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대학(니혼대학) 국문학과(일어일문학과)에서 정교수로 교편을 잡고 있는 고영란(코-요-란) 교수의 책을 읽었다.
페이지 터너다. 마치 엄지로 스크린을 무한히 스크롤하며 쇼츠를 보는 것처럼 마지막 261쪽까지 단숨에 읽었다. 차이는 엄지로 종이를 집어 왼쪽으로 넘기느냐 같은 엄지로 디스플레이 윗쪽으로 미느냐에 있을 뿐. 제발 이 쇼츠형 이야기들이 계속 되기를, 책이 끝나지 않기를 내심 빌었다. 2탄은 언제 나올지
최근 MZ세대 사이에서 엔화 약세로 일본 여행이 열풍이다. 귀칼, 체인소맨 레제편, 더퍼스트슬램덩크의 열풍도 심상치 않다. 이러한 일본문화 훈풍은 매 세대 반복된 것으로 이전에는 원피스와 에반게리온 등이 있었다. 이 책은 그런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 87-93년에 일본을 접하고 88 올림픽 이전 한국의 빵맛이 형편없던 시절 일본어한다고 폭행당하고 일본에서 한국음식의 마늘냄새가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략 세 세대 전 일본을 발견한 자의 자서전이다.
최근 연세크림빵 교보문고 맛이 특이한 조합으로 인기를 끌어 바이럴 되었다. 매번 예상가능한 시판 크림 패턴만 바꾸어오던 전례를 뒤집은 혁신적 마케팅이다. 이 책을 그런 독특한 콤비네이션으로 비유하자면 마라향 크림같다.
다루는 주제는 모두 얼얼한 마라맛이다. 차별, 혐오, 성적 소수자, 순혈과 혼혈, 자이니치, 지배관계가 체화된 고령여성노동자의 구술문화, 이주와 정체성, 이민자 정체성, 디아스포라, 여성인권,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출판문화시장, 문학상과 마케팅의 밀월, 제국 시기 프로파간다와 동조하는 초기 한류, 원전 은폐하는 미디어와 이에 저항하는 시민 운동 등
모두 첨예하고 예민한 주제이고 이를 다루는 자들은 대개 파이터 활동가로 선언적이고 도발적인 어투로 말해 자극적이고 불편하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주제를 다루면서 이렇게 해야한다는 당위성으로 점철된 설교자의 문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내는 문학가와 생각해보자는 교육자의 문체여서 훨씬 접근성이 좋다. 그래서 마라맛 크림이다.
불편한 내용이 폭신한 크림에 감싸여 톤다운된 느낌이다.
대개 리얼리즘 소설이나 나쓰메 소세키를 좋아하고 한문과 근대를 좋아하는 이들은 129페이지 2장까지는 마음에 들어할 것이고 근대 사회문화 문제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193페이지 3장까지 최근이라면 4장 마지막까지일 것이다.
반드시 국문학이나 일본에 관심없다고 하더라도 고학력 외국인 여성 독신으로 자신이 떠나온 애증어린 사회를 대변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많은 외국 거주 한국인 디아스포라라면 관심있어할 이야기다. 그들의 현재 거주지가 미국, 유럽이라도 충분히 선택지가 일본이었을 수도 있을테니까
책은 기업인의 자화자찬형 성공담 편집본이라기보다 이방인으로서 자기 포지션을 얻어나가는 분투형 빌둥스로만에 가깝다. 전남대 일문과에 경희대 일어과 석사로서 한국에서 자리잡 더 학벌 좋은 고대에 밀렸을 수도 있는데 오히려 현지에서 외국인으로서 무지, 무관심을 받은 덕에 실력으로서만 평가받았다는 점이 인상깊다.
<사피엔스>로만 전세계적인 낙양의 지가를 올린 유발 하라리 교수의 옥스퍼드 박사논문은 중세 전쟁회고록이다. 균질적이지 않은 자서전식 역사서술방법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출발한 논문으로, 자기에게 의미있는 일화를 다루는 역사쓰기에 대해 흥미로운 접근을 했다. 매일 균일하게 쓰는 일기나 조선왕조실록 같은 역사서술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도 근 30년 간의 자기 이야기(herstory)가 균등하게 배분된 것은 아니다. 분절적 쇼츠형이다. 마치 중세용병이 전공을 세운 년대의 이야기는 길게 서술하고 일감이 없을 해는 다루지 않았던 것처럼
또한 때론 자신이 주어가 아니라 알바한 소학교 학생이나 대학에서 가르친 영어에 관심없는 일본청년의 취업문화가 중심이 되기도 한다.
고생 끝에 교수 취직으로 성취헀다는 기승전결의 스토리라인도 아니며 마지막의 수술은 클라이맥스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더 후속 이야기가 궁금하고 저자가 쓴 학술서도 읽고 싶어진다. 아직 맛만 보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