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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자, 별 하나
  • 성경이 쉬워지는 책
  • 존 팀머
  • 19,000원 (5%600)
  • 2025-04-01
  • : 360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난 매일 성경을 읽는다. 나에게 있어서 성경은 그냥 책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이다. 책을 많이 읽었지만 다른 책들은 지식을 얻는 책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실존하고 실체가 있고 그대로 지켜야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난 오로지 말씀만 믿는다. 이 책을 읽고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면 족한 것 같다. 맥락과 흐름만 잡아도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성경의 일관된 흐름과 관통으로 주제를 파악하며 성경 전체를 쉽게 이해하면 성경읽기와 묵상이 즐거워진다.

저자 존 팀머는 여러 세대에 걸쳐 말씀의 씨앗을 다음 세대에게 충실하게 심어 온 가정에서 태어났다. 네델란드 하클렘에서 태어난 그의 12세에 나치는 네델란드를 침공했으며, 청소년기를 추위, 굶주림, 위험, 두려움과 함께 보냈다. 거리 전도와 YFC에 참여해 신앙생활의 열심을 냈다. 1952년 미국으로 이주해 칼빈신학교와 하트퍼신학교 졸업 후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교에서 신약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4년 동안 일본 선교사로 기독개혁교회(CRC교단)를 섬겼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 리지우드기독개혁교회와 우드론 기독개혁교회에서 목회를 한 뒤 1995년에 은퇴했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스토리 텔러인 그는 2009년 칼빈신학교 우수동문상을 수상했고, 그의 설교는 신선함과 깊이 그리고 언어적 경제성으로 유명하여 신학생들의 모델이자 설교자들의 참고자료로 활용된다.

교회 장년부 교육이라고 하면 대개 성경 본문을 정해 놓고 공부하는 방식을 떠올린다.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장년주일학교를 이런 방식으로 운영해 왔다. 물론 이런 형식도 적절치 못한 것은 아니다.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원이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평생의 지침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교육에는 기독교 교리, 교회사, 교회행정, 기도, 기독교 윤리 등 다양한 과정이 포함되며, 그럼에도 각 과정은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한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신학 공부로 돌아가기 위한 이유이기도 하다. 성경신학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주인되시는 모든 교회교육의 열쇠이다. 『성경이 쉬워지는 책』은 하나의 맥락을 중심으로 성경을 흝어보는 책이다. 이 책은 성경에 대한 개관을 대략 날짜, 이름, 사건 등을 역사적 순서대로 개관하면서 성경의 숲을 본다.



중요한 가르침과 사건들의 연관성을 짚어보면서 이야기의 기본 뼈대를 세워간다. 성경을 관통하는 전체 의미를 살피면서 그 속에 담긴 정신과 의미를 파악하여 총체적으로 보는 방법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공부할 때 한 본문, 한 단락, 한 장 나아가 크게는 한권 정도로 나누어 보는 경향이 있다. 성경은 한 분의 저자가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 권의 책이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을 담은 한 권의 책으로 전체 맥락 가운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의 전반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총체성이라는 맥락에서 공부해야 한다. 팀머의 선교사서 경험은 그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성경은 아직 ‘내 백성’ 이 되지 않은 사람들과 하나님 나라가 확립되지 못한 땅 그리고 그 땅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언약이자 왕의 통치로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선별적으로 성경을 읽는다. 어떤 책은 즐겨 읽고 어떤 책은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입술로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성경 일부에만 관심을 제한하고 나머지는 무시한다.

그 결과는 매우 가치 있는 대부분 본문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성경 본문의 깊은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성경 본문의 깊은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 이어질 전체적인 맥락을 따로 분리하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성경을 묶음집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한 권의 책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창세기 1장을 신화로 보는 것이 유행이다. 하지만 창세기는 신화가 아니다. 신화란 신에 대한 사유나 표상이 반영된 이야기다. 그러나 창세기는 신화와는 정반대다.

옛사람들의 사유가 만들어낸 신화를 거부하고 반박하며 파괴한다. 창세기 1장은 이방종교들의 핵심을 망치로 깨부수고 있다. 하나님은 실제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앞에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한 너의 주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 이집트 사람, 바벨론 사람, 그리고 페르시아 사람들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결정하는 신으로 태양, 달, 별 등을 신으로 섬겼다. 또 가나안 민족은 출산과 번식이라는 자연적 과정을 거룩하다고 믿었다.

창세기 1장의 주장은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이 신이라고 믿는 것들은 결코 신이 아니다. 그저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른 피조물일 뿐이다. 창조주라는 범주의 신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있으며, 다른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반복적으로 주변의 정치적 강대국들이 믿는 신들의 공격을 받았다. 창세기 1장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피조물을 신적 위치까지 높이고 숭배하는 유혹에 대해 대적하라고 명령한다. 태초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마지막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한 성전은 타락 이후에야 필요했다.

태초에 창조를 성전으로 묘사하고 있는 창세기 1장과 새 창조를 성전이 없는 거룩한 성으로 비유하는 요한 계시록 21장 사이에서 잃어버린 피조물을 인간의 역사 안으로 침투하시는 드라마가 펼쳐진다. 창조는 단지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존재하도록 하셨다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창조는 지속적인 혼돈의 위협에 대항해서 하나님이 계속 창조를 지탱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의 영원하신 뜻과 섭리로 천지의 모든 것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셨을 때 공허한 흑암 속에서 세상을 빚어내는 일을 시작하셨다. 밤은 지금의 창조 가운데 일부로 남게 된 흑암의 흔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매일 밤 피조물의 윤곽은 형태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매일의, 아침은 일종의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밤은 이 세상에 혼돈의 어둠 같은 것을 다시 가져오기 때문이다.



빛이 형태 없는 흑암 속에서 피조물을 비추고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밤이 요한계시록에서 표현하고 있는 새 창조의 일부가 될 순 없다. 세 창조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 양이 있기 때문이다.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21:23) 이제 창세기 1장에서 일곱 번 (3,6,9,14,20,24,26)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표현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역사였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의 제한을 넘어서면 안전하지 않고 오직 혼돈, 파괴 나아가 사망만이 있을 뿐임을 강조한다. 이 말은 우리의 삶에 오직 두 가지 선택이 있음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것인가, 혼돈의 권세에 굴복할 것인가? 이 선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열방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결정짓는다.

본문의 내용을 읽고나면 그 장의 내용을 공부하는 공간이 있다. ①창세기 1장의 중심 주제는 무엇인가? ②창조 이야기는 어떤 점에서 출애굽 사건과 닮았는가? ③저자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실수를 저지르는지에 대해 언급했다. ④창세기 1장을 다룬 이 장에서는 많은 사람의 큰 관심거리, 곧 “그리스도인은 우주의 기운에 관한 과학적 설명과 창조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어떻게 조화 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저자는 왜 문제를 다루지 않았는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아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암 9:7-8)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우리도 동일하게 모두 특별하게 만드셨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평가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말씀하신다.

그런 우리를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나와 지체들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하신 이유를 말해보자고 한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신들과 달리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신은 하나님을 깨끗게 비추는 거울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 온전하게 반영하고 있는가? 내가 세상에 비추고 있는 형상은 무엇인가? 자신이 다 생각해봐야 한다.

일곱째 날에 일어난 ‘안식’은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는 말씀에 근거해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안식일 제도가 신약 시대 이후 주일로 승화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와 안식을 생각해 볼 때 주일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본다. 시편 8편은 창조주께서 드리는 찬양이다. 배운 바에 대한 응답으로 시편 8편을 읽어 본다.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함께 익힐 수 있도록 본문을 읽고 저자의 질문에 답해본다. 아침과 밤이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라는 얘기가 새롭고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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