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하라 이치, 민경욱 역, [그랜드맨션], 비채, 2014.
Orihara Ichi, [GRAND MANSION], 2013.
서술트릭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정신을 초집중해서 읽었을 텐데... 오리하라 이치의 소설 [그랜드맨션]은, 이름은 그랜드이지만 전혀 그랜드하지 않은 오래된 공동주택에서 일어나는 사건 모음이다. 7개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되었는데, 등장하는 인물은 전부 맨션에 거주하는 이웃이다. 층간 소음, 스토킹, 고령사회, 밀실 사건, 전화사기, 기묘한 인생 그리고 치매와 건망증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서 수수께끼 풀이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복선을 놓치지 않고 읽어야 더 재미있다.
소리의 정체
304호 여자
선의의 제삼자
시간의 구멍
그리운 목소리
마음의 여로
리셋
101호에는 예순 전후의 관리인이, 102호에는 스킨헤드를 한 근육질의 남자가 산다.
공사현장, 위층의 소음, 아래층의 흉포한 남자. 그는 삼중으로 공격을 당해 분노만이 몸 안에 가득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분노가 폭발할 때가 찾아왔다.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던 분노의 예리한 날은 필연적으로 돌파하기 쉬운 곳을 향하기 마련이다.(p.40)
202호에 사는 사와무라 히데아키는 직장을 잃고 아내와 이혼했다. 그랜드맨션 동쪽에는 10층으로 2관이 건립될 예정이라서 일조권 문제와 공사 소음으로 신경이 예민하다. 그러던 중에 새로 이사 온 윗집 302호 아이들의 층간 소음으로 분노가 폭발한다. 그런데 거칠게 항의한 후에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든다.
마쓰시마 유카는 아침부터 밤까지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없이 끊는 전화는 반드시 밤 여덟 시가 넘어야 걸려왔다. 그녀가 집에 들어온 후다. 전에 전화를 걸어온 여자는 "마쓰시마 유카 씨입니까?"라고 분명히 그녀를 아는 것처럼 얘기했다. "누구세요?"라고 묻자마자 상대는 전화를 끊었다.(p.82)
303호에 사는 마쓰시마 유카는 새로 건축하는 2관의 모델하우스에서 근무한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는데, 그다음부터 누군가에게 감시 당하는 느낌과 매일 저녁 이상한 전화가 걸려온다. 직장 상사를 의심하기도 하고, 입주를 알아보러 왔던 손님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녀의 이름으로 이상한 문자가 전달된다.
"즉신성불이란 말이다. 살아 있는 채 부처님이 된다는 말이야."
할머니가 말했다.
"살아 있는 채 부처님이?"(p.105)
306호에는 구보타 아야카와 엄마 치에와 할머니 미요가 함께 산다. 아야카는 결혼을 앞두고 이상한 편지를 받는데, 약혼자의 바람이 의심되는 사진이 들어 있다. 206호에 사는 다카다 에이지는 은퇴 후 지역 민생위원으로 활동하는데, 그는 남모르게 아야카를 짝사랑하고 있다.
"왜 그러시죠?"
"아니, 자네와는 조금 운명적인 만남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운명적이요?"
"응, 운명적. 내 약혼자 이름도 도미오였어. '시간의 구멍'을 통과할 수 있다면 오십 년을 거슬러 젊어져 자네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p.180)
203호에 사는 새누마 도미오는 책을 좋아해서 현관부터 책 더미가 쌓여 있다. 책을 더 사고 싶지만, 돈이 부족해서 임대료를 밀린 상태이다. 그는 우연히 옆집 노인의 "장롱예금"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지진이 일어나서 벽의 균열로 옆집과 통로가 생기고, 곤궁한 남자는 돈이 남아도는 노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계획한다. 204호에 사는 사쿠타 요시코는 고령의 노인으로 "내가 죽으면 옆집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라는 메모를 금고 속에 넣어 둔다.
"봐, 그래선 안 된다니까. 돈이 있다고 주변에 얘기하고 다니면 안 된다고. 입이 재앙의 불씨야."
쓰카모토 하루는 입에 검지를 대고 상대를 나무랐다.(p.206)
105호에 사는 다카 이네코는 딸을 가장한 전화 사기로 오백만 엔을 잃었다고 301호에 사는 쓰카모토 하루에게 하소연한다. 106호에 사는 시오자키 도시오는 옛 연인을 가장한 상대에게 이백만 엔을 빼앗긴다. 연금 노인을 대상으로 전화를 걸어서 "나야 나"로 시작하는 속임수에 모두 속은 것이다. 104호에 사는 오카야스 료타에게도 할머니로 가장한 전화가 걸려 온다.
오카야스 료타의 씩씩한 목소리에 도메코의 가슴이 저렸다. 이것이 사랑일까.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사랑을 한다. 몸은 늙어도.(p.263)
103호에 사는 무토 도메코는 문밖 복도에서 수상한 남자를 때려서 기절 시킨다.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반사적으로 행동한 정당방위라고 하고, 쓰러진 남자를 병원으로 옮긴다. 그녀는 현관에서 <엄마 찾아 삼만 리>라고 적힌 일기장을 발견하는데, 가정폭력을 피해서 도망 나온 소녀가 엄마를 찾아가는 내용이 적혀 있다. 남자는 딸과 아내를 찾아서 그랜드맨션에 온 것이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똑같은 말을 해요. 정말 큰일이라고요. 할머니, 일기 쓰세요?"
"응, 쓰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다가 이네코는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일기 쓰기가 일과였는데 요즘은 쓴 기억이 없다.
"그러면 지금 당장 돌아가 할머니 일기를 보세요. 그곳에 할머니가 알고 싶어 하는 대답이 쓰여 있을 거예요. 그리고 손바닥을 펴보세요."(p.312)
105호에 사는 다카 이네코는 자고 일어나 보니 창밖의 맨션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까지 분명히 있었던 10층짜리 건물이 사라진 것을 이웃에게 이야기하지만, 전부 코웃음을 친다. 민생위원인 다카다 에이지는 그녀가 심각한 건망증을 앓고 있음을 알려준다. 매일 똑같은 말로 시작하는 하루, 반복적인 소동, 저녁에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모든 기억은 리셋된다.
서술트릭의 이면에는 일본의 노인문제를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은행이 아닌 장롱에 돈을 보관하는 것,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큰 소리로 얘기하다 보니 개인정보가 새나간다는 것, 보이스피싱과 각종 사기에 쉽게 노출된다는 것, 육체의 쇠약과 함께 정신 건강에도 문제가 생겨서 치매와 건망증으로 고생한다는 것, 고독사로 외롭게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이야기한다. 노인 네트워크와 민생위원의 방문으로 어느 정도 문제 해결의 의지가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상태이다. 노인 사회로 접어드는 우리도 남의 일이 아닌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