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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자, 별 하나
  • 피츠제럴드, 글쓰기의 분투
  •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 15,300원 (10%850)
  • 2025-04-28
  • : 220






저자 스콧 피츠제럴드는 미국의 소설가다. 1896년에 태어난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광란의 20년대’에 두각을 나타냈다. 20세기 초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화려하고 향락적인 재즈 시대의 아이콘이다. 자서전적 소설 〈낙원의 이편〉 (1920)을 발표하면서 비평가와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던 그는 1925년 발표한 〈위대한 개츠비〉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20세기 미국 소설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위대한 개츠비는 어마어마한 작품 같았다.

이후 〈밤은 부드러워〉( 1934)를 발표했으나 상업적으로 실패한다. 잇따른 작품의 실패와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부인 젤다의 병으로 절망에 빠진 피츠제럴드는 회복 불가능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며 마지막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1940년〈더라스트타이쿤〉을 집필하던 중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이 책을 엮은 사람은 래디 W. 필립스는 저널리스트, 작가, 프로 포커 플레리어다. 〈헤밍웨이, 글쓰기의 발견〉 편집자였고, 그는 위스콘신 주의 몬로에 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대량생산고 대량소비로 호황이 지속되면서 ‘광란의 20년대 ’라고 불렸다. 피츠제럴드의 경력은 이런 시대적 흐름과 궤를 함께한다. 깁슨 걸이라 불리는 순수하고 이상적인 여성상을 시작으로, 화려하고 요란한 1930년대를 보냈으며, 1940년대의 어둠 속에서 그의 생애는 끝자락에 이르렀다. 흥미롭게도 그의 삶은 그가 태어난 국가의 운명을 거울처럼 비춘다.

그는 언제나 본능적으로 자신이 속한 국가를 반영했다. 또한 스스로 외부 세계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보통 사람들보다 강하다고 말하곤 했다. 이 경향은 상호적이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고 그의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면서, 미국이라는 나라도 그를 통해 자신을 투영하려 했다.



이 책은 피츠제럴드가 글쓰기에 관하여 남긴 의견과 통찰을 모두 담고 있다. 이전에 출간된 《헤밍웨이, 글쓰기의 발견 》과 짝궁 책이다. 와 대단한 책이다.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는 사람의 관점은 각기 달랐지만, 다른 작가들에게 아낌없이 조언을 나누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진다. 헤밍웨이는 가르치는 일을 즐겼다는 사실은 너무 유명하다. 피츠제럴드 전기를 쓴 안드레 르봇은 피츠제렐드 역시 ‘배운 것을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 이라고 설명하며, 앤서니 포웰의 말을 인용한다.

가장 미국적인 두 작가가 지닌 글쓰기에 대한 신념의 차이가 궁금해진다. 이 두 작가는 세계를 향한 미국적 접근법을 대변한다. 헤밍웨이의 철학은 오늘은 남은 내 인생의 첫날이다라고 했다면 피츠제럴드의 철학은 조금 더 본질적이고 시적이며 헤밍웨이의 것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오늘은 연속적으로 보낸 지난 날들을 끓어내는 날이다.’라고 했다. 그의 철학은 시간이라는 개념과 깊이 얽혀 있어서, 언젠가 말콤코울리는 피츠 제럴드에게 ‘마치 시계와 달력으로 가득찬 방에 사는 사람같다는 ’표현까지 했다.

감정과 경험은 언어 이전의 영역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그것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글자를 조합해야 한다. 피츠제럴드는 이 과정을 누구보다 탁월하게 해낸 작가다. 혼자라고 느끼던 감정이 사실은 모두의 보편적 감정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그는 문학의 아름다움에 관해서 말한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우리가 가진 고독 과 좌절, 희망과 열정이 결코 개인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재즈 시대의 아이콘으로 결코 평탄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운명처럼 글쓰기를 시작했고, 생계를 위해 멈추지 않고 써내려갔다 하지만 결국,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는 일’임을 깨닫는다. 피츠제럴드는 문학가의 길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온전히 정제하여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로 탈바꿈시킨다고 했다. 또한 자신을 ‘문학적 도둑’이라 칭하며, 어디에서든 배움을 얻었다. 엉망으로 쓰인 책을 읽고 글쓰기에 용기를 얻었고, 위대한 작가의 글을 곱씹으며 위대한 이유를 파고들어 자신의 작품에 녹여냈다.

다른 작가를 경쟁자로 인식하기보다는 같은 소명을 짊어진 동료로 봤다. 그런 시각은 정말 좋은 시각같다. 조언을 구했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자신 역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사소한 것들을 중요한 것처럼 포장하는 게 특기였는데, 그런 책들도 거의 베스트셀러에 가까웠다. 그때 결심하고 책을 쓰기 시작 했다. 책을 쓰려면 메모부터 시작하는 거다. 아마 아주오랫동안 메모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언가 떠오르거나 기억이 나면, 반드시 적절한 자리에 적어 둬야 한다.

생각이 났을 때 바로 적어 둔다. 나중에 다시 떠올리면 처음처럼 생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작가는 무엇 하나 허투루 허비하지 않는다.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를 빨리 완성하고 싶었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아름다워도 맥락에 맞지 않으면 잘라내야 한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 , 적당히 괜찮은 것, 심지어 뛰어나 보이는 것도 잘라낼 수 있어야 한다.



예술가의 창작이 지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기존 스타일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듬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료를 고르는 것이다. 결국 모든 작가에게 글쓰기는 삶 그 자체나 마찬가지다. 아주 형편없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하지만 결국 대부분 소화하기 쉬운 음식만 곱씹으며 산다. 사건이나 인물은 삶에서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언제나 그가 읽은 최근 작품의 관점에서 그걸 해석한다. 지성인에게는 수준을 낮춰서 글을 쓰는 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데,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랭스턴 휴스나 스티븐 위트먼만 봐도 비극적인 책 한 권 쓰고 소식이 없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아나 정신을 가지지 못한 채 신경질적으로 주린 배만 움켜쥐어야 했기 때문이다. 배가 부르고 허영으로 기름칠을 좀 하고 나면, 세상은 낭만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얄팍한 대중물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진정성 있게 쓸 수 없게 된다.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의 제본은 다른 책들과 완전히 동일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겉표지랑 책에 찍히는 문양도 동일하게 하지만, 겉표지 추천사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멘켄, 루이스, 하워드, 뭐 이런 사람들 다 필요 없다고 했다.

만일 〈위대한 개츠비〉가 상업적으로 실패한다면 이유는 두 가지중 하나, 혹은 두 가지 때문일 것이다. 첫째, 제목이 그저 그렇다고 생각해 본다. 좋다기보다 오히려 나쁠 것이다. 둘째, 두 번째가 더 중요한 이유인데, 책에는 비중 있는 여성 인물이 전혀 없다. 요즘 소설 시장은 여성이 이끌어 가고 있는데 말이다. 비극적 결말은 사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겉표지 문구를 추천해보자면 ‘활기가 넘치는 초기 작품에서는 전례 없던 도전적인 미국소녀상을 그려냈고, 이후 진진한 분위기의 〈위대한 개츠비〉같은 작품을 탄생시키며 미국의 6대 거장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처럼 예기치 못한 전개, 다채로운 빛깔, 그리고 고요와 격정이 교차하는 리듬을 보여준 작가는 지금까지 없었다. 어조는 조금 조정해야겠지만 피츠제럴드는 해냈다. 글을 쓰며 산다는 것은 삶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글쓰기는 성실함과 장인정신에서 비롯되었다. 난 저자가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인지 모르고 이 책을 읽었다가 개츠비의 작가인 걸 알고 반가웠다. 항상 유튜버들도 그렇고 상대는 나를 모르지만 나혼자 안다고 해도 혼자서 반갑다. 이 책도 그런 느낌이었다. 개츠비의 얘기를 모두 알아서 저자가 가깝게 느껴졌거 그의 글쓰기가 더 와닿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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