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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서림(道談書林)
  • 메리 크리스마스, 카프카 씨
  • 한유주 외
  • 15,300원 (10%850)
  • 2024-11-29
  • : 416

하하, 작년은 카프카가 죽은 지 100년이 되던 해였다. 하여 카프카 서거 100주년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여러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책도 여러 권 나오고.


죽어서 더 명성을 누리게 된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 카프카일 텐데, 그만큼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형용사까지 지니고 있으니, 아마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는 작가로 남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행사나 책이 나왔겠지만, 이 책은 카프카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을 실었다. 네 명의 작가가 각자 자신에게 영향을 준 카프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설로 섰다.


한유주의 '암담'은 제목 자체에서 불안함, 불명확함, 불확실성 등이 느껴진다. 암담하다는 말을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쓰기 때문이다. 사실 카프카 작품들이 이러한 불안, 암담함을 많이 드러내고 있기는 한데, 이러한 분위기를 한유주가 받아서 쓴 것.


배경은 인도다. 낯선 곳이다. 아마도 유럽 사람들에게 인도란 다른 세계, 그들이 탐험하고자 했던 세상이기도 했으리라. 물론 카프카 생존 시에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으니 탐험과는 거리가 있지만,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 또 영어가 아닌 그들의 언어는 낯선 것임이 틀림없으리라. 인도는 지금 우리에게도 낯선 나라이니까.


낯섬과 만나는 불안함. 그 속에서 지내야 하는 모습을 '암담'이라는 제목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인도'보다는 카프카 소설 중에서 '실종자'를 더 많이 떠올렸으니...


미국으로 건너가는 젊은이 이야기.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불안함, 도대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 그런 곳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실종자'이고, 한유주가 쓴 '암담'을 읽으면서 '실종자'에 나오는 카알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카알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암담'이었으니... 어디 그만 그런가? 이제 인공지능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도 미래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암담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카프카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불안감이나 한유주가 확장한 암담함은 지금도 우리 삶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카프카 문학의 현재성!


김태용이 쓴 '카프카 씨, 영화관에서 울다' 역시 불안함, 무언가가 명확하지 않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카프카가 1913년 11월 20일에 쓴 일기'영화관에 있었다. 울었다,'(52쪽에서 재인용)라는 내용에서 착안한 소설이라고 한다.


카프카가 영화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대해 김태용이 나름대로 해석해서 풀이한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영화관이 어떤 곳인가? 남과 소통하기 보다는 자기만의 세계로 다른 세계를 관찰하는 곳 아닌가.


다른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수는 없는,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로 받아들여야 하는 장소, 그곳이 바로 영화관 아닌가. 영화와 소설의 차이나 다른 것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영화관을 생각하면, 우선 어둡다. 그리고 단절된 세계다. 나만의 의자에 앉아 내 앞에 펼쳐지는 세상을 혼자 곱씹으면서 받아들이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오면 이제 현실로 돌아온다. 다른 세상에서 현실로...


물론 김태용의 소설은 다르다. 다른 인물이 등장하고, 주인공의 구두를 가져간다. 이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간접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한 경험이 내 삶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음을 말해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는데...


민병훈이쓴 '예언자의 꿈'은 카프카 소설 중에서 '다리'를, 김채원이 쓴 '더블'은 카프카 소설 중에서 '공동체'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카프카가 다리를 서술자로 삼고 있다면, 민병훈은 그 다리를 찾아 가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중간중간에 소설 '다리'에 나온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 서술자가 달라졌으므로,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는 비슷하다.


'더블' 역시 카프카 소설에서 배제되는 여섯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카프카는 여섯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내용으로 이미 존재하던 다섯을 중심으로 썼다면 김채원은 나중에 온 여섯이 그러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리'나 '공동체' 모두 번역된 소설집에서 두 쪽짜리 소설이다. 아주 짧은 소설인데, 그 소설 나같은 경우는 읽고는 그냥 잊고 말았는데, 소설가들은 그러한 소설에서도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소설을 쓴다. (이 소설들 덕분에 다시 카프카의 두 작품을 찾아 읽었다. 정말 짧았다. 이 짧은 소설에서도 자기 나름대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작가들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다.)


무언가 자신의 마음을 울리는 작품을 그냥 넘기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다시 재탄생 시키는 작가의 모습들. 그것이 바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자세 아닌가 싶다.


카프카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그의 문학은 이렇게 우리 곁에 있고, 또 다른 작가들로 인해 더욱 풍성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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