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키치의 책다락
  • 푸른 들판을 걷다
  • 클레어 키건
  • 15,120원 (10%840)
  • 2024-08-21
  • : 26,390



클레어 키건. 여러 의미로 대단한 작가다. 이번에 읽은 <푸른 들판을 걷다>를 비롯해 내가 읽은 그의 책이 총 세 권인데(한국에 소개된 책이 세 권이니 당연하다), 세 권 모두 각자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특히 <푸른 들판을 걷다>는 총 일곱 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 소설집이라서,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나서 느낀 아쉬움(좋은데 너무 짧다, 더 읽고 싶다)을 덜 느껴서 좋았다. 이 책을 필사하거나 원서로 다시 읽는 독자들이 많다는데 나도 그래 볼까. 영미권 작가의 소설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든 건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작품은 맨 처음에 실린 <작별 선물>이다.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날 채비를 바쁘게 하는 소녀가 있다. 소녀의 엄마와 오빠는 슬픈 기색을 비추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성심성의껏 소녀를 배웅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다정하고 평온한 가정의 이별 장면 같지만, 이들이 숨기고 있는 사연은 다정함이나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다. 클레어 키건은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가족이나 이웃, 종교 등의 공동체가 공동체로서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공동체의 결속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약자를 착취하거나 약자에게 학대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례를 솜씨 좋게 고발해 왔는데 이 소설도 그렇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이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에 사는 평범한(혹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반해, 무라카미 하루키가 극찬했다는 <물가 가까이>는 미국의 한 부유층 가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주인공 청년은 폭력적인 (새)아버지와 방관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점에서 <작별 선물>의 주인공 소녀와 처지가 결코 다르지 않다. <작별 선물>의 소녀는 결국 집을 떠나기라도 하지만 <물가 가까이>의 청년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불분명한 채로 소설이 끝이 났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인 결말도 상상 가능하다. 


(집을) 지키는 남자들과 (집을) 떠나는 여자들이라는 모티프는 이 책에 실린 다른 소설에서도 반복된다. 표제작 <푸른 들판을 걷다>를 비롯해 <검은 말>, <삼림 관리인의 딸>, <굴복>, <퀴큰 나무 숲의 밤> 모두 그렇다. 우리말에서 아내를 '집사람'이라고 일컫기도 하고 영어에서 주부를 'housewife'라고 부르는 것처럼, 보통 집은 여성과 연결되는 데 반해 이 책은 집을 남성과 연결한 점이 흥미롭다. 이때의 집은 '가부장' 할 때의 집[家]인가 싶다. 집으로 상징되는 남성 권력에 대한 저항이 잔잔히(혹은 절절히) 깔려 있는 책이라서 더욱 공감하며 읽은 것 같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