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다. 작가의 말이 두 편이나 있다. 초판을 냈을 때 썼던 작가의 말과 신판을 냈을 때 작가의 말. 그런데 작가의 말이 많이 달라졌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기에, 작가의 말이 주는 울림은 그대로다. 이 책에 쓰인 작가의 말이 과거의 말, 그때는 그랬지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초판 작가의 말에 있는 제목은 '생존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 소설집의 내용을 잘 드러낸 제목이다. 제목이 된 '너의 유토피아'만 봐도 그렇다.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다. 기계문명이 모두 파괴된 세계.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여기서 살아가는 로봇의 이야기. 너의 유토피아.
만족도 설문을 할 때 1에서 5까지의 숫자를 놓고 선택하라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0부터 10까지 중에서 선택한다. "너의 유토피아는?" 세상에 인간이 사라지고 황폐하게 변한 지구에서 유토피아 지수는 높을 수가 없다. 0이다. 그런 세상은.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있으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지닐 수 있다.
지옥 속에서도 천국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루쉰의 말이 나오는 소설 '여행의 끝'에서도 희망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고, 결국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 역시 좀비(?)로 변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희망이 있으면 좋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이 인간을 먹는 그런 세상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디스토피아.
'여행의 끝'이 유토피아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살 수 있는 곳이면 좋겠지만, 아니다.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관계만 남은 곳. 그런 곳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차별과 혐오를 없애야 한다.
차별과 혐오에 대한 이야기가 '그녀를 만나다'에 나온다. 왜 성적 지향을 가지고 혐오 표현을 남발하고 차별을 하나? 차별이 폭력으로 나아가기도 하는데, 자신이 폭력을 저질러 놓고도 "짜릿하지 않아요?"('그녀를 만나다'에서. 235쪽)라고 하는 인간. 그런 인간들이 존재하는 사회. 그 사회야말로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차별금지법은 제정이 되지 않고 있다.
하여 이 소설의 마지막은 유토피아다. 차별과 혐오가 발붙일 수 없는 사회니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금 젊은 나이의 사람이 무려 100살이 넘은 나이가 된 시대. 평균 수명이 130세 정도인 시대. 그 시대에 군대에서도 성전환이 자유롭고, 군인들도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보장받는 사회. 그러한 사회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인물이 마지막에 예전을 떠올린다.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변희수 하사를 기억합니다." ('그녀를 만나다'에서. 269쪽)
기억이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작동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하자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억해야 변화 시킬 수 있다. 기억하는 사람이 많아야 변화의 힘이 더욱 세진다.
정보라는 '2020년은 무서운 해였다'(초판 작가의 말. 355)라고 했는데, 신판을 내면서 제목을 '계속 싸우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2022년은 무서운 해였다'(신판 작가의 말. 364쪽)고 하고 있다.
2024년은 더 무서운 해였다. 비상계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으로 그 해를 마무리했으니... 깨어 있는 국민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디스토피아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렇다. 정보라가 계속 싸우는 이야기라고 한 것은,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기도 했고.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속 싸워야 한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계속 시위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이렇게 계속 싸우는 이야기를 '씨앗'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을 정복했다고 여기는 인간들에게 씨앗들을 심어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을, 자연은 스스로 생존 방식을 찾아가고 있음을, 당신들의 복제에 다양성으로 맞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식물인 줄 알고 읽다가 어, 인간과 대화를 해, 그런데 인간이 복제 인간이야? 왜 똑같다고 표현을 하지? 식물은 유전자조작으로 인해 똑같은 또 씨앗으로 다음 대를 이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런 사회가 인간인들 가만 놓아두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이렇게 작가가 설정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언급한 소설만이 아니다. 다른 소설들도 재미와 감동을 준다. 영어로 된 작품이 두 편 실려 있는데, 이 작품들은 '상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따스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One More Kiss, Dear라는 소설과 Maria, Gratia Plena라는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면서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눈 감고 듣지 않으려 했던 우리 사회의 암울한 모습들을 소설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발견, 이것은 다른 관점을 지니게 하고, 다른 관점은 다른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딛게 한다. '여행의 끝'에서 루쉰의 말이 그렇게 긍정적으로 쓰이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작품집을 보면 희망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루쉰의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작가 역시 '생존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이라고 했다가 계속 싸우는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한다. 그것이 상실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