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친코
저자 이민진
인플루엔셜(주)
2023-12-20
원제 : Pachinko (2017년)
소설 > 영미소설
소설 > 미국문학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책 속 밑줄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 땅에 사는 다른 이들은 이렇게 분별 있는 부모를 둘 정도로 운이 좋지는 않았다. 적에게 약탈당하거나 큰 재해를 입은 나라에서 늘 그렇듯이 노인이나 과부, 고아 같은 약자는 식민지가 된 반도에서 더없이 절박한 형편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먹일 수 있다면, 보리밥 한 그릇에 하루 종일 일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천지였다.
세상에서 훈이만큼 딸을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도 드물었다. 훈이는 자식을 웃게 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 같았다.
선자가 열세 살이 되던 해 겨울에 훈이가 결핵으로 조용히 죽었다. 양진과 선자는 장례를 치르면서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젊은 과부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평소처럼 일을 시작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썩었어. 형편없는 사람들이지. 아주 나쁜 사람들을 보고 싶어? 평범한 사람을 상상 이상으로 성공시켜놓으면 돼.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법이거든."
선자는 한수가 이야기할 때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수의 말을 다 기억하고 한수의 모습을 모두 간직하고자 했다. 한수가 하려는 말은 무엇이든 이해하려고 애썼다. 선자는 어렸을 때 모으던 바닷가 유리 조각과 장밋빛 돌멩이처럼 한수의 이야기를 아주 소중히 여겼다. 한수가 선자의 손을 잡고 잊을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기에 선자는 한수의 모든 말이 놀라웠다.
"팔 쌀이 마이 없십니더." 조 씨가 거듭 말했다.
"신부랑 신랑 저녁밥 해줄 정도만 있으면 됩니더. 집 떠나기 전에 흰쌀밥 맛이라도 보라꼬예." 양진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자 쌀집 주인이 눈길을 돌렸다.
딸들을 먼 곳에서, 조선인들을 가축 취급하는 나라에서 살게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피붙이를 그 개자식들에게 뺏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양진은 지폐를 세서 탁자 위 주판 옆 나무 쟁반에 올려놓았다.
"있으면 작은 걸로 한 봉지 담아주이소. 둘이 배부르게 먹이고 싶십니더. 남으면 백설기 해줄라꼬예."
양진은 돈 쟁반을 조 씨 쪽으로 밀었다. 그래도 조 씨가 안 된다고 하면, 부산에 있는 쌀집을 다 돌아다닐 작정이었다. 혼인날 딸에게 저녁밥으로 꼭 흰쌀밥을 먹이고 싶었다.
고국에서조차 가난했던 선자, 그녀는 낯선 땅 일본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믿음과 수치, 굴욕과 자존, 그리고 가족.
부산과 오사카의 삶을 비교하면 생판 다른 생처럼 느껴졌다. 20년 동안이나 돌아가지 못했지만, 그들의 작은 바위섬 영도는 선자의 기억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고 환하게 남아 있었다. 이삭이 천국을 설명하려고 했을 때, 선자가 마음속으로 그린 천국의 모습은 고향이었다. 투명하고 빛나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고향 땅의 달과 별에 대한 기억도 이곳의 차가운 달과 별하고는 사뭇 다른 것 같았다. 고국의 상황이 나쁘다고 사람들이 아무리 불평해도, 선자는 유리처럼 반짝거리는 초록빛 바다 옆에 아버지가 아주 잘 관리한 밝고 튼튼한 집, 수박과 상추와 호박을 내주던 풍성한 텃밭, 맛난 것들이 떨어지는 법이 없었던 시장에 대한 추억만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살 때는 그곳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
"잘 들어, 이 친구야,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이 나라는 달라지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여길 떠날 수도 없지.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다를 바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을 일본 놈이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내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든, 얼마나 좋은 사람이든 더러운 조선인일 뿐이야. 도대체 어떡하라는 거야?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죄다 굶어 죽거나 공포에 떨고 있다고."
모자수가 담배를 찾아 주머니를 두드렸다.
"인간은 끔찍해. 맥주나 마셔."
왜 에쓰코네 가족은 파친코 사업을 그리 안 좋게 생각할까? 외판원이었던 에쓰코의 아버지는 형편이 안 되는 외로운 주부들에게 비싼 생명보험을 들게 했고, 모자수는 성인 남녀들이 돈을 따려고 핀볼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들은 모두 가능성과 두려움, 외로움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매일 아침, 모자수와 직원들은 당첨 결과를 조작하려고 기계를 살짝 손봐서 돈을 따는 사람은 적고 잃는 사람은 많게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자신이 행운아일 거라는 희망을 품고 게임을 계속했다. 어떻게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겠는가. 에쓰코는 이 중요한 면에서 실패했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이길지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믿어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파친코는 바보 같은 게임이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았다.
선자는 평생 다른 여자들에게 여자는 고생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여자는 어릴 때도 고생하고 아내가 돼서도 고생하고 엄마가 돼서도 고생하다가 고통스럽게 죽었다. 고생이라는 말에 신물이 났다. 고생 말고 다른 것은 없을까? 선자는 노아에게 더 나은 삶을 주려고 고생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신이 물을 마시듯 들이마시던 수치를 참아야 한다고 아들에게 가르쳤어야 했을까? 결국 노아는 자신의 출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앞으로 고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한 일일까?
파친코는 결코 공정한 게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삶이 있었고, 생존이 있었다.
■ 끌림의 이유
개인의 삶과 가족사를 통해 거대한 현실을 그려낸 대서사시입니다.
읽는 내내 떠올랐던 단어는 바로 삶의 무게였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비극과 현실, 그 안에서 묵묵히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파고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 간밤의 단상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책에서는 역사적 억압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삶을 이어나가려는 의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삶은 불공정하고 선택의 여지는 여전히 제한적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선자의 삶을 따라가며 내가 받은 것과 누리고 있는 것의 무게를 체감하였고 그 누구의 생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파친코』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었던 역사와 그 안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려 한 사람들의 용기와 인내를 조명합니다.
즉, 기억이고 존재의 증명이며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입니다.
■ 건넴의 대상
깊은 서사와 묵직한 감동을 원하는 사람
가족, 정체성, 역사에 대해 사유하고 싶은 사람
시대의 그늘 아래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위로받고 싶은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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