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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의 책다락
  • 치치새가 사는 숲
  • 장진영
  • 12,600원 (10%700)
  • 2023-10-20
  • : 9,443



제목도 상큼하고 표지도 초록초록해서 마스다 미리의 <주말엔 숲으로> 같은 느낌의 치유계 작품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근데 그래서 실망한 건 아니고, 어떻게 보면 흔히들 싱그럽고 즐거운 분위기로 상상하기 쉬운 청소년 시절이 사실은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지겨웠는지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제목과 표지의 배신(?)이 소설의 의도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나'는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남아 있는 2003년에 중학교에 입학한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빠와 집에서 불법 시술소를 운영하는 엄마는 딸들이 다니는 학교 이름도 모를 만큼 부모 역할에 무관심하다. 언니는 공부를 아주 잘했지만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기업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고 있고 집에는 좀처럼 안 온다. 사실상 방치 상태인 '나'는 배치고사를 잘 봐서 선생님들의 기대를 받지만 공부를 잘해도 어차피 언니처럼 될 거라는 생각에 공부를 등한시한다. 그렇다고 친구 달미처럼 예뻐서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니 성적 매력이라도 어필해 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소설 초반은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낸 2000년대 초중반이 떠올라서 즐거웠다. 월드컵, 평준화, 배치고사, 러브장 같은 단어들도 반갑고, 학교 본관에서 수업받는 아이들과 별관에서 수업받는 아이들 사이에 있었던 은근한 기싸움 같은 것도 나와서 내가 다닌 학교만 그랬던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ㅎㅎ). 그러다 갑자기 '차장님'이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아니 사실은 예상했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랐던) 전개가 이어지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와 차장님의 관계는 전형적인 그루밍 성폭력 관계인데, '나'가 폭력을 애정이나 사랑으로 착각할 정도로 '나'를 방치하고 학대한 가족과 학교, 사회는 과연 죄가 없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장님(님은 무슨...) 만큼 기분 나빴던 인물이 또 있는데 언니의 남편이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나'의 언니가 딸 서빈이에 이어 아들 호떡이를 출산하는데, 호떡이를 보던 형부가 '나'에게 이모가 된 소감이 어떤지 묻는다. 서빈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이미 이모가 되었건만. 아들만 자식이냐. '나'의 언니도 복잡한데, 표면적으로는 '나'의 주변 인물 중에서 '나'에게 물심양면으로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건 맞지만, 어떻게 보면 언니도 '나'를 이용해서 소위 말하는 팔자가 달라진 것도 맞지 않나. 근데 또 '나'를 제일 많이 도와준 것도 맞고... 어렵다, 가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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