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해방일지
저자 정지아
창비
2022-09-02
소설 > 한국소설
국내 문학상 > 만해문학상
아버지의 죽음이 알려준 건 그의 삶이 어떤 해방을 원해왔는지에 대한 진실이었다.
■ 책 속 밑줄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만우절은 아니었다. 만우절이라 한들 그런 장난이나 유머가 오가는 집안도 아니었다. 유머라니. 유머는 우리 집안에서 일종의 금기였다. 그렇다고 유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유머일 수밖에 없고 유머여야 하는 순간에도 내 부모는 혁명을 목전에 둔 혁명가처럼 진지했고, 그게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어머니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문자에 대한 아버지의 절대적인 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문자에 대한 확신으로 아버지는 『공산당 선언』을 읽었고 사회주의자가 되었을 테다.
아버지의 눈빛은, 누군가 사진으로 그 찰나는 포착했다면, 처형 직전의 독립운동가나 학살당한 동지의 시신을 목도한 혁명가라 해도 믿을 만큼 진지하다 못해 비장했다. 내가 풋, 웃음을 터뜨리려는 찰나, 어머니가 꽁무니를 내리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열일곱의 나는, 방물장수 하룻밤 재우는 일에 민중을 끌어들이는 아버지나 그 말에 냉큼 꼬리를 내리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어머니나, 그때 읽고 있던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낯설었다.
개 이름 같은 아리는 내 이름이다.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딴 이름 덕분에 나는 숱한 홍역을 치렀다(사실 아버지가 주로 활동한 곳은 백아산보다는 백운산이었다. 그런데도 백아산의 아를 따온 것은 백운산의 백이나 운이 여자아이 이름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그러니까 제 아무리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한들 반봉건시대에 태어나 가부장제의 그늘을 아주 벗어나지는 못한 반봉건적 사유의 발로였던 것이다). 학교에서나 관공서에서나 고아리, 내 이름을 말하면 아유, 이름이 참 예쁘네, 얼굴도 참……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고 이내 말줄임표가 뒤따랐다.
"지사는 무신 지사. 헹제라도 많아서 핑계 김에 얼굴이나 볼라먼 모릴까 니 혼찬디 지사는 무신 지사."
아버지는 뼛속까지 유물론자였다. 부모가 여든 넘도록 장지 마련은 고사하고 영정사진 찍어둘 생각조차 못한 불효자식이었으나 아버지의 유지가 그러하였으니 따르면 될 터였다. 역시 유물론은 산뜻해서 좋다.
월남전에서 다리를 잃었다고 했으니 아마도 육십년대 후반이나 칠십년대 초반, 원래의 다리보다 더 오래 다리 노릇을 해온 때문인지 노인은 지팡이를 능숙하게 움직여 비틀거리지도 않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따 조문은 무신…… 나랑 쐬주나 마시장게."
다리 불편한 노인네를 확 낚아챌 수도 없는 노릇, 황사장이 어쩌지도 못하고 졸졸 뒤를 따르며 다그쳤다.
"왜? 나는 베트콩 때려잡던 사램잉게 뽈갱이 조문하먼 안 된다는 것이여! 나가 고상욱이 때려잡았간디?"
환갑 넘은 빨갱이들이 자본주의 남한에서 무슨 혁명을 하겠다고 극복 운운하는 것인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블랙 코미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를 떴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오직 담배를 태우기 위해 나는 동네 사람이 절대 다니지 않을 산중턱까지 올랐다. 담배 세대를 연달아 태우는 동안 바라본 우리 집은 성냥갑 같았다.
해방은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개인의 삶에도, 마음에도, 각자의 해방일지가 있다.
■ 끌림의 이유
이 책은 죽음을 통해 삶을 들여다봅니다.
장례를 치르는 사흘 내내, 딸은 그간 몰랐던 아버지의 과거를 하나씩 마주하게 되죠.
해방운동, 수감 그리고 가부장제의 틀 속에서 말없이 버텨온 한 남자의 삶이 딸의 시선을 통해 복원됩니다.
읽을 수록 마음이 무겁고 아프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깊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 간밤의 단상
사람은 살아 있을 때보다 떠난 뒤에 더 선명해질 때가 있습니다.
항상 무뚝뚝한 아버지에 대해 늘 질문을 던졌던 아리는 답을 구하진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가 살아온 시대라는 키를 통해 모든 질문을 풀 수 있었지요.
그 순간은 저도 괜스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그 침묵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통해 삶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남겨진 자는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해방을 꿈꾸며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건넴의 대상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 있는 독자
조용히 삶을 성찰하고 싶은 밤을 보내고 싶은 사람
덧붙여, 부모와의 관계를 되돌아보고 싶은 이들에게도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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