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7 에밀리 나고스키.
주석 빼고도 509쪽 되는 이 벽돌책을 나는 꾸역꾸역 읽었는데, 읽다 말다 그렇게 흥미롭진 않았다. 그러다 깨달은 사실은, 그냥 한 번쯤 읽어볼 순 있는데, 나는 이 책이 필요 없었다…
오, 나는 잘 살고 있었구만.
원제는 근사하게도 너바나의 노래 ‘Come as you are‘에서 따온 것 같은데, 번역서가 대놓고 실용서야 이건! 하면서 홀다닥 벗은 제목으로 쫓아오는 바람에 어디 들고 다니면서 읽기는 (사실 두꺼워서) 힘든 책이다. 부제도 조금 책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었다. ‘성적으로 완전한 당신을 위한 책’이라고 해서 완전에 가까운 나는 오해하고 꾸역꾸역 500쪽을 버텼단 말이다. ‘성적으로 완전할 여성을 위한 책’이라고 하면 이 책의 타겟이 누군지도 잘 알려주고, 책의 내용과도 더 연관되어 보인다. 마스터 클래스 아니고 입문자 클래스야 심지어...
같은 번역자가 옮긴 ‘해부학자의 세계’ 간지나 보여서 꽂아만 두고 있다. 그 옆에 빌 헤이스의 해부학자는 올리버 색스 만나기 이전의 책인 걸로 아는데, 언젠가 읽긴 할 것 같고, 공교롭게도 그 옆의 페데리코안다아시의 소설 ‘해부학자’는 클리스토리스의 발견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이것도 언젠가는 읽겠군.
바톤을 넘겨 받듯, 책끼리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이 책 초반부에서 (대부분 자기 긍정 강조하는 성지식이 그러하듯이) 거울 가져다 놓고 음핵 위치를 찾아보고, 성기를 관찰하고 긍정하는 일기 같은 걸 쓰시오! 한다. 일기는 안 써 봤지만 이미 고대에 수료한 과정은 패쓰. 갑자기 해부학 책 쟁여둔 것 중 뭐라도 하나 보고 싶어졌다. ‘운동 독립’이라는 몸 쓰는 법에 대한 책도 조금씩 보기 시작한 참이다. 산만한 새끼야… 그 책 다 보고 다시 돌아왔는데 흠, 역시나 나는 이 책이 필요 없었다.
그래도 이 책이 필요한 사람들은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읽은 중에는 ’당신은 정상이다‘라고 제일 많이 말한 책이 아닐까 싶다. 자기계발서 같은 건 대부분 나약한 놈아, 넌 아직 멀었고 글렀으니까 굴러라 굴러, 하는 느낌인데, 이 책은 자기 긍정을 최선의 목표로 놓고, 그게 성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기는 것 같다.
뭐 그게 맞다. 마스터로서 인정한다. 하하하.
책의 요약: ‘나는 정상이다. 너도 정상이다. 너는 완전 짱이다. 네 스스로가 허락하면 너는 천하무적이다. 네가 속고 있는 너를 쭈그리 만드는 통념은 대부분 뻥이니까 뻥 차 버려라.‘ 그런 걸 뒷받침하도록 뇌과학이랑 심리학이랑 실험연구들이랑 가상의 사례랑 적당히 버무려 놨다.
+밑줄 긋기 (필요없다고는 했지만 밑줄은 오지게 쳐놨다. 나는 이 책이 필요하다고, 궁금하다고 하는 사람에게 줄 생각이라서 그렇다. 살 땐 무거운 벽돌인데 알라딘에 팔아야 커피 한 잔 값이야….)
-성적 행복은 한 사람의 몸이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가 아니라 몸의 주인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듬어 안을 때 비로소 황홀경의 쾌락을 끌어낼 잠재력이 발휘될 것이다. (14)
-혹시 독자가 나처럼 좋은 생각을 혼자만 아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면 집 안에서 배우자의 뒤를 쫓아다니며 ‘네 줄 요약’을 큰 소리로 읽어줘도 좋겠다. “여보, 성적 흥분의 불일치라는 게 진짜 있었어!” “이제 보니 내 성욕은 자발적이 아니라 반응성이었네!” 또는 “당신은 나한테 훌륭한 맥락을 주는 사람이야”라고 말이다. (16, 전문가이야기라지만… 농담이겠지만... 듣는 사람의 뇌로 피가 가는 이성적이고 지식적인 이야기를 건네는 건 너도 나도 시무룩해지길 자초하는 거 아닐까 싶다고...)
-결국 내가 이 책에 담은 정보로 독자에게 말하려는 것은, 성적 흥분, 성욕, 오르가슴, 통증, 성적 무감각 등 여러분이 체험하는 자신의 섹슈얼리티가 실은 이 “부적절한 세상”에서도 적절하게 기능해 온 성 반응 메커니즘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대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망가진 게 있다면 그건 그대가 아니라 그대를 둘러싼 세상이에요. (20, 딴 건 모르겠고 마지막 문장은 잘 알겠습니다…세카이가 헨다!!!!)
-상동기관은 기능이 달라도 동일한 생물학적 기원을 공유하는 형질이다. 남녀 외부 생식기의 각 부위는 상동기관이다. (40)
-상동성은 남매의 가슴에 유두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성의 유두는 인간을 포함한 거의 모든 포유동물의 생존에 필수다.(오리너구리 제외) 그래서 진화는 태아가 발달하는 초기에 서둘러 젖꼭지부터 만들었다. 하지만 이후 태아가 수컷으로 발달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억제하기보다 그냥 두는 편이 에너지가 훨씬 덜 소모된다. 다시 말해, 진화가 게으른 바람에 수컷과 암컷 모두 유두가 있다는 말씀이다. (42, 남자는 왜 젖꼭지가 있을까 라는 검색어로 내 블로그 유입이 잦았던 적이 있는데… 궁금한 인간들은 이 부분을 참고하시오…)
-문화는 단단해진 남성과 젖은 여성을 강조하지만, 실은 남성도 젖고, 여성도 단단해진다. (56)
-“언제 마음이 동하나요?”라는 질문에 여성은 이렇게 답한다.
*매력적인 파트너가 자신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 줄 때
*상대와의 관계에서 신뢰와 애정을 느낄 때
*감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자신감 있고 건강할 때
*상대가 나를 원하며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만들 때
*성애물이나 야한 동영상처럼 노골적인 성적 신호, 또는 다른 이들의 성관계 장면을 보거나 들을 때
그러나 이 답변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텃밭에서 일하다가 막 들어왔을 때는 당연히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있다. (121)
-성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뇌가 “이봐, 이건 성적인 거야!”라고 가르친다. 그건 학습하기다. 이때 적절한 맥락에서는 뇌가 “그거 섹시한데!”라며 좋아하기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자극이 아주 좋은 것이라면 뇌는 “오호, 좀더 해주세요.”가 되는데 그게 바로 원하기다. (140)
-정확히 어떤 맥락을 성 긍정으로 받아들이는지는 사람에 따라, 또 그 사람의 삶의 단계에 따라 다양하다. 그렇더라도 대체로 공통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낮은 스트레스
*높은 애정
*노골적인 에로틱함 (143)
-올바른 맥락에서 일어나는 성적 행위는 인간이 즐길 수 있는 단연 가장 즐거운 경험이다. 섹스는 파트너와 결속시켜주고, 행복한 화학물질로 온몸을 뒤덮으며, 본질적인 생물학적 욕구를 만족시키고, 우리를 영적으로 고양된 상태로 이끈다. 그러나 그릇된 맥락에서 시도된 섹스는 말 그대로 죽음까지 맛보게 한다. 맥락에 따라 섹스는 맛있는 것에서 구역질 나는 것, 재밌는 것에서 고통스러운 것까지 무한한 형태를 띤다. 그리고 액셀과 브레이크의 이중 제어 메커니즘 때문에 때로는 상반되는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기까지 한다. (148)
-투쟁 또는 도피의 이 두 반응은 모두 가속장치를 자극하는 스트레스 반응으로 교감신경계가 내리는 ‘행동 개시!’의 신호에 반응한 결과다. 투쟁은 감정의 절대반지가 스트레스 유발 요인을 제압해야 한다고 결정할 때 일어난다. 반면에 도피는 감정의 절대반지가 스트레스 유발 요인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고 결정할 때 일어난다.
그러나 뇌가 스트레스 요인 앞에서 이건 도망쳐서도, 맞서 싸워서도 살아남을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면? 바로 뒤에서 사자의 이빨이 자신을 무는 것을 느낀 순간처럼 말이다. 이때는 극심한 고통에 의해 부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며 ‘정지!’를 촉발하는 제동 반응이 일어난다. 이 순간 신체는 완전히 정지되어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거나 간신히 최소한의 움직임만 가능한 ‘긴장성 부동화’를 경험한다. 야생에서는 동물이 포식자에게 자기가 죽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땅에 쓰러진다. 스티븐 포지스에 따르면 경직은 통증 없는 죽음을 촉진한다. (185, 싸우다가 죽거나, 싸워서 살아남거나, 도망치거나, 포기하는 것. 생명체의 생명 반응이란 그런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나는 주로 죽을 기세로 싸웠던 거 같긴 하다. 교감신경과활성화상태…)
-자신에게 맞는 전략을 파악할 때까지는 먼저 자신을 억누르는 패턴에 주의를 기울이고, ‘내적 감정’을 온전히 발산할 수 있는 장소와 사람을 찾아라. 어떤 패턴은 중요하고 또 변하지 않는다. 반면 문제를 키우는 패턴도 있다. 사람이 살면서 세상의 평가나 타인을 거스를 일에 신경 쓰지 않고 ‘내적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할 장소가 적어도 한 군데는 있어야 한다. (197, 이것은 성과학 책이 아닌 스트레스 클리닉 책 느낌이지만...그리고 우리에게는 챗지피티씨가 있지.)
-해결책: 몸과 소통하는 일을 하라. “너는 도망쳤고, 살아 남았어!”
*신체 활동
*서로 애정 나누기
*감정 폭발 또는 시원하게 울기
*점진적 근육 이완 또는 기타 감각운동적 명상
*몸단장, 마사지, 네일아트처럼 자기 몸 돌보기 (197-198)
-생식기로 가는 혈류는 어디까지나 성과 관련된 자극에 반응하는 학습하기로서, 좋아하기나 원하기와는 다르며, 더군다나 동의와는 거리가 멀다. (341)
-섹스가 충동이 아니라는 건 쉽게 증명할 수 있다. 1956년에 동물행동학자 프랭크 비치가 말한 것처럼 “섹스의 결여로 세포조직이 손상되는 사람은 없으니까.” 쉽게 말해 섹스를 못 해서 죽은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물론 죽고 싶을 수는 있다. 그건 좌절감이다. 하지만 좌절이 절대적으로 죽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섹스가 충동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섹스는”인센티브 동기 부여 시스템“이다.
많은 사람이 ‘인센티브’하면 일을 하고 싶게 만드는 보상과 연관 짓는다. 생물학적 의미도 비슷하다. 만약 불편한 내적 감각 때문에 떠밀리는 게 충동이라면, 인센티브 동기 시스템은 매력적인 외적 자극을 향해 끌어당겨지는 것이다. 호기심은 이런 시스템의 전형적인 예로서 허기만큼이나 자연스럽지만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충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생존‘을 생각하라.
’인센티브 동기 부여‘라는 말을 들으면 ’더 잘 사는 것‘을 떠올려라. (356-357)
-‘왜 다른 사람과의 섹스를 꿈꾸는가’에서 에스더 퍼렐은 현대인의 인간관계에 내재된 핵심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익숙함과 새로움, 안정감과 신비감처럼 서로 반대되는 것들끼리의 밀고 당기기다.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사랑은 안심과 안전과 안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열정도 원한다. 열정은 모험이고 위험이고 새로움이다. 사랑은 가진 것이고 욕망은 원하는 것이며, 우리는 자기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것만 원한다. 퍼렐은 장기적인 사랑이 장기적인 열정과 반대라서 문제가 되는 거라면, 서로에게 자율성을 주어 원하기가 발생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고 내면의 에로티시즘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퍼렐은 “욕망 안에서 우리는 저만치 건너갈 다리를 원한다“. 즉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어 상대와의 관계에서 불안정성과 불확실성, 약간의 즐거운 불만족감을 키우는 것이다.
(고트만의 연구) 결과(는 에스더 퍼렐과 반대로) 훌륭한 성생활을 유지하는 커플은 한결같이 ”1) 서로 친밀하게 교감하며 신뢰 깊은 우정을 유지하고, 2) 두 사람이 함께하는 삶에서 성관계를 우선순위에 둔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성욕을 유지하려면 건널 다리가 필요한 게 아니라 함께 다리를 지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트먼은 ”서로의 욕구를 향해서 나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퍼렐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너도 옳고, 너도 옳다고 말한다. 황희정승이냐)
(359-360, 진작에 읽은 책-여기에선 퍼렐의 책-이 가끔 인용되는 걸 보면 반가우면서도...난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구나...이제 하산 좀 하자 싶다…)
-오르가슴이 아닌 세 번째는 우열이다. 모든 오르가슴은 그저 서로 다를 뿐, ‘올바른’ 유형도, ‘더 나은’ 종류도 없다. 심지어 오르가슴에 종류가 있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게, 결국 모두 같은 부품(성적 긴장의 갑작스러운 방출)이 다른 방식으로 조직된 것이기 때문이다. (401, 그리하여 진짜 가짜 타령은 그만해도 될 듯...)
-오르가슴의 가치는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고, 어떤 임의의 기준을 충족했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그 오르가슴을 좋아했는지, 또 원했는지로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즐거움이 곧 오르가슴의 척도다. (403)
-변화의 대상은 세 가지다.
*이 목표가 나에게 맞는가?
*목표 달성을 위해 적당한 수준의 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목표 달성에 필요한 노력의 양을 현실적으로 파악했는가? (416-417)
-좌절은 오르가슴이라는 목표에 가까워지지 못했다고 감독관이 판단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임을 기억하라. 그럴 때면 내 목표는 오르가슴이 아니라 즐거움이고 내가 즐거웠다면 목표를 이룬 거라고 되새기면 된다.
오르가슴은 목표가 아니다. 목표는 즐거움, 즉 쾌락이다. (417, 다들 메모장이나 가슴팍에 새겨 넣읍시다. 나는 궁서체로 ‘즐거운 생활’이라고 문신 새겨 넣고 싶지만, 안 그래도 될 만큼 미리 알아서 다행입니다...)
-여성이 경험하는 ‘끄기’의 대부분은 섹스와 상관없다. 그리고 의외로 간단하고 현실적인 해결책이 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 실컷 울기, 산책, 감정 폭발, 기타 신체적 발산을 통해 주기를 완료한다. 하루 중 20분에서 한 시간 정도 자신에게 투자해 목욕, 산책, 운동, 요리, 명상, 요가, 와인 한 잔 등 그날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나만의 의례를 치른다.
거실 복도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자꾸 신경이 쓰이는가? 다른 식구들이 없는 시간에 잠자리하면 된다.
피곤하다고? 낮잠을 자거나 20분쯤 휴식을 취한다. 침대 시트에 묻은 모래 때문에 짜증이 난다고? 시트를 갈아라! 발이 차가우면? 양말을 신는다! 때로는 정말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물론 앞서 나왔던 것처럼 훨씬 더 복잡하고 장기적인 해결이 필요한 ‘끄기’들도 있다. 자기비판적 사고나 신체 불만족의 문제, 신뢰가 부족한 관계, 과거의 트라우마, 성적 혐오 같은 것이다. 당신은 지금의 정원을 만들기까지 수십 년에 걸쳐 씨를 심고 식물을 돌봤다. 따라서 하룻밤 만에 전부 바꿀 수는 없다. 천천히 나아가도 괜찮다고 다독여라. 지금의 자리에서 목표 지점까지 차근차근 밟아가며 앞으로 나가는 모든 발걸음을 기념하라.
끄기를 끄는 연습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 자기 친절이다. (430-431, 발이 차가우면 양말을 신으라는 게 가장 실용적이었다.)
-연구 결과 범불안장애가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불안 증상의 영향을 덜 받는 참여자들은 다른 참여자에 비해 증상의 빈도와 강도가 특별히 더 낮거나 자신의 내적 상태를 더 많이 인식하지 않았다. (즉, 관찰 요인) 다만 그들은 판단을 덜 했다! 불안이 한 사람의 삶에 지장을 주는 것은 불안 증상 자체보다 그 증상에 대한 본인의 느낌이라는 뜻이다. 즉, 자신이 느끼는 것에 대한 느낌. 그리고 자기감정에 대해 판단하지 않을수록 더 잘 지냈다. (459, 내 가장 친한 친구는 나 스스로 어떤 상황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맥락을 말하면 그러면 안 돼? 하고 묻는다. 대부분의 곤란이 그 상황에 대해 내가 내린 판단이 키운 것이 많다는 걸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판단하지 않기가 도움이 될 다섯 가지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유 없이’ 생기는 감정, 트라우마 치유, 통증의 해결, 쾌락의 증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에 대한 애도. (460)
-내가 “비정상”이라고 단정하는 성적 경험은 딱 두 가지다. 합의 없는 섹스와 원치 않는 통증을 유발하는 섹스. 그 외에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즐겁고 언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면 무엇을 하든 정상이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감각을 즐긴다면 무엇을 하든 정상이다. 그러나 섹스로 인한 원치 않는 통증-삽입 시 통증, 생식기 접촉의 통증 등-은 정상이 아니다. (467, 이 책에서 400페이지 넘게 정상이다를 외치다가 처음으로 비정상이 뭔지 짚은 부분이라 옮겨 적었다. 그렇단다.)
-통증의 속성에 대한 초간단 지침 한 가지.
기본적으로 모든 통증은 위협이 존재한다는 몸의 신호에 뇌가 반응한 결과물이다.
통증은 뇌가 위협을 지각했고, 몸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문화가 부여한 기준 속도 대신, 섹스에 관해 가장 정확한 지식을 줄 수 있는 자신의 내적 경험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몸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뇌의 신호가 들리고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469)
-진실은 이렇다. 쾌락은 가장 온전하고 진실된 인간됨에 가까워지기 관한 관문이다. 쾌락은 자기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제약 없이 연결되는 곳이다. 왜일까? 쾌락은 수치도, 사회적 수행도, ‘마땅히 해야할 것’에 대한 의무도 없이 완전하고 온전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안전한 맥락에서만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황홀경은 우리를 기쁘게 하지 못하고 호기심에 불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모두 뒤로했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 황홀경은 무조건 쾌락에 굴복할 때 찾아온다. 쾌락을 좋아해도 된다. 그 첫 단계는 쾌락을 판단 없이 인식하는 것이다. (472-473)
-“정상이라는 기분은 곧 소속되었다는 기분이다.”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에 속하려고 애쓰잖아.” 우리는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공유된 영역의 경계 안에 자신이 안전하게 머물고 있고, 제 지도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의 지도에 있는 것과 같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한다.
지도에 없는 곳에 자신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러니까 자기가 각본도, 기준틀도 없는 일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길을 잃은 기분이 든다. 미지의 영역은 위험하고 안전하지 않다. “나는 위험해!”다. 그러면 스트레스 반응이 시작되어 이기 팝이 울리는 상자 속 쥐가 된다. 모든 것이 잠재적 위험일 뿐이다.
하지만 이떄 누군가가 와서 “당신은 괜찮아요. 전 제 지도를 따라 여기에 와봤어요. 여긴 확실히 우리 영토예요”라고 말해주면 마음이 한결 놓인다. 아직 집에 잘 연결된 채로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 소속되었다.
사람들이 내게 “정상인가요?” 라고 물을 때, 그들은 “‘제가 잘 속해 있나요?”라고 묻는 것이다.
물론 내 대답은 “예”다. 당신은 당신 몸에 속해 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속해 있다. 세상에 태어난 날부터 당신은 이곳에 속하게 되었고 여기가 당신 집이다. (홈 스윗 홈) 외부에서 강제되는 성적 기준에 순응해야만 소속되는 게 아니다.
목표점을 “정상”에서 “내가 속한 곳이면 어디나”로 바꾸면 당신은 이미 그곳에 와 있으므로 늘 목표를 달성하는 셈이다. (478-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