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7 샘 킨.
같은 번역가가 옮긴 과학책을 최소 열 권 이상 읽었거나 소장 중이라면, 번역가 팬덤 같은 것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노승영 번역가 책이 거기 해당하는 게 조금 더 많긴 한데, 과학책 중에는 이충호 번역가가 옮긴 책도 제법 많이 읽고 또 쌓아 놨다. 수학, 과학 과목에는 영 소질이 없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내 독서에 가이드가 필요한 것 같다. (믿고 읽는 000선생님 같은 것…) 국경 건넌 문장과 단어를 새로 쓰는 방식에 대한 선호도와 호불호도 영향이 있을 것 같다.
‘사라진 스푼’은 화학과 원소에 관해 제법 많은 걸 알려주고, 또 재미까지 갖춘 화학사 책이었다(다른 작가의 책 ‘원소의 이름’은 그보다 더 어렵고 재미도 덜하고 심지어 두껍다). 샘 킨의 책은 그것 말고도 번역된 게 제법 있는데, 살까 말까 고민한 게 이 ‘과학 잔혹사’였다. 결국 구매욕을 억누른 끝에 전자책 빌려 읽고 히히 돈 굳음, 했다. 안 사길 잘했네...
책의 결론을 읽기 전까지는 자주 의문이 들었다. 다소 잔인하고 선정적으로 읽히기까지 할 과학사의 어두운 이 이야기들을 뭉텅이로 몰아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요신문 같은 데 나온 정치가의 비밀 폭로나 사생활 의혹 제기 같은 기분이 자꾸 들었고, 과학자의 범죄와 사기로 인해 고통 받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저 흥밋거리로 소비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읽으면서도 찜찜했다.
그런 우려를 의식했는지, 샘 킨은 책의 말미에 미래에 예측되는, 혹은 상상할 수 있는 과학 관련 범죄를 사례로 들면서, 과학 연구 시작 단계부터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쓴 것 같은) 과학사의 흑역사를 스토리텔링 형태로 생생하게 읽는 것이 과거 저질러졌던 수많은 과학 관련 범죄들과 같은 일을 그나마 줄일 수 있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흠.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 그렇다면 책 머리에 먼저 그런 의도를 밝히고 독자가 읽게 했으면 독서의 방향이 더 명확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는 순간 (뒤의 부분은 당위와 교화가 대부분이니까 당연히 재미가 덜 하다) 책 앞부분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많았겠지. 결론을 서문으로 바꾸고 여기가 제일 재미없는 부분이야, 참고 좀만 더 읽어 봐, 하면 좀 나으려나? 책 쓰기란, 책 만들기란, 어려운 일이다.
2018년도에 작은어린이 낳기 직전까지 읽던 책이 ‘시체를 부위별로 팝니다’였고, 아이 낳고 조리하는 동안 그 책을 마저 읽었다. 임신 기간 중 미국 드라마 덱스터 시리즈를 정주행하고,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도 프로메테우스니 커버넌트니 하는 걸 다 봤으니… 그렇지만 우리 어린이는 그럭저럭 잘 자라고 있고, 내가 뭐 응보적 연쇄 살인범이 된 것도 아니고, 영화 속 외계인 같은 걸 내 생애 동안 만날 가망성은 0에 수렴하는 걸 알고… 그냥 취향이지, 취향. 하여간에 ‘시체를 부위별로 팝니다’에서 이미 다뤘던 시체 도둑 이야기가 이 책에서도 제법 등장했다. 이 책의 원제 ‘얼음 송곳을 든 외과 의사’(The Icepick Surgeon)에 해당하는 안와에다 송곳 밀어 넣어 하는 뇌 절개술 등장하는 부분이 이 책의 클라이막스 같기도 하고(가장 충격적이고 아야 내 뇌… 내 뇌가 아픈 기분이다), 역시나 뇌절제 수술을 받았던 HM을 다룬 책(‘영원한 현재 HM‘)이 관련 연구자 입장이 반영되어 최대한 훈훈하게 쓰였구나, 싶기도 했다. 젠더에 관한 책을 많이 읽다보면 피할 수 없는 브루스-브렌다-데이비드의 슬픈 이야기도 다시 봐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책을 보고 과학자의 이미지를 모두 매드 사이언티스트나 악마처럼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냥 과학과 과학자를 맹신하지 말고, 또라이 총량의 법칙처럼 어느 집단이든 일정 비율의 또라이는 존재하므로 경계를 늦추지 말자, 상호 감시, 윤리 교육, 뭐 이런 바람직한 걸 들이미는 건 가치가 있긴 하겠다. 그렇지만 정말 일정 비율 이상의 진짜 또라이 나쁜놈은 그런 체로도 걸러지지 않을 테니 그냥 내 일상이, 내 건강이 그런 재수 없는 가짜 전문가에게 걸리질 않길 바라는 확률 게임일 뿐인가, 싶어 무기력한 기분도 들었다. 일반인이 아무리 특정 분야 과학이든 의학이든 이해해보려 해도 사실 고등학교 과정을 심화로 배우는 것조차 힘들단 말이다… 나 생명과학 삼 년 해서 5등급이던게 겨우 4등급 되었다고... 인류를 생각하면 나새끼 과학 안 하길 잘했네…
+밑줄 긋기
-프랑스인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노예사냥에 나서는 대신에 두 경쟁 부족에게 무기를 팔고는 양자 사이에 전쟁을 부추겼다. 결국 전쟁 끝에 한 부족이 다른 부족 사람들을 포로로 잡으면, 프랑스인이 재빨리 와서 포로를 사갔다.
-이제는 시신을 통째로만 파는 게 아니다. 자동차 부품을 털어가는 도둑처럼 시신 도굴꾼은 시신을 분해해 치아와 고막, 각막, 힘줄, 심지어 방광과 피부처럼 각 부위별로 으로써 더 많은 돈(최대 20만 달러까지)을 벌 수 있다. 사망자 가족은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때가 많다. 장례식장에서 시신을 받아오고 나서 뼈가 PVC 관으로 바뀐 것을 발견한 가족도 있다. (그래도 그들은 적어도 전체 시신을 받았다. 2004년, 스태튼아일랜드의 한 장의사는 3만 달러를 받고 시신을 육군에 팔다가 붙잡혔다. 육군은 시신에 방탄 신발을 신겨 지뢰 위로 가져가 신발의 성능을 시험했다.)
-˝만약 유령처럼 자신을 영원히 괴롭힌다고 생각한 원수가 사실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했더라면!˝
-프리먼은 머리뼈 꼭대기에 구멍을 뚫는 대신에 안와를 통해 전두엽에 도달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눈 뒤쪽의 안와뼈는 비교적 얇은데, 길이가 20cm쯤 되는 가느다란 막대를 눈 뒤쪽으로 쑤셔넣고 안와에 구멍을 뚫은 뒤 계속 밀어넣으면 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프리먼이 발견했다. 그러고 나서 막대를 앞뒤로 휘저어 변연계와 전두엽의 연결을 아래쪽에서 절단할 수 있었다. 접근 지점의 이름을 따 프리먼은 이 절차를 경안와 뇌엽 절개술이라 불렀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적절한 도구였다. 사체를 대상으로 허리 천자 바늘로 실험을 해보았지만, 이 바늘은 너무 약해서 안와뼈를 뚫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부엌에서 완벽한 도구를 발견했는데, 어느 날 한 서랍을 열었다가 길고 날카롭고 단단한 얼음송곳이 눈에 들어왔다. 사체를 대상으로 실험을 몇 차례 한 끝에 자신의 직감이 옳다는 확신을 얻었다. 적절한 도구를 손에 넣은 프리먼은 이제 환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지렛대의 받침점으로 사용하기 위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얼음송곳 끝부분을 누관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 뒤에 있는 뼈에 맞닥뜨려 더 나아가지 않으면,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날 때까지 망치로 얼음송곳을 두드렸다. 얼음송곳이 뇌에 도달하면, 각도를 달리하며 손잡이를 좌우로 흔들어 뇌엽 절개술을 완료했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반대편 안와를 통해 같은 절차를 반복했다. 수술은 20분 이상 걸리는 일이 드물었고, 환자는 대개 한 시간 이내에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이 지나면, 환자의 얼굴에서 시퍼렇게 멍든 두 눈이 확연하게 나타났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환자는 그것 말고는 불편이나 통증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푹스는 ˝어떤 사람은 열다섯 살에 어른이 되고,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살에 어른이 된다. 서른여덟 살에 어른이 되는 것이 훨씬 고통스럽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CIA가 후원한 연구 중 많은 것은 스트레스에 초점을 맞췄는데, 스트레스의 원인을 밝히는 것과 함께 사람들이 스트레스에 대처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을 살피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 연구는 가치가 있었다. 이 연구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긴장과 불안에 대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CIA는 거기서 얻은 결과를 왜곡했다. 분석가들이 스트레스의 원인을 알아내자, 그들은 그 연구를 바탕으로 전쟁 포로와 스파이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함으로써 비밀 정보를 캐내는 방법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만약 분석가가 사람들이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법을 알아내면, 그 대처 메커니즘을 방해하여 압력의 수위를 더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 전략은 사악하지만 아주 영리한 것이었다. 연구는 학계의 심리학자들이 진행했고, CIA는 그 결실을 챙겼다.
-머리도 틀림없이 그런 결과를 얻도록 돕는 걸 좋아했겠지만, 그가 더 관심을 둔 것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고문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조사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이 믿는 핵심 가치를 공격하고 그 가치가 의미 없는 것임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갈피를 못 잡게 만들어 정신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을 심리적으로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운영진에 KGB 요원이 포함된 정신질환자 수용소가 여러 곳 있었는데, 이곳 정신과 의사들은 KGB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면서 반체제 인사를 정신 이상으로 판정하고 감금했다. 가장 흔한 진단은 ‘완만한 조현병‘이었는데, 이것은 서서히 진행되는 가공의 조현병으로, 그 증상으로는 ‘개혁 망상‘, ‘진실을 위한 투쟁‘, ‘불굴의 노력‘, 그리고 기묘하게도 추상주의나 초현실주의 미술을 선호하는 경향 등이 있었다.
-그들은 또한 소련을 노동자들의 천국이사 세계사에서 가상 위대한 국가로 생각하도록 교육받았나. 따라서 그런 국가에 저항하는 것은 사실상 정신 착란의 징후였다.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천국에 저항하려고 하겠는가?
-예를 들어 X 염색체에 있는 MAOA 유전자를 생각해보라. 이 유전자는 뇌에서 신경 전달 물질의 분해를 돕는 단백질을 만든다. 같은 유전자의 다른 버전들은 각각 신경 전달 물질을 분해하는 속도가 다른데, 각 신경 전달 물질의 존재나 부재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사실은 중요한데, 특정 버전의 MAOA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폭력적 성향이 강하고 반사회적 행동을 나타낼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다만 어린 시절에 학대나 방임을 경험했을 경우에만 그렇다. 학대나 방임을 경험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정상인으로 자란다. 나쁜 결과가 나타나려면, 나쁜 유전자와 나쁜 경험이 결합되어야 한다.
-존 머니John Money는 음경을 ˝남성의 더러운 성욕을 나타내는 표지˝라고 불렀고, 가축뿐만 아니라 남성도 태어나자마자 거세를 한다면, 세상은 여성이 살아가기에 훨씬 좋은 장소가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만약 여러분이 이 발언에 놀랐다면, 이 말은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그것을 열정적으로 지지하건 식식거리며 증오하건, 존 머니의 발언에 중립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발언은 항상 어떤 반응을 유발했다. (머리랑 머니라는 학자들 등장 부분에 특히 밑줄을 많이 그었는데, 정말 교감 신경 과활성하게 만드는-빡치는- 새끼들이었다.)
-머니는 1920년대에 뉴질랜드의 엄격한 기독교 공동체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사소한 잘못에도 그를 때렸고, 어머니는 훨씬 심각한 학대를 겪었다. 어머니와 그 자매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힘들게 한 남자들을 증오하게 되었고, 머니는 그들이 자신에게 그러한 편견을 심어주었다고 말했다.
-남성의 성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여성이라고 느끼거나 그 반대인 경우도 있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조합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느낌을 나타내는 용어가 필요했던 머니는 언어학을 살펴보았다. 영어를 사용하는 원어민은 다른 언어들에서 다리가 ‘남성‘ 이라거나 테이블이 ‘여성‘ 이라고 표현하는 단어의 성gender에 맞닥뜨릴 때 당혹해하는 경우가 많다. 머니는 바로 그 용어를 빌려와 사람에게 적용했다. 머니의 체계에서는 ‘성, sex‘은 염색체와 해부학 (물리적 속성)을 나타내는 반면, ‘젠더gender‘는 행동과 느낌을 나타낸다. 간단히 말하면, 성은 생물학이고, 젠더는 심리학이다.
-짧은 결혼 생활 외에는 머니에게는 개인적 삶이라고 부를 만한 게 사실상 전혀 없었다. 존스홉킨스대학교 사람들은 그를 화산처럼 폭발하는 기질을 가진 개망나니로 여기며 싫어했다. 그는 봉투를 재사용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봉투에서 우표를 떼어내게 했고, 밤중에 병원 식당에 들이닥쳐 남은 음식을 비닐봉지에 담아 갔다. 감히 그의 실수를 지적한 동료들은 또다시 그의 분노에 맞닥뜨리지 않으려면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금방 배웠다.
-머니가 저지른 모든 비윤리적 행위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데이비드가 인간으로서 지닌 자율성을 부정한 것이었다. 브렌다로 살아갈 때 데이비드는 머니에게 여자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시사하는 증거를 전부 다 제공했다. 머니는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고, 자신이 권위자이므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강조했다. 중성과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은 자신들을 같은 방식으로 대한 그런 심리학자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런 심리학자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치료를 받으라고 강요했다.
머니는 데이비드 같은 남자 아이를 여자로 바꿀 수 있는가 하는 과학적 질문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과연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점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그를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대다수 심리학자들은 우리의 성 정체성이 해부학과 뇌 구조, 호르몬, 가정환경, 문화적 영향 등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게다가 젠더는 태어날 때 완전히 고정된 것이 아니지만, 완전히 유동적인 것도 아니어서, 의사들과 외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국제연합은 2015년에 머니가 옹호한 것과 같은 종류의 수술 (신체 일부가 훼손된 아이와 모호한 생식기를 갖고 태어난 아이를 대상으로 한)이 인권 침해라고 선언했다. 불행하게도 데이비드 라이머에게는 너무 늦은 깨달음과 조처였다.(2015년이라니…겨우 십년 되었으면 그 전까지 인터섹스 어린이들 다수가 엄청 고통 받았을 것...)
-우리를 만드는 데 문화가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하더라도, 사람은 빈 서판이 아니며, 1억 6000만 년 동안 계속돼온 포유류의 진화를 문화가 마술처럼 압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물론 모든 남녀가 젠더 고정관념에 순응하는 것은 아니며, 생물학의 실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밀턴 다이아몬드의 표현을 빌리면, 성생물학이 실재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중성인 상태로 이 세상에 오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는데, 그것은 사회가 집어넣길 원하는 것이 무엇이건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알려진 모든 시대의 알려진 모든 문화에서 남성과 여성은 다르게 행동했고, 그것이 조만간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절차나 원칙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게으르지만, 애니 두컨은 늘 열심히 일했다.
-보통은 그런 의지는 건강한 것으로, 더 많은 것을 이루고 고정관념을 타파하려고 노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두컨은 그런 칭찬을 정당한 방법으로 얻으려 하지 않았다. 그 기반이 되는 업적 없이 영예를 추구했다. 이것은 과학적 사기를 저지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결함이다.
-불행하게도 법의학 중 많은 부분은 잘해야 허점이 많고, 최악의 경우에는 완전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2009년에 미국국립과학원이 내놓은 한 보고서는 법의학의 명백한 문제를 여러 가지 열거했는데, 대부분의 하위 분야에서 과학적 기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이 분야들은 실험과 분석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예감을 과학 전문 용어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동일한 시료를 가지고도 법의학 전문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동일한 전문가라도 사전에 용의자가 유죄나 무죄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여부에 따라 동일한 시료를 놓고 아주 다른 결론을 내릴 때도 가끔 있다. (이것은 편향이 분석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는 증거이다.)
-분명히 모든 법의학이 쓰레기는 아니다. 독물학과 병리학은 굳건하며, 미국국립과학원 보고서는 특히 DNA 분석을 신뢰할 만하다고 지적했다. 이 분야들은 기반이 튼튼하며, 근거가 확실한 시험 결과에 의존한다. DNA 분석의 경우, 특정 생물학적 시료 (예컨다 혈액이나 정액)를 특정 개인과 아주 높은 정확도로 연결 지을 수 있다. DNA 분석가들은 또한 결과에 확률을 첨부함으로써 항상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이 존재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대다수 법의학 분야들은 이러한 기본 지침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뼈아프게도 매사추세츠주는 두컨이 체포된 직후에 두 번째로 큰 사고가 터졌다. 애머스트연구소에서 일하던 한 화학자는 실험실에서 시료로 제공된 메타암페타민과 코카인, 케타민, 엑스터시에 손을 대고,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시험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또한, 증언대에 서기 전에 법원 화장실에서 크랙을 흡입하기도 했다.
-사기와 그 밖의 비행은 대중의 신뢰를 잠식하고 과학의 최대 자산인 명성을 훼손한다. 불행하게도 사회가 점점 더 기술과 과학에 의존함에 따라 이 문제들은 더 악화될 것이다. 흥미진진한 새 과학적 모험은 나쁜 짓을 할 새 기회도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심리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어떤 일을 시작할 때부터 윤리를 염두에 둔 사람은 더 정직하게 행동하고 부정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법정에서 증인에게 증언한 후가 아니라 증언하기 전에 선서를 하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게다가 일단 거짓말을 하고 나면, 어떤 의미에서는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때를 이미 놓친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이 책 전체에서 본 심리적 트릭을 사용해 (진실을 가리기 위해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거나, 나쁜 행동을 좋은 행동과 상쇄하거나, 더 나쁜 짓을 하는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은 낫다고 위안하는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나쁜 행동을 합리화하는 데 아주 능하다. 게다가 맨 마지막에 서명을 하면, ‘귀차니즘‘이 발동한다. 거짓말을 한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지만,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지금까지 적었던 모든 답을 고쳐야 한다면, 굳이 그러려고 할 사람이 있을까? 냉소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윤리에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악의적인 사람은 아무도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처음부터 윤리를 염두에 두면 반성을 촉진함으로써 대다수 사람들은 비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줄어든다. 이 목적을 위해 노벨상을 수상한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사전 분석premortem‘이란 개념을 장려했다. 더 잘 알려진 사후 분석postmortem의 경우, 어떤 사건이 일어난 뒤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 사건을 분석한다. 사전 분석에서는 무엇이 잘못될 수‘ 있는지 브레인스토밍을 하는데,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 그렇게 한다. 구체적으로 전체 프로젝트가 어떻게 대실패로 변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연구들은 심지어 단 10분 동안 성찰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집단 사고의 족쇄에서 벗어나 의심을 품을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떤 집단들은 이견을 촉진하기 위해 심지어 일부러 사람들에게 반대 의견을 제기하는 역할(악마의 변호인 역할)을 맡긴다. 같은 맥락에서 과학자들은 정말로 다양한 집단에서 나온 반응을 모음으로써 자신들의 맹점을 극복할 수 있는데, 그런 반응 중에 과학자들이 놓친 경고 신호가 있을 수 있다. 다양한 집단에는 인종과 젠더, 성적 지향성이 다른 사람들이 당연히 포함되지만, 비민주주의 체제나 시골 지역에서 자란 사람들, 블루칼라 가정이나 독실한 종교 집단에서 자란 사람들도 포함된다. 생각의 다양성은 광범위할수록 더 좋다.
-그와 동시에 (이것은 가장 어려운 부분일 수 있는데) 커틀러나 머니나 프리먼을 괴물로 묘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괴물이 자신과 상관없는 부류라고 일축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는 괴물이 아니니까, 나하곤 상관없는 문제야.˝)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본다면, 누구나 비슷한 함정에 빠진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특정 사례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그만큼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도 뭔가 비윤리적인 행동을 저질렀을 것이다. 이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경계 태세이다. 카를 융이 말했듯이, 악인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으며, 그 사실을 인정할 때에만 그 악인을 길들일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혹은 이 시나리오를 한번 상상해보라. 우주선에서 독일인 여자가 브라질인이 만든 약을 사용해 콩고인 남자를 독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우주선은 중국과 벨기에의 복합 기업의 소유이고, 이 기업은 절세를 위해 룩셈부르크에 본사를 두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 얼마나 골치 아픈 상황인가? 혹은 너무 골치 아프니 우주선 상황은 제쳐놓는다고 하자. 여러 기업은 이미 소행성에서 광물을 채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만약 소행성에서 한 광부가 돌로 다른 광부를 때려죽인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먼 행성에서 자녀를 낳기 시작하여 그중 일부는 평생 동안 지구에 발을 디딜 일이 없는 날이 온다면, 지구의 법이 그곳에서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