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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 제자리에 있다는 것
  • 클레르 마랭
  • 15,120원 (10%840)
  • 2025-05-12
  • : 3,860

나만 읽었으면 하는 책, 오직 나만이 소유한 책이었으면 하는 이기심을 작동케 하는 책이다. ‘자리’가 함유하는 삶의 수많은 양태들에 대한 사유 그 어느 문장도 읽는 이의 내면에 파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없다. 자리를 박차고 떠나기를 갈망하는, 제자리라고 여겼던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자리가 나를 한없이 줄어들게 하고, 내 안의 목소리를 잠재우게 하는 속박임을, 나를 한계에 속박해 제약하는 자리임을 직시하게 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럼에도 떠나지 못하는 무의식으로 은폐된 것의 실체, 내 자리에 얽혀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한 배반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하는 두려움의 주춤거림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자리에 대한 이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탐사의 여정은 하나의 어휘, 문장, 페이지마다 간결하고 압축적인 의미들이 빠짐없이 그대로 공감의 전율로 내게 전해졌다. 하나의 의미도 놓치지 않으려고 밑줄과 텍스트의 여백에 “감탄과 동의와 놀라움”의 메시지들을 써놓는 일을 처음으로 집요하게 하도록 한 책이다.

 

‘자리’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 또는 동식물과 사물이 위치하고 있는 공간’에서부터 ‘일정한 조직체에서의 직위나 지위,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 이라는 십여 가지 뜻이 나열되어 있다. 더욱이 이러한 사전적 의미뿐 아니라 그 상징적이거나 각종 비유의 뜻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다의(多義)성을 지닌 어휘라 할 수 있다. 또한 ‘제자리’는 있어야 마땅한 또는 본래 있거나, 위치변화가 없는 위의 모든 의미를 품은 자리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리라.

 

따라서 책의 제목에 있는 '제자리에 있다(etre â sa place)'는 것은 본래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거나, 마땅히 있어야(머물러야) 하거나, 고정되어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아우른다. 이로부터 우리는 몇 가지 물음을 떠올릴 수 있다. 내가 있어야 할 제자리란 정말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진정한 장소이자 공간일까? 그 자리는 변화없이 내가 머물 수 있는 곳일까? 만일 누군가 내게 “제자리를 지키라”고 할 때 그것은 대체 어떤 함의를 품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제자리란 대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 것일까? 만일 제자리라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라고 할당된 자리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 불편과 불쾌감으로 여겨질 때 나는 다른 자리로 이동하여 새로운 자리를 제자리로 삼을 수 있을까?

 

책은 바로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사유이며 응답이고, 그것은 ‘제자리’를 중심으로 우리들이 ‘자리’라고 부르는 것들이 삶의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며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의 통찰이다. 나아가서 우리들 개인 각자의 ‘바른 자리’로서의 제자리를 어떻게 발견하고 그것은 또한 어떠한 자리여야 함을 이해케 하는 삶의 주체자로서의 각성에 대한 찬란한 철학적 웅변이다. 저자 클래르 마랭은 이들 자리에 대한 성찰의 여정에 그녀의 깊고 총명한 사유들을 조르주 페렉, 앙리 미쇼, 마르그리트 뒤라스, 아니 에르노 등의 문학작품들,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푸코, 샹탈 자케 등의 철학적 담론은 물론 영화작품까지 아우르며, 끊임없이 ‘자리옮김’을 지속하는 이동하는 존재로서의 삶인 우리 인간들의 불가피한 행위의 의미를 파헤친다.

 

“우리는 결코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으며, 때로는 이동하지 않고서도

내면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 문장은 마치 우리네 삶의 형식이 정주(定住)민과 유목(遊牧)민으로 양분되어 있어 양자택일의 선택 가능성이 있는 듯 하는 말들에 대한 조르주 페렉의 비판에서 연유한, 저자 클래르 마랭의 언어이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언제나 하나의 여정인 것을 어찌 정주와 유목이라 구분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문득 혹은 수시로 어떤 삶의 한 자리에 갇혀있음을 깨닫고, 그 자리로부터의 탈주를 꿈꾸곤 하지 않나? 또한 이미 속해 있는 정서와 관계적 공간에 안주하고 있었음에 대한 피로가 습격해오기도 하고, 때론 분류하고 낙오시킴으로써 질서와 위계를 지닌 자리들은 제자리라고 여겼을 자리가 강제와 압제의 성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급기야 도저히 살 수 없는 자리도 있다. 숨 막히게 하는 자리가 야기하는, 내 태도와 행동을 규정하고 결정짓는 암묵적인 보이지 않는 강제들로 내 삶의 창의를 중단시키고 훼방하는 사회 또는 가족이 지닌 관성의 힘이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가? 이때 우리는 지금의 자리를 벗어나 다른 자리로의 이동을, 그 떠남을 고뇌하지 않는가?

 

이 제자리라는 말은 양면성을 지닌 단어다. 각자의 고유성이 사라진 촘촘하게 짜인 세계, 모든 것이 마치 계획되어 있어 갈림길조차 예측하는 게 가능해 보이는 삶이라고, 내 주변과 사회는 자신이 되어야만 하는 것, 기대되는 것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무언의 압력을 가한다.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가해지는, 결코 상상하지 못하게끔 옥죄는 세계의 자리 말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들은 내게 맞지 않는 자리를 떠나 새로운 삶의 양식을 향해, 마음껏 자유 넘치는 창의의 삶이 가능한 희망으로써의 제자리도 있다. 그래, 우리 인간은 고정된 질서로서의 제자리와 욕망을 실현할 새로운 삶의 지대로써 제자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고 표류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떠난다는 것이 그저 지금이라는 현실에 얽힌 것들을 툭툭 털어내고 도주하면 되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이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기는 일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주체의 자리 자체를 옮기는 훨씬 내면적인 자기성찰의 과정을 수반할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각종의 구조물과 논리와 신호의 벽들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이동을 방해받는다. 오랫동안 나를 정의해 왔던 자리를 버리고 다른 정체성을 주장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옥죄는 끈들이 발하는 무언의 관성적 요구들이 수시로 새로운 삶의 도전 길에 심리적 억압을 지속한다. 이도 저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제자리로 불리는 이 자리에 염오(厭惡)와 근원적 불쾌감이 솟구친다. 물질적으로 저당잡히고, 족쇄가 채워진 이 제자리를 떠나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며 나를 정의해 왔던 정체성을 버리고 다른 정체성을 주장하려는 것을 주저케 한다. 그들이, 사회가 나를 배반자라고, 인간의 도리와 세상 삶의 관습을 저버렸다고, 아니 내 스스로가 이러한 족쇄들을 저버렸음에 대한 죄책감을 떨어내지 못하는 까닭일 것이다.

 

이미 머물러 익숙해진 장소, 이것에 나를 맞추고 순응했기에 가능했던 자리, 이것을 안정이라 믿으며 정체된 삶에 나는 정말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었음을 알아 버렸다. 내 실존은 얼붙었고, 이동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평온함과 친숙함에 웅크린 채 안주해왔던 삶을 이제 떨쳐버리려 한다. “동물은 자신의 환경 속에 갇힌 채 ‘세계 빈곤’ 속에 존재한다.” 이처럼 단순한 삶 속에서 제자리에 존재한다는 것은 축소된 세계의 제한된 실존에 만족하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들은 이 제자리에서의 탈주를 상상하는 존재이지 않은가? 우리들은 뿌리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이동하는 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사전에 결정된 세계에 사는 것을 끔찍이도 고통스러워하는, 그래서 타자의 세계, 우리 자신의 환경 바깥으로 이동하려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가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하여 주는 곳, 세계로부터 나를 잘 지켜 보호해 주는 구역과 관계 맺기를 갈망한다. 정말 내 삶의 원기를 생생하게 회복시켜주는 곳,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 갈 것을 제안하는 장소를 향한 자리옮김을 희구한다. 내 존재를 문제 삼지 않는 곳,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는 곳, 내 실존을 편안하게 해주는 곳을 향한 이동을. 물론 다른 자리로 떠나기 위해서는 그 다른 자리에 진입하기 위한 주문과 규칙과 비밀번호가 있을 것이다. 그곳을 지배하는 언어와 여러 식별표지를 해독하는 배움을 지녀야 할게다. 설혹 실패할지라도 아마 그 소란과 잡음의 모험이 불러일으키는 해방의 환희와 흥분이 삶의 즐거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언제부터 내 목소리를 잃었을까? 웃음, 고함, 직설적인 말들은

나의 음성 레퍼토리에서 사라졌다.”

 

책은 이와 같은 인간 보편의 자리옮김에 대한 존재적이고 실존적 욕망의 본질만을 탐사하는 것은 아니다. 자리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고 억압하는 방법으로서 선택하는 힘을 포기케 하는 힘의 작동이기도 한다. 자리는 여성, 서민, 그 밖의 소외된 무수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리, 할당된 틀 안에 머물라고 욕망의 제한을 명령하기도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이 인용되고 있는데, 마치 과거가 ‘나’라는 자신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할 의무를 짊어지기라도 한 듯 숙명적 수치심의 자리, 자기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실패와 결말에서 도주할 수 없음을 내면화시킨 자리도 있다. 자신의 저주받은 정체성, 혈육의 자리, 그 실추를 피하기 위해, 딸에게 도망치기를 엄명하는 어머니를 마르그리트는 쓴다.

 

아마 이와 유사한 저리의 형태로 장애의 자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면화시키는 사회의 여러 형상들이 사회문턱을 암시하며 스스로 제자리에 있어야 함을, 제자리에 있지 않음을 책망하듯 장애를 확인시킨다. “모든 것이 너무 높거나 낮고, 넓거나 좁으며, 위험하거나 접근 불가능할 때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게 된다. 이 세계가 이러한 물질적 공간으로 장애를 생산하며, 공간과 자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은밀히 강요한다.

 

이렇게 삶을 축소하고 사라지기를 내면화시키며, 내 자리의 투명화를 요구하는 세계는 우리에게서 제목소리를 앗아간다. 이것은 비단 사회라는 거대조직의 일반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가족 사이에서, 가까운 지인들의 모임에서, 나를 비교적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내 말허리를 자르고, 나 대신 말하며, 나에게 감히 삶을 설명하려는” 상황을 빈번하게 마주할 때, 우리는 제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게 되고, 이 체계적으로 평가절하당하는 현상 속에서 스스로 목소리 내는 것을 금하기에 이른다. 내가 있는 자리가 맞지 않다는 듯 자리를 부정하는 시선과 행태들이 우리들을 점점 줄어들게 한다.

 

결국 밖으로 기어나오는 목소리는 다른 이들이 듣고 싶어 할만한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축소를 위한 노력에 경주하는 왜소한 스스로에 지쳐버린다. 다시 말하자면 “내 입을 막는 것은 누구 손인가?” 라고 물을 때 그 손이 바로 내 손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억압하는 내면화된 자기 축소, 자기 부재를 형상화하려는 움츠려든 자아 말이다. 실존의 심장부에서 올라오는, 자기 검열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해줄 테시투라(]tessitura), 우리 고유의 목소리를 해방시켜줄 제자리를 향한 떠남, 주체가 자신과 맺는 관계의 변화를 만들어줄 자리로의 탈주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리라.

 

아니 에르노는 인터뷰집인 《진정한 장소》에서 자신의 계급 횡단으로 인한 제자리의 벗어남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뿌리였던 과거와 현재의 자리가 가져오는 이중의 거리로 인한 괴리, 지금 속해있는 자리가 마치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 같은, 성취도 진짜 성취처럼 여겨지지 않는 신중함을 요구할 때 계급횡단자들, 망명자들, 이주민들은 그 낯섦의 감각에 당혹스러워 한다. “마치 저의 진짜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진짜 그곳에 있지 않으면서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라고 말하며, 두 계급 사이를 통과하는, 혹은 두 개의 영토가 교차하는 경험을 가진 자들의 견뎌야 할 지배적 도식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만이 삶을 버텨낼 수 있었음을 증언하기도 한다. 철학자 샹탈 자케가 말하는 “동일자의 반복 또는 감금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능력”이라고 특징지은 ‘비-재생산’, 아마 이것이 바로 삶의 영속적 재구축과 재배치를 만들어내는 역동력이 아닐까?

 

우리는 결코 실존 안에서 제자리에 머물 수 없는 존재인 것만 같다. 부유(浮游)하는 존재, 모든 인간 존재가 유목인임을 자각할 때 자리에 대한 그 고정적이고 억압적이며 폭력성마저 띠고 있는 자리를 둘러싼 투쟁, 공간의 시련은 조금이라도 이완되지 않을까? 책은 많은 지면에서 실제적이든 상징적이든 변두리로 몰린다는 것, 즉 부적절한 자리에 놓여 삶이 위축되고 발목 잡히는 양태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의 발목을 잡아 우리의 행동과 욕망이 일치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래서 타이밍을 잃고 기차를 놓쳐버리게 되는 자리들을 생각게 한다. 어떤 자리도 소유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점유해야만 하는 자리가 있는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해야만 하는 부재증명의 역설적 자리도 있다.

 

여기 있지만 절대 드러나서는 안 되는 자리, 제자리에 있으라고 요구받은 자리는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린다. 자리란 이렇게 다양한 실존의 혼란이 초래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제자리를 찾는 여정을 멈출 수 없다. 진정한 장소를 찾기 위해, 제자리라는 감각을 찾기 위해 자신의 생의 사실을 쓰는 순간만큼 살아있음을 느꼈던 아니 에르노처럼 우리들은 영원히 자리올김의 표류를 하는 존재일 것이다. 다른 장소를 향한 꿈으로부터 우리들은 자기 정체성의 양분을 공급받는 것일 게다. 내가 열망하는 이 자리, 제자리에 있다고 느끼는 현실적이면서 내면적인 장소, 내 실존이 평온함을 느끼는 자리를 향한 그 지고한 공간배치에 대한 인간의 염원을 풍부하게 향유할 문학적 문법의 아름다운 철학담론서다. 진정한 내 자리를 고뇌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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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미하엘 페리에의 《바다저편의 회고록》의 한 문장에 나의 느낌을 이입하여 변용한 글이다. 아마 이것이 이 책에 대한 진정한 감응의 소산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이 통렬한 잔인함에서 고통과 희열이 교차하는 착잡한 해방감을 느낀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언급에서 순간 얼어붙지만, 이 ‘죽음의 시계추’같은 생동감 없이 작동하는 삶의 복종에서 탈주하는 것이 불가피함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나는 어렴풋한 내 육체의 지시에 따르기로 결심한다. 나는 떠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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