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조부모님이 시골에서 과수원을 하셔서 중학교 여름 방학 때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낯선 풍경과 내 집 같지 않은 잠자리, 그리고 생소한 벌레들 속에서 즐거움에만 들떠서 왁자지껄 나눴던 대화는 이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1박 2일 외박이라는 사실 자체에 잔뜩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 오디오가 비어 있을 틈이 없던 중딩 넷이서 말 한마디 없이 조용했던 순간만큼은 또렷하다. 그건 셀 수도 없이 많은 별이 떠 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봤을 때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많은 별을 봤던 꿈 같으면서도 생생한 그 순간이 중국 북방 서민의 삶을 담은 츠쯔젠의 <가장 짧은 낮>을 읽는 동안 자연스레 떠올려졌다.
1년에 딱 하루 목욕을 하는 섣달 스무이렛날, 가족들을 위해 목욕물을 데우고 오수를 버리러 강가로 가는 수고를 해야만 했던 「깨끗한 물」에 등장하는 소년 ‘톈두’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톱니바퀴 같은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부터 황혼의 끄트머리에서 두려움 없이 힘이 넘쳤던 시절을 그려보는 노인의 서글픈 정경까지... 이 책에 담긴 열여섯 편의 단편은 역사적 운명과 사람 간의 인연으로 얽혀 눈이 녹지 않은 길을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걸어가듯 놀란 가슴으로 늘 안심할 수 없는 불안감을 가진 채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부터 특별한 사건 없이 그저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까지 잔잔하게 흐른다.
얼음이 녹으면서 진흙탕으로 변한 마을 길에 너도나도 주르륵 미끄러져 집마다 엄마들은 늘어난 빨랫감과 함께 닳아가는 비누가 여간 아까운 게 아니고, 오늘은 좀 다르려나 했지만 영락없이 미끄러져 바지와 책가방에 잔뜩 진흙이 묻은 바람에 또 한 소리 들을까 봐 들어오지도 못하는 아이들과 눈치만 보는 남편의 모습.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의 형편과 사정이 달라 제각기 나름의 골치를 앓아가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밤이면 하늘에 별이 가득하니 아름답기만 하고, 언제나 눈이 다 녹을까 하소연하지만 금세 또 계절이 지나 서서히 따스한 바람도 불어오고 밭일을 위해 농기구 손질을 할 때가 돌아온다. 그 와중에 내 식구끼리도 뜻이 달라 서로 미워하고 의심하고 토라지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위로하고 감싼다. 그러니 고단한 삶도 살아지는가 보다.
아무것도 위로가 안 돼서 콧물 한 번 훌쩍이며 밖으로 나가면, 밤하늘에 떠 있는 별과 맑고 차가운 달빛이 토라진 마음을 슬쩍 녹여주는 마법을 부려준다. 눈앞에 그려지는 자연과 사람들의 입김, 그리고 아이들이 듣기 남사스러운 이야기를 껄껄거리며 주고받는 어른들의 대화를 비롯해 숨기지 못하고 저절로 툭 튀어나오는 본심을 실감 나게 표현해서인지 읽는 맛이 좋았다. 사소한 말도 더 재미있게, 그것도 본인은 웃지도 않고 시치미 떼듯 담백하게 들려주니 피식피식 웃어댈 일이 종종 생겨났다.
아빠는 얼굴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데다 코에는 연륜이 다른 푸른콧물 두 가닥이 얼어붙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얼굴이 문드러진 것 같았다. (「깨끗한 물」, p. 25)
순박하지만, 눈치 없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매서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목욕통을 고쳐 달라는 이웃집 과부의 부탁으로 나갔다가 그 집에 화장(火墻)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게 마음에 걸려 연통 안에 남은 재까지 파내주느라 재 범벅을 하고 돌아온 모습을 담은 문장인데, 날이 얼마나 추웠는지 모를 수가 없다. 그보다 연륜이 다른 콧물이라니?! 앜ㅋㅋㅋㅋㅋ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쑤저광’의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얼음이 녹아 진흙탕으로 변한 마을 길에 미끄러지기 일쑤라 낡은 옷과 신발을 신고 다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일하게 깔끔하고 멋지게 구두를 신고 중산복을 차려입고 다니는 쑤저광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따박따박 월급을 받아 살아가니 자기네들처럼 수확 걱정은 없을 거라 이기죽거리지만, 그에게도 남모를 속사정은 있다. 문화대혁명 시절에 학교에 공선대가 쳐들어와 축목장으로 하방 되어 작업복을 입고 돼지를 키웠던 그가 복권되어 다시 원래의 직위로 돌아왔건만, 급작스러운 출장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침울한 마음으로 사무실에서 물건들을 하나둘 정리하다 평소 몰래 쓴 시가 적힌 종이들을 뒤적거려 본다.
스스로 심사 위원이 되어 살아남아야 할 시와 총살당해야 할 시들을 판결했다. 그의 심사를 받아 살아남은 시는 다섯 수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판결한 시들을 팔이 잘린 비너스 상처럼 수기로 쓴 『납란사(納蘭詞)』 한 권과 함께 신문지로 싸서 복도에 있는 화로 속에 넣어버렸다. 파박-하는 소리와 함께 화로가 잠시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불길이 그의 재물들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한숨을 내쉬고 화로 곁을 떠난 쑤저광은 사무실로 돌아와 마른 나무처럼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해빙」, p. 75)
소자산계급 정서가 느껴지는 시와 함께 아궁이처럼 활활 타오르는 열정과 욕망이 조금이라도 내비치는 시는 퇴폐적이라 태우고, 이건 이래서 태우고 저건 저래서 태우고 나니 남은 건 찬바람 도는 처량함뿐이다.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그 시절을 견디는 쑤저광을 포함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억울해하거나 분노하고 시대를 비꼰다는 느낌은 크게 받지 못했다. 국가 시책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오늘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농촌 마을 사람들, 그리고 각자 처한 상황에서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손과 말은 거칠어도 서로의 형편을 헤아리고 힘을 보태는 모습에 더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옛 우리 어른들의 삶을 들추어보듯 말이다. 애간장만 죽도록 녹이면서 아슬아슬하게 긴장하고 있다가 막상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한시름 놓고 이내 술 한 잔 마실 생각을 한다든지, 이웃에게 받은 배려에 당장은 고마운 마음이 커서 담배 한 보루라도 사서 갖다주려고 나왔다가 이내 본전 생각이 나서 도로 집으로 쓱 들어가 버리기도 하는 그런 서민의 삶 말이다.
동물과 교감하며 서로 측은지심을 갖는 이의 모습에 마음의 기름때가 벗겨지는 듯한 동화 같은 이야기부터 삶의 애환에 인간의 본성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글까지, 내 정서와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리운 시절과 잊지 못할 사람에 대한 기억이 더욱 마음 한편을 시리게 하는 계절이 와서인지 빈 공간이 유독 선명해진 탓에 생긴 허전함을, 열여섯 편의 단편을 애달파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는 동안 마음 온도가 높아져 시린 한구석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었다. (훌쩍) 인위적이지 않은 순수한 모습을 한 사람들의 삶을 보면 독한 기운이 빠지는 듯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며, 자칫 지나쳐도 감성에만 치우칠 수 있다. 그런데 손으로 휘저으며 목욕통 속 물 온도를 마침맞도록 조절한 듯한 이야기가 골고루 담겨 있어서인지,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나에게는 딱 맞는 따뜻한 물에 몸을 푸~욱 담가 본 느낌이었다.
어둠에서는 손전등을 켜야 주변을 살필 수 있듯이, 여유롭고 화려함에 가려져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비춘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타인의 삶을 헤아려보는 그녀의 넉넉한 마음이 읽히면서도 내 옷깃을 한 번 더 여미고 추스르느라 소홀했던 것들이 떠올라서인지 쌓아둔다고 소용은 없는데도 후회와 죄책감을 탁 털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 때가 아님을 느낀다. 그래도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는 듯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이야기 덕분인지 잊지 못할 멋진 광경과 아름다운 추억을 다시 떠올려보는 활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신중하게 맥을 짚듯 무게를 실어 전하는 격언이 담긴 이야기 뒤로 펼쳐지는 계절의 변화를 담은 풍경과 함께 여러 사람의 모습을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비춰주기에 꽤 많은 분량이지만 꾸역꾸역 읽어내야 할 일은 단연코 없었다. 이제는 기력도 예전만 못하고 시든 풀과 차가운 눈이 시야에 더 들어온다는 츠쯔젠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궁금하긴 해도 분량이 조금 부담스럽다면, 시간 날 때마다 천천히 조금씩 읽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 각 단편에 담긴 긴 여운이 댕강 잘려나가듯 하지 않으니 말이다. 특히, 톈두가 올려다본 밤하늘에 뜬 별은 정말 너무나 아름다웠을 것 같다.
톈두는 머리를 목욕통 위에 얹어놓고 있어 창밖의 깊은 어둠을 바라볼 수 있었고, 밤의 어둠 속에서 오래 꺼지지 않는 별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그 별들이 이미 망망한 어둠을 가로질러 자기 방 창문 안으로 들어온 목욕통 속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연노란 쥐엄나무 꽃처럼 맑은 향기를 내뿜으면서 한 해의 풍진을 다 씻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깨끗한 물」, p. 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