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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서림(道談書林)
  • 죽은 자의 꿈
  • 정보라
  • 13,050원 (10%720)
  • 2022-05-31
  • : 276

쓱쓱 읽힌다. 재미 있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 된다. 얼마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아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꺼번에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무서워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이야기가 바로 귀신 이야기이니, 무섭고도 재미 있는 이야기가 바로 귀신 이야기다.


이 소설도 일종의 귀신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귀신 이야기? 귀신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귀신이 무엇이지? 정말 존재하나? 이런 의문을 가지면 소설을 소설로 읽지 못하게 된다. 문학은 문학으로서의 길을 가기 때문에, 문학에서 귀신이 필요하면 귀신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귀신으로 인해 소설이 더 소설다워지기도 한다.


귀신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억울한 일은 당한 사람이 죽음에 임해 하늘로 가지 못하고 지상에 남아 그 억울함을 풀려고 한다고 했다. 억울한 죽음이 귀신이 되게 한다고 하면, 이 소설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것 또 귀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억울함이 있고, 그러한 억울함을 풀 수 있다는 것이다.


귀신을 보는 한 남자에게 고등학교 동창이 나타난다. 너라면 풀 수 있을 거라며... 귀신이 된 친구, 교통사고라고 하지만 아니다. 그러니 귀신이 된 것. 귀신을 볼 수 있는 사람 김태경. 이 남자는 동창생인 강문석의 부고를 받고 조문을 간다. 그리고 거기서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김태경과 만나는 여자 성연. 죽음으로 태어나 다른 생명의 죽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 여자. 당연히 귀신들을 볼 수 있다. 이 둘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 성연은 다른 이의 목숨으로 자신의 목숨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태경의 목숨과 성연의 목숨은 반대가 될 수 있다는 것. 


문제는 이들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 둘의 사랑이 정상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귀신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이들의 사랑을 변태라고 할 수는 없다. 남의 생명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성연에게 남에게 받는 고통은 생명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내 생명 유지에 남의 생명을 끊을 수밖에 없는 생명체들의 업보는, 자신의 생명에서 고통을 인식하고 감내해야 함을 성연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이 둘에 강문석의 죽음이 끼어들고, 강문석의 죽음을 쫓아가는 와중에 또다른 죽음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강문석과 함께 살던 여자의 죽음. 둘의 죽음이 모두 억울한 죽음이다. 


해원, 씻김굿. 소설은 이런 과정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다. 원한을 푸는 일이 어디 간단하겠는가? 그렇게 하기까지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원한을 대신 갚아줄 수는 없는 일.


사건에 사건을 거듭하면서 태경과 성연의 사랑과 강문석에 대한 여인의 사랑이 중첩되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니 사랑을 빙자해서 한 사람을 착취한 인생이 어떤 결말을 맞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삶을 산 자, 남을 속이고 이용하고 착취한 자의 죽음이 과연 억울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들 눈에는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억울한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으로 인해 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사랑을 빙자해 한 여성을 착취한 인간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 인간이 있었다는 현실에 기반한 이 소설은 다른 결말을 택한다.


귀신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풀지 못한 원한을 귀신을 통해서 풀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해원, 씻김이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서 씻김굿 한판을 벌였다고 보면 된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사랑을 이용해서 상대를 착취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이 현실에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온전한 사회가 아니다. 그런 자들이 존재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작가는 귀신을 통해서 온전함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사랑은 남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성연과 태경을 통해 보여주고, 강문석을 통해서는 그것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인간의 최후가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이 소설은 귀신을 보여줌으로써 원한을 풀어가는 한판의 씻김굿이 된다. 우리 역시 이 소설을 읽으며 이러한 씻김굿에 참여하게 된다. 더이상 원한이 넘치는 사회가 아닌, 그러한 원한들이 풀려 씻겨나가는 세상, 서로가 서로를 위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세상. 그 세상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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