십자군 연구를바꾸어놓게 된다.- P176
산마르코 광장에 모인 시민들 앞에서 도제 미키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40척의 갤리선, 28척의 범선, 4척의 대형 갤리선으로 구성된 베네치아 함대를 도제가 직접 지휘해 오리엔트로 떠난다. 중근동의 성지를
‘해방‘하고 있는 십자군과 같은 그리스도교도로서 함께 싸우기 위해바다 쪽을 공격할 것이다. 아코, 하이파, 티루스, 아스칼론 등의 항구도시 중 어느 한 곳이, 아니면 그 모든 곳이 전장이 될 것이다. 이 군사행동으로 베네치아가 얻는 것은 공략에 성공한 후 이들 항구도시에베네치아의 교역기지를 설치하는 것이다.
이 군사행동에 필요한 비용은 얼마이고 참여하는 인원은 1만 명이- P218
다. 시민 여러분이 이 군사행동에 대한 찬반을 결정해주었으면 한다.
이렇게 설명한 후에 표결로 결정하는 것이 중세 이탈리아 공화국의방식이었다. 군주국에서는 한 사람만 이런 결정을 하면 되지만 공화국에서는 다수가 결정하기 때문에 항상 설명할 책임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P219
독자적인 거류지를 설치할 수 있는 건 그리스도교의 지배하에 들어간 도시에서만이었다. 같은 중근동에서도 아직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에서는 거류지 같은 것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거류지 설치는 불가능해도 상관을 두는 것은 가능했다. 물론 그 지역의 위정자인 술탄이나 아미르(태수)의 허가를 얻어야 했지만.- P220
3월 13일, 카이로를 떠난 살라딘이 다마스쿠스에 도착한다. 이 다마스쿠스에서 이슬람측은 십자군 시대가 된 후 처음으로, 이교도 배척을소리 높여 외치는 ‘성전(jihad)‘을 선언한다.
‘성전‘은 원래 이슬람교도가 외치기 시작한 말이므로 이슬람 세계의 성직자인 이맘 중에는 이전에도 이를 입에 담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대군을 앞에 두고서 최고사령관인 술탄이 선언한 것은 이때가처음이었다.- P295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십자군이 ‘해방‘하기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린것뿐이었다. 유럽에서 오는 순례를 허용하되, 예루살렘이 이슬람의지배하로 돌아갔다는 것을 유럽에서 온 순례자들이 인정해야 한다는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시대처럼 예루살렘 대주교가 남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지만, 성묘교회에서 봉사하는 수도사들이 남는 것은허용했다. 같은 이유로, 의료에만 종사하는 조건으로 병원 기사단의단원 열 명이 남는 것도 인정해주었다.- P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