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이야기를 찾으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다양한 일들이 겹쳐 서술된다. 인물의 생각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장면들이 많다.
주인공이 최면술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 내면에 깊숙이 숨어 있는 것들을 끄집어낸다고 볼 수 있는데, 볼라뇨는 이 소설을 통해서 무엇을 꺼내려 했을까?
바예호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 인물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를 살려달라는 요청을 팽선생이 받는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들이 팽선생에게 바예호를 포기하라고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바예호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결국 팽선생은 자신이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지니지만 바예호에게 두번 다시 가지 못하고, 바예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커다란 줄거리 안에 다양한 인물들과 일들이 중첩된다. 환상적으로 때로는 불명확하게 서술이 되고 있는데... 마치 안갯속을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카프카 소설을 읽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하지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생각하면 불확실함이 주를 이루는 것이 맞겠단 생각이 든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때. 사람들은 행복의 시대보다는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나치가 집권을 하지 않았던가. 세계는 더더욱 불확실성으로 빠져들게 되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을까.
사람들 역시 불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으리라. 어떤 사람은 그런 시대에도 자기 확신을 지니고 살아가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니 팽선생과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 헤매는 것도 이해가 갈 만하다.
바예호가 있는 병원을 찾아가지만 병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복도를 이리저리 헤매는 팽선생의 모습에서 위기를 인식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 소설에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주인공인 팽선생이 적극적으로 나서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팽선생 역시 헤매고 있다. 헤맬 수밖에 없다. 그를 최면술사로 설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내면에서는 불안감이 작동하고 무엇인가를 해야한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행동하기 힘든 상태. 그러한 인물들.
결국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으니, 바예호는 죽고 마는데, 이는 스페인 내전에 이은 2차 세계대전으로 빠져드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만 볼라뇨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명확한 주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행동을 하는 인물을 창조하지도 않았다.
그냥 흐릿하게 역사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소설 속 인물들처럼 살아간다면 어떤 결말에 처할지를 보여줄 뿐이지만, 그런 삶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격동기에 살았던 볼라뇨로서는, 그 전에 유럽에서 벌어진 혼란 상황을 표현함으로써 자신들의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보라고,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렇게 흐릿하게 살아감으로써 결국 바예호를 죽게 만들지 않았냐고. 그렇게 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소설 속에 일관되지 않은 사건들을 배치해서 어지러운 현실을 소설 속에 구현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은? 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우리 역시 명확하게 정리된 줄 알았는데, 아직도 혼란 속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지, 이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소설 속 인물인 팽선생처럼 생각은 있으나 헤매다 끝나고 말면 안 된다고, 적어도 그 점은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