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6 재독. 스티그 라르손.
2014년 3월부터 4월까지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었다는 메모가 남아 있다. 이 책이 나에게 다시 오는 데 11년이 걸렸다. 원래 책 소개는 잘 안 하는 편인데, 맞은 편 앉은 동료와 이야기 하다보니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니,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시리즈니 괜히 읊다가 아...국문학 전공자 앞에서 뭔 번데기 주름이냐… 하면서도 학교 도서관에 밀레니엄 1부 문학동네판이 소장되어 있는 걸 굳이 검색해서 동료에게 알려주었고, 작가이름과 책 제목을 받아 적고 검색하던 동료는 신이 난 듯 바로 도서관에 뛰어내려가 책을 빌려왔다. 오늘 아침 텀블러의 커피가 그 책에 조금 새어 가지고 곤란한 표정으로 내게 책을 보여주고 다른 컵의 커피를 나눠 주었다.
2014년 봄에는 밀레니엄 소설을, 초여름 다가가는 이맘쯤에는 스웨덴판 영화 세 편을 나눠서 조금씩 보았다. 소설 읽기 전 먼저 보았던 데이빗 핀처의 영화도 한 번 더 보았다. 생각보다 이 시리즈에 푹 빠져 있던 것 같다. 작고한 스티그 라르손의 후계자라 할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마저 쓴 ‘거미줄에 걸린 소녀’, ‘받은 만큼 복수하는 소녀’, ‘두 번 사는 소녀’까지 아쉬운 대로, 애틋한 대로 완결을 보고 말았다.
주말에 큰어린이와 스웨덴판 밀레니엄 1부 영화를 봤는데, 아이와 보기에 적당하지 않은 장면도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한 때 푹 빠져 있던 리스베트라는 캐릭터를 소개하고 싶었다. 핀처의 영화까지 다음날 보려고 하자 곁의 사람이 ‘19금 영화잖아’하고 제동을 걸어서 좀 속이 상했다. 아이에게 나중에 보자, 했다. 전자책으로 빌린 밀레니엄 1부를 읽는 중에 스웨덴판 영화를 보고, 또 책을 보고 하니 대강의 줄거리나 디테일들이 조금 기억나는 듯했지만, 이런 이야기였구나, 싶게 새롭게 읽는 재미도 있었다.
여성 증오 범죄인 연쇄 강간 살인, 소녀의 실종, 후견인제도의 어두운 면 아래 폭력과 성범죄에 노출된, 그럼에도 내내 꿋꿋하고 매력적인 리스베트, 약간 멋질 때도 있지만 더 자주 저놈의 윤리관, 고지식한 놈, 거기다가 또 빙구같은 놈, 가지 마!!!! 거길 왜!!! 하고 고구마를 퍼먹이는 미카엘과 오랜만에 재회하니 반가웠다. 책의 판권은 이리저리 팔려 이번에는 문학동네판으로 1부를 봤는데, 2부, 3부는 연이어서 보게 될지 잘 모르겠다. 1부가 벽돌이라 열흘이나 붙잡혀 있었으니… 한 때 반했었고 빠져 있었던 인물들을 만나는 반가움이 있지만, 난 아직 만나지 못한 새 책들도 너무 많단 말이다. 2부는 천천히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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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까지만 해도 묵직한 덩어리처럼 명치를 꽉 메웠던 불안감이 확 풀려버린 듯했다. 에리카와 함께 있으면 항상 이런 기분 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녀에게 동일한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벌써 이십 년이군.‘ 그는 생각했다. 에리카와 관계를 이어온 것도 벌써 이십 년이었다. 앞으로도 이십 년-최소한 이십 년-은 이렇게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람들에게 딱히 이런 관계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비록 자신들 때문에 이따금 다른 사람들과 어색 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리고 사람들이 쑥덕거린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가끔은 간접적으로 그들의 관계를 물어오기도 했는데, 그때마 다 둘은 사람들 말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알쏭달쏭한 대답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레게르는 둘의 관계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에리카 역시 미카엘과의 혼전 관계를 전혀 감추지 않았고, 그와 다시 만나게 됐을 때도 곧바로 남편에게 밝혔다. 예술가인 그레게르는 이 모든 관계를 감당해낼 수 있는 걸까? 아내가 다른 남자 와 잠자리를 할 뿐만 아니라 휴가까지 쪼개 산드함에 있는 정부의 별 장에서 일주일씩 지내다 와도 그레게르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창작 활동에, 혹은 그저 자기 자신에게 너무 열중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미카엘은 그레게르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다. 어떻게 에리카가 이런 남자에게 반했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남자 둘을 동시에 사랑하는 아내를 받아들여준다는 사실만큼은 항상 고맙게 생각했다.
-물론 미카엘은 리스베트가 자신에 대해 보고한 내용을 알 리 없었다. 그러나 보고서를 본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게 한두 군데가 아니다.
특히 그가 재계의 늑대들을 혐오하는 이유가 급진적인 좌익사상 때문 이 아니라고 말한 부분에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미카엘은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은 아니었어도 정치적 ‘이즘‘은 극도로 불신했다. 1982년 총선 때 그는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투표란 걸 했다. 사회 민주당을 선택했는데 이유는 하나였다. 보수파 예스타 보만이 재무부 장관에, 토르비에른 펠딘이나 자유주의자 올라 울스텐이 수상인 정권이 삼 년 더 연장되는 광경만큼 끔찍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큰 열정 없이 올로프 팔메를 찍었는데, 얼마 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팔 수상 암살, 무기회사 보포르스 스캔들, 에베 칼손 스캔들 등 추악한 정치 현실뿐이었다.
-˝내 생애 이십오 년, 혹은 삼 십 년은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하랄드 같은 인간들을 용서하며 보냈네. 그러고 나서 깨달 았지. 혈연이 사랑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랄드 같은 인간을 변호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도.˝
-˝사는 동안 내겐 수많은 적이 있었지. 그 속에서 한 가지 배운 게 있어. 패배가 확실하면 싸우지 마라. 하지만 나를 모욕한 자는 절대 그냥 보내지 마라. 묵묵히 기다리다가 힘이 생기면 반격하라. 더이상 반격 할 필요가 없어졌다 할지라도.˝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타인의 삶을 뒤지고 사람들이 감추려 드는 비밀들을 까밝혀내는 일에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 기억 하는 한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저런 형태로 이 일을 해왔으며 지금도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드라간에게 임무를 받을 때만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만의 유희로 그런 일을 했던 것이다. 일할 때면 왠지 모를 만족감이 느껴졌다. 비디오게임을 할 때 느끼는 그런 종류의 희열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비디오게임의 주인공이 자신의 집 주방을 차지하고 앉아서 베이글 샌드위치를 권하고 있는 게 아닌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자, 시간이 됐어.˝
마르틴이 팽팽하게 당겨진 가죽끈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아래로 지그시 눌렀다. 미카엘은 끈이 목둘레에 더욱 깊이 박히는 걸 느꼈다.
˝항상 궁금했었지. 남자는 맛이 어떨까 하고 말이야.˝ 그는 끈을 누른 손에 무게를 실으면서 몸을 앞으로 구부려 미카엘의 입을 자기 입으로 덮었다. 그때였다. 얼음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이 개자식아! 내 허락도 안 받고 어디다 주둥이를 들이대?˝
-미카엘처럼 그녀 역시 자신들이 추적하는 대상이 과거의 연쇄살인범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드러난 진실은 정말 뜻밖이었다.
예쁘게 정돈된 목가적인 마을 한가운데, 그것도 기업의 대표라는 사람의 지하실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실로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고 쉽사리 이해되지도 않았다.
리스베트는 이 모든 미스터리를 나름대로 정리해보려 애썼다.
마르틴은 1960년대 이후로 여인들을 살해해왔고, 최근 십오 년간 은 매년 두세 명 꼴로 희생자가 있었다. 너무도 은밀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학살이어서 이 연쇄살인마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가져온 문서에서 부분적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마르틴의 희생자들은 익명의 여자들이었다. 스웨덴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친구도 없고 사회적 접촉도 없는 이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성매매를 비롯해 마약이나 알코올중독 등에 노출된, 이른바 사회적으로 소외된 여성들도 있었다.
리스베트는 성적 사디스트의 심리에 대해 개인적으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이런 부류의 살인마들이 희생자의 물건을 즐겨 수집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종의 기념품인 셈이었다. 나중에 들여다보면서 과거의 즐거움을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기념품 말이다. 사디스트들의 이러한 성향을 마르틴은 특별한 형태로 발전시켰으니, 이른바 죽음의 문집을 꾸미는 일이었다. 그는 희생자들 을 꼼꼼히 분류했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으로 평점까지 매겼다. 그들의 고통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논평했으며, 범행 장면을 담은 영상과 사진을 촬영하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궁극적인 목적은 폭력과 살인이었다. 하지만 리스베트가 도달한 결론은 희생자를 사냥하는 일 자체가 무엇보다 그를 흥분시켰다는 점이 었다. 마르틴의 노트북 안에는 잠재적 희생자 수백 명에 관한 정보가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방에르 그룹 직원도 있었고, 그가 자주 다니는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 호텔 접수 담 당자, 보험회사 직원, 친분 있는 사업가들의 비서, 그리고 그 밖에도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한마디로 일상에서 만나는 여자들을 모두 목록에 올려놓은 듯했다.
물론 마르틴이 살해한 이들은 이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실상 주위의 모든 여자들이 잠재적인 희생자인 셈이었으며, 그는 평소 이들에 대한 정보를 세밀하게 기록하고 검토해왔다. 이 목록은 그가 무수한 시간을 투자하는 열정적인 취미라고 할 수 있었다.
-미카엘은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혹시 네게 뭔가 민감한 일이야?˝
리스베트의 눈은 억누른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미카엘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난 사람들이 오직 교육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는 않아. 하지만 교육이 큰 역할을 한다고 믿지. 고트프리드의 아버지는 여러 해에 걸쳐 아들을 심하게 폭행했어. 그리고 그 흔적은 남는 법이지.˝
˝다 엿 같은 소리예요. 이 세상에 맞고 자란 사람이 고트프리드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모든 건 그의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이건 마르틴에게도 똑같이 해당해요.˝
미카엘은 그녀의 말을 중지시키려는 듯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우리 이런 문제 가지고 싸우지 말자고.˝
˝싸우자는 게 아니에요. 항상 그런 개자식들에게 어떻게라도 정상을 참작해주려 애쓰는 꼴들이 한심할 따름이죠.˝
-˝지금 스웨덴 증시는 사상 최악의 폭락을 맞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아무것도 아닌가요?˝
˝자, 들어보시죠! 우리는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는 스웨덴 경제이고, 다른 하나는 스웨덴 증시입니다. 스웨덴 경제가 뭐죠?
그건 매일 이 나라에서 산출되는 재화와 용역의 총합입니다. 예를 들 어 에릭손의 휴대전화, 볼보의 자동차, 스칸의 닭, 그리고 키루나와 셰 브데를 연결하는 운송 서비스 같은 것들이죠. 이게 바로 스웨덴의 경제이고, 이 경제는 일주일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웅변의 효과를 위해 잠시 멈추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증시는 전혀 다른 겁니다. 거기엔 경제도 없고, 재화의 생산도 용역도 없어요. 거기에는 환상만이 존재할 따름이고, 그 환상 속에서 사람들은 이 정도 기업이라면 수십억 크로나 이상 혹은 이하가 되어야 한다고 매시간 결정하기 바쁠 따름이죠. 이건 스웨덴의 현실이나 경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렇다면 증시가 이렇게 자유낙하를 한데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네. 조금도 중요치 않습니다.”
-원하는 건 단지 그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 그냥 그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것. 나름의 세계와 나름의 삶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고 말해주는 것. 이젠 그에게 단지 우정의 표현만이 아닌 사랑의 표현을 전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미쳐가나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