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내 부탁 두 가지만 들어줄래?"
"세 가지 들어줄게."
나오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면 돼. 두 가지로 충분해. 하나는, 이렇게 나를 만나러 와 준 것에 대해 내가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하는 거, 굉장히 기쁘고, 정말로 구원받은 기분이야. 혹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말 그래."
"또 보러 올게. 다른 하나는?"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결 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
"물론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P20
그런데도 기억은 어김없이 멀어져 가고, 벌써 나는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며 문장을 쓰다 보면 때때로 격한 불안에 빠지고 만다. 불현듯, 혹시 내가 가장 중요 한 기억의 한 부분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몸속 어딘가에 기억의 변경이라 할 만한 어두운 장소가 있어 소중한 기억이 모두 거기에 쌓여 부드러운 진흙 으로 바뀌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P21
결국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생각뿐이다. 그리고 나오코에 대한 기억이 내 속에서 희미해질수록 나는 더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왜 나에게 "나를 잊지 마." 라고 말했는지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물론 나오코는 알았다. 내 속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그랬기에 그녀는 나에게 호소해야만 했다. "나를 언제까지나 잊지 마. 내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줘."- P22
나는 그 공기덩어리를 내 속에 느끼면서 열여덟 살 봄을 보냈다. 그렇지만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심각해진다고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죽음이란 심각한 하나의 사실이었다. 그런 숨 막히는 배반 속에서 나는 끝도 없이 제자리를 맴돌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P49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이나 읽을 정도면 나하고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10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P58
남들과 똑같은 것을 읽으면 남들과 같은 생각밖에 할 수 없잖아. 그딴 건 촌놈이나 속물의 세계야.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그런 부끄러운 짓은 안 해, 와타나베, 알겠어? 이 기숙사에서 조금이나마 제대로 된 인간은 나 하고 너뿐이라고,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나 같다고 보면 돼.- P59
4월 중순에 나오코는 스무 살이 되었다. 나는 11월생이니까 그녀가 나보다 일곱 달 정도 빠르다. 나오코가 스무 살이라니,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나 나오코는 언제까지고 열여덟이나 열아홉 언저리를 왔다 갔다 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느낌이었다. 열여덟 다음은 열아홉이고, 열아홉 다음은 열여덟.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 고 가을이면 나도 스무 살이다. 죽은 자만이 영원히 열일곱이었다.- P70
이 편지를 몇백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것은 나오코가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꼈던 슬픔이었다. 나는 그 애달픈 마음을 어떤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릴 수도, 마음속 어떤 장소에 간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내 몸을 스쳐 가는 바람처럼 아무런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몸에 두를 수조차 없었다. 풍경이 내 눈앞을 천천히 지나쳤다. 그들이 하는 말은 내 귀에 닿지 않았다.- P80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다가는 결국 실망할 뿐이니까."- P96
"설마요. 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도 이해 안 해줘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은 상대도 있는걸요. 다만 그 외 다른 사람한테는 별로 이해 받지 못한다 해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체념하는 거죠. 그러니까 나가사와 선배가 말하듯이 아무 한테도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P353
어이, 기즈키, 나는 생각했다. 너하고는 달리 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고, 그것도 제대로 살기로 했거든, 너도 많이 괴로웠을 테지만 나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야. 정말이야. 이게 다 네가 나오코를 남겨 두고 죽어 버렸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나는 그녀를 절대로 버리지 않아. 왜냐하면 난 그녀가 좋고 그녀보다는 내가 더 강하니까.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할 거야. 어른이 되는 거지. 그래야만 하니까. 지금까지 나는 가능하다면 열일곱, 열여덟에 머물고 싶었어.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이제 십대 소년이 아니야. 난 책임이란 것을 느껴. 봐, 기즈키, 난 이제 너랑 같이 지냈던 그 때의 내가 아냐. 난 이제 스무 살이야. 그리고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만 해.- P415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 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P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