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닷슈님의 서재
  • 혐오사회
  • 카롤린 엠케
  • 13,500원 (10%750)
  • 2017-07-18
  • : 2,352

 1990년대 초반 공산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한 서구 진영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면서 세계는 가까운 시일 내에 모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뒤덮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계를 뒤덮은 것은 자본주의 하나 뿐이다. 권위주의 정권은 자본주의 하나만 취사 선택했고 민주주의는 시늉만 냈을 뿐이다. 그리고 굳건해 보이던 서구 진영에서도 이 자본주의로 인해 민주주의가 크게 쇠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후유증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구축되며 서구사회의 중산층은 제조업 일자리를 잃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극우주의적인 포퓰리스트들이 각 서구사회에서 득세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이탈리아나 미국의 경우처럼 정권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들의 자양분은 소위 말하는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다. 불우한 처지에 놓인 이들은 자신들을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찾기 시작했는데 극우주의자들이 제공한 혐오의 대상이 그 사회 내의 소수자, 이민자, 이들을 품고자 하는 좌파엘리트와 사법기구들이었던 것이다. 

 책 '혐오사회'는 이런 움직임이 아직은 발흥기로 보였던 2016년의 책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 문제는 오히려 악화했다. 책은 혐오의 근원과 그 근거 없음을 보이는데 주력한다. 저자가 독일인이고 성소수자인만큼 이 부분에 대한 논의도 많다.

 혐오와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거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단순실수나 궁지에 몰려 나오는 막연한 감정이 아니며 특정 이데올로기에 따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다. 즉, 미리 정해진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혐오나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연상과 이미지가 범주화 되어 있으며 이를 평가하는 인식틀이 있고 오래도록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지는 방식으로 훈련 및 양성된 것이기에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다. 

 혐오와 증오는 매우 협소한 시각을 갖고 있다. 혐오와 증오의 대상에 대해서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다양성이 모조리 제거된다. 그저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는 상상력의 축소로 이어지는데 그로 인해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감정 이입의 여지가 크게 사라진다. 이런 증오와 혐오의 대상은 그저 무슬람이나 이주자, 흑인, 성소수자에 대한 좋지 못한 관념의 틀에 끼워 맞춰져 그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실한다. 남게 되는 것은 이들에 대한 만들어진 묘사화 평가에만 의존한 축소된 사고 뿐이다. 이로 인해 혐오와 증오가 가능해진다. 

 이런 인식 패턴은 새롭거나 독창적인 것은 아니며 많은 역사적 선례를 갖고 있다. 이렇게 혐오로 구성된 세계에서는 유희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은 없다. 모든 사건은 모종의 의미와 의심스러운 배후가 있으며 외도가 있는 것으로 치부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자신들의 집단을 해하려는 음모로 해석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몰락과 억압에 대한 구태의연한 옛 이야기를 끌어와 극적으로 표현해 배경으로 깔아두고 그 앞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특별히 중대하고 운명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이들의 세계는 매우 이분법적으로 자신들이 축소되거나 죽어가는 국가의 시민이며 다른 한 쪽은 자신들의 멸망을 적극적으로 추전히고 있는 사람들이 된다. 그래서 그들을 적으로 삼게 되며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신념과 관념에 대한 외부의 의식과 비판은 결코 논의에 대상이 되지 않는 모순을 보인다. 이런 비판은 유일하고 진실한 투쟁을 이끌어가는 사람에 대한 검열과 억압, 조롱으로 치부된다. 

 작금의 혐오, 증오를 조장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질적인 것, 본원적인 것, 순수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동질적 국가와 국민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국민은 소위 현대국가 성립 시기에 형성된 자유롭고 평등한 인민이 아니다. 이런 헌법적이고 공통의 행동에 기반하는 것 보다는 정확한 기원과 근거를 알 수 없는 종족 및 민족으로 협소히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믿음은 일종의 건국신화를 주장하는 이야기에 뿌리를 둔다. 그것을 과거지향적인 것으로 사회가 같은 가치와 관습의 지배를 받았던 과거를 생각하고 그 때가 더 참되고, 옳고, 진정하다고 생각한다. 

 성별과 관련하여 본연의 특성이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의 상상력을 통해 전승되었고 신의 뜻이라는 표상과 결부한다. 하지만 본연성과 본원성, 순수성은 그 근거가 사실상 매우 빈약하다. 트랜스인이란 타고난 외적 성장과 호르몬의 범위가 본인이 몸소 느끼는 성별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 또는 할당된 소속 성별이 본인이 느끼는 성별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이 자신을 인정받고자 하는 장벽은 매우 높다. 외적인 성별동화 외에도 행정적, 재정적, 정신의학적, 법정 장애물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조금 이상하다. 일반인들은 자신의 존재와 성적정체성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트랜스인들은 그 모든 것을 인정받기 위해 그 이유를 대야 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설명하고 정당화할 의무가 없다. 독일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성전환법에 의해 자신이 성전환자임을 여러 차례의 감정을 통해 입증받아야 한다. 저자는 이것을 감정이 아닌 신청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IS는 증오와 혐오로 가득찬 집단이다. 놀랍게도 이들에게서 눈에 띄는 것은 평등주의다. IS 지하드에 가담하라는 선전 선동을 하면서도 국적이나 신분, 인종도 가리지 않는다 .그저 알 바그다디가 선전한 교리에 충성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유를 주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 위의 군림을 약속하며 그 안에서는 절대적 위계 관계가 존재하고, 일절의 자유없이 충성해야 한다. 즉, IS는 경계를 없애는 동시에 경계를 긋고, 포용하는 동시에 배제하는 존재다. 이런 모순된 포용성이 자기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역사적 과업에도 동참하지 못하는 유럽의 무슬림에 소구력을 갖는다. 하지만 막상 IS에 들어가게 되면 반개인적이고 권위적인 곳에 속하게 되며 모든 개인의 고유함은 허용되지 않는다. 

 일견 IS는 무슬림 난민들이 유럽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무슬림 난민에 대한 공정한 대우와 포용적 환영, 유럽에서의 실질적 기회 제공은 오히려 IS에게 상당한 위협이 된다. 

 저자는 이런 일련의 증오와 혐오를 조장하는 곳에 같은 형식의 증오와 폭력을 분출하기 그것이 일어난 곳과 구조를 찾아서 경제, 사회적으로 개입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모든 인간은 보편적 우리에 공통으로 소속되는 것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고유한 개인으로서의 유일무이성이 중요하다고 본다. 사회에는 복수성이 중요하다. 이것인 개인이나 집단의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를 허용함으로써 자유를 보장한다. 증오와 혐오를 조장하는 이들은 동질적이고 본원적이고 순수한 집단을 추구하고 그것이 더 큰 보호와 안정을 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이질적인 것을 배제하기에 안정성을 해치고 보호를 해주지 않는다. 물론 세속주의 민주주의가 모든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종교적 도그마나 그것으로 인해 인권을 해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개별적인 다름을 허용하기에 논란이 일어나기 쉽지만 이로 인해 공적 논쟁이 많아지고 이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과정이 된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