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순한 열정 (먼슬리 클래식) | 먼슬리 클래식 1
저자 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2025-01-10
원제 : Passion Simple
소설 > 프랑스소설
사랑이란, 결국 말해지지 않는 감정의 무게로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책 속 밑줄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우리 관계에서 그런 시간적인 개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기호들을 한데 모으면 나의 열정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며 남들이 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 사람의 전화만 기다리며 고통을 겪는 일이 너무 끔찍해서그와 헤어지기를 원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사람과 헤어지는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무것도기대하지 않으며 사는 나날들이 되풀이되겠지. 나는 결국 어떤대가를 치르더라도, 그사람에게 다른 여자, 아니 여러 여자가있다고 하더라도(그의 곁에 있는 여자가 한 명일 경우 내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 사람과의 만남을 계속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는 걸 예감하면서도, 지금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한 날에는 기다림으로 시간을 보내고 만나고 돌아온 날에는 다시 그날의 순간들을 되새기며 시간을 채운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나는 나 자신을 던지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매번 그렇게 자신을 던지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작아지지 않고 오히려 내 삶 전체를 가만히 감싸 안는다.
■ 끌림의 이유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가 한 남자와의 불균형한 사랑에 몰두했던 짧지만 깊은 시간을 기록한 고백형 독백 소설입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미화하지도 변명하지도 않습니다.
욕망, 집착, 부끄러움, 무력감, 그 모든 감정의 결을 단정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써 내려갑니다.
감정에 휩쓸리되, 감정에 함몰되지 않는 이 시선이 읽는 내내 조용한 침잠처럼 다가옵니다.
너무 많은 말이 아니라 정확한 말 한 줄로 사랑을 건네는 방식이 이 책의 가장 큰 힘입니다.
■ 간밤의 단상
사랑은 왜 항상 한쪽이 더 깊이 무너질까요.
그리고 그 무너짐은 이토록 오랫동안 마음을 떠나지 않을까요.
『단순한 열정』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의 감정, 그 모든 소용돌이를 담담히 기록한 고백이었습니다.
사랑 앞에서 얼마나 초라해지고 기대하고 기다리는지, 읽는 내내 서늘하고도 먹먹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사랑을 한다는 건 결국 누군가의 중심에 나를 던지는 일입니다.
그 중심에서 밀려나는 순간, 사랑은 비로소 고통이 되지요.
그러나 그 감정조차도 숨기지 않고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이 책의 진짜 힘이었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오래도록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끝나도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겨진 감정들이 나를 다시 쓰고 결국엔 한 사람의 서사가 된다는 것이지요.
단순한 열정이라는 말은 어쩌면 역설이라 생각됩니다.
가장 단순한 감정이 사실은 가장 복잡하고 가장 격렬했던 감정이라는 것, 그 사실을 새벽의 고요 속에서 오래도록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건넴의 대상
관계의 불균형을 견뎌본 적 있는 분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 있는 분
사랑 앞에서 부끄러웠던 기억을 가진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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