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올해 봄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무거운 공기로 시작됐다.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아도 마음속 어딘가가 계속 서늘하게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런 감정 속에서 오래전 대학 시절, 친구의 추천으로 보게 되었던 연극 <1984>가 문득 떠올랐다. 당시에는 단순히 ‘디스토피아 소설을 각색한 연극이겠거니’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갔지만, 막이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압도적인 분위기에 숨이 턱 막혔던 기억이 난다. 회색빛 조명, 철제 침대, 무표정한 얼굴의 배우들, 그리고 끝내 “2+2=5”를 외치는 윈스턴의 절규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연극을 계기로 원작 『1984』를 읽게 되었고, 당시에는 조금 과장된 경고처럼 느껴졌던 이야기들이 해가 갈수록 점점 현실에 더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감시, 검열, 조작과 같은 개념들이 더 이상 허구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 감정이 다시 떠오른 건 작년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려 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을 때였다. 처음 그 소식을 접했을 땐 믿기 어려웠지만, 곧바로 오웰의 '빅브라더'가 머릿속을 스쳤다. 선출된 대통령이 스스로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 한 것. 국민을 위한 리더가 아닌, 권력을 위한 군주로 비친 순간이었다. 당시 명분은 ‘국가 질서 유지’였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였을까? 결국 ‘질서’라는 이름으로 준비된 건 국민을 향한 폭력이 아니었을까?
그때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정치적 실망이 아니라, 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지금도 '자유 국가'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정말 그렇기만 한 걸까? 오웰이 말한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문장이 괜히 가슴에 걸렸다. 뉴스는 편집되고, 기록은 지워지고, 기억은 흘러간다.
이런 생각들을 하던 중, 애플의 유명한 1984년 슈퍼볼 광고도 떠올랐다. 회색 유니폼을 입고 텅 빈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 사이를 뚫고 달려와, 커다란 화면을 향해 해머를 던지는 여성. 그리고 울리는 문장.
“1984년은 오웰의 1984와는 다를 것입니다.”
광고는 짧았지만, 강렬했다. 애플이 단순히 ‘새로운 컴퓨터’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유’를 선언했던 장면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해머는 단순한 기계가 아닌, 감시와 통제를 향한 저항의 상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그 해머를 쥐고 있는가? 아니면 회색 유니폼을 입고 가만히 화면만 응시하는 사람들인가?
『1984』는 결국 인간의 자유, 감정, 심지어 기억마저 통제하려는 세상을 그린다. 그 속에서 '사랑'은 금지되고, '생각'은 범죄가 되며, '진실'은 당의 필요에 따라 매번 새롭게 정의된다. 그런 세상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저항이 되고, 잊지 않는 것이 혁명이 된다.
지금 우리의 일상은 겉보기엔 자유롭다. 스마트폰도 있고, SNS도 있고,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기술이 우리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소비를 유도하며, 생각을 정렬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자발적인 노출이 자율이라 착각되는 시대에, 우리는 과연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오웰은 경고한다.
“미래를 보고 싶다면 인간의 얼굴을 짓밟는 군홧발을 상상하라.”(p.376)
계엄령이 선포되는 순간, 우리는 그 군홧발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다행히 그 발걸음은 멈춰졌지만, 그 발을 꺼낸 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연극 <1984>를 통해 처음 ‘자유의 의미’를 질문하게 되었고, 책을 통해 그 질문의 무게를 느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진실은, 잊지 않을 때만 살아남는다. 우리는 어떤 기억을 지키고,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지 생각을 해보며 리뷰를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