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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우리들이 어떤 새로운 현상에 대한 사실을 자신의 앎으로 인지하고 그로인한 반응에 적합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전혀 별개라는 것은 정말 인간만이 지닌 기괴함이 아닐 수 없다. 여타 동물은 자신에게 위협될 만한 어떤 사태가 발생하면 예외 없이 그에 따른 행동(반작용)을 취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간, 특히 자신이 특권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자들일수록 명백하고도 자명한 사실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여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정도는 권력의 정도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것도 기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 예외적 태도를 눈여겨 본 사람들은 예전에도 있었겠지만, 오늘날 이러한 실태는 우리들의 일상적 언행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 앞에서 그 사실에 대해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라며, 마치 복잡하고 미묘한 무엇이 있어 그것들을 샅샅이 검증해야 그 명백한 사실이 확정된다는 듯 주장하며, 당면한 사실을 상대화시켜버리는 것이다. 바로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하고 선관위 등 사법기구를 점탈하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TV화면으로 송출되었는데도 ‘상황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라고, 문제의 본질을 모호한 상대적 사실로 전락시키고는 폭력행위를 방어행위로 둔갑시켜버린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양상에 대해서 기록으로 남겨왔다. 문학, 철학, 역사 등등에서 후각이 발달한 소설가, 철학자, 사가(史)들은 이 자명한 것을 복잡하고 모호하게 표현하는 사람들로부터 불온하고 구린내 나는 범죄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명언이 출현했다.

 

“우리는 명백한 것의 힘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이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서의 행동(조치)에 나서지 않을 뿐 아니라, 만연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무감각, 무반응, 무저항, 비(非)행동, 나아가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옹호하거나, 둔갑한, 즉 왜곡된 사실에 동조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 자명한 사실, 혹은 범죄의 사실은 오리무중의 교착 상태에 빠지고, 방향을 상실하며 사회적 혼돈을 낳는다. 물론 이렇게 사실을 상대화하는 자들이 노리는 사태가 바로 이러한 혼란으로서의 사회적 무능력의 생산임을 말해 무엇 할까.


【영화〈돈 룩업! Don't Look Up!〉에서 ‘비지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메릴 스트립-출처 Netflix】

 

아담 맥케이 감독의 2021년 블랙코미디로 범주화할 수 있는 영화 〈돈 룩업! Don't Look Up!〉은 이렇게 명백한 것을 자신들만은 회피할 수 있다고, 그 자명한 사실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인간 군상들을 묘사한다. 이것을 조금 현학적인 개념어로 ‘비지식(non-knowledge)’이라고 부른다. ‘알지만 진심으로 믿지 않거나 자신과는 무관한 타자의 앎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칭한다. 영화에서 대통령으로 연기하는 메릴 스트립은 혜성의 궤도가 지구와 충돌하는 것임을 알았는데에도 불구하고 “혜성이 지구에 떨어지면 슈퍼볼 경기는 안 열리겠네?” 라고 지구의 생명체가 모두 사라져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가히 어처구니없으며, 천연덕스러운 질문을 한다. 자신의 질문이 종말적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방송 앵커들 또한 혜성의 지구 충돌이 자신들의 세계와는 무관한 듯 웃고 떠들어댄다. 자명한 사실은 그저 자명할 뿐이다. 그 명백한 위험 앞에 누가 온전하겠는가? 영화는 허구 아니냐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을게다. 그렇지 않다. 불과 몇 년 전 지구촌을 온통 휩쓴 코로나19의 방역에 모든 인류가 참여해야 했음에도, 당시 영국의 총리 보리스 존슨은 그 위험이 자신에는 해당하지 않는 다고 여겼다. 결국 그는 위중한 상태에 빠져 요단강 근처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돌아왔다. 이것을 어리석음이라고 간단히 치부하면 인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모든 사람들을 ‘안다고 가정(假定)된 주체’로 이해하지만, 단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와 얘기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지난 3년 남짓한 검찰 독재 정권에서 각종 재해가 줄줄이 발생하고,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그 명백한 사실, 조금 완곡하게 표현해서 예측 가능한 사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으로 외면함으로써 재난을 고스란히 재앙으로 만드는 꼴을 보았다. 재앙이 임박하고 있음에도 시장, 도지사가 현장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그리곤 재난은 으레 재앙을 몰고 오는 것이기에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대통령부터 책임 주무처 장관인 행자부 장관, 도지사. 시장, 군수, 그리고 관련 기관의 책임자들은 책임을 회피했으며, 남의 탓이고, 오히려 문제를 상대화시키고는, 야당과 비판적 언론을 향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한다며 매도하기까지 했다.

 

‘알지만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하는 인간들은 정말 반사회적 인간들이거나, 그 사실에 대한 의미를 정작 알지 못한 인간들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순진하게만 이해하는 것도 문제인 것이, 이러한 태도들에 상대화라는 속임 술책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 개, 돼지인 시민의 안위에 관심을 갖기 싫은 것뿐이다. 때문에 이들은 재앙의 도래를 알고 있었으며, 다만 사태의 책임으로부터 달아나는 전술로써 ’알지만 믿지 않는 척‘ 하는 술수를 사용 한 것이다. 지금 이 사회의 상부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인 법관, 검사, 각 부처의 고위관료들의 행태가 이러한 실상을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이 자들은 자명함에다 빈번하게 모호하고 복잡성이 있어 보이는 것처럼 명백한 사실이 아니라고 상대화하고는, 이어서 그 자명함을 뒤엎어 버린다. 이 자들에게는 오로지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앎이 실효적이기 때문이다. 비지식이 기득권의 책임 회피이자, 진실의 무력화 전술인 것은 그리 새로운 인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알지만,...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말에 대해 지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다시금 기억의 상부에 떠올려 놓아야 할 것이다. 불법 계엄인 것은 알지만, 그것을 위헌적이고 불법행위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이 〈돈 룩업! Don't Look Up!〉을 관람하며 낄낄거리는 희극 장면은 과연 가관일 것이다.

 

관점을 조금 변경하여, 이 명백한 것을 보고는 우리들은 간혹 그 명백함으로 인해 소홀히 취급하곤 한다. 설마 저렇게 자명한데 거기에 무슨 사건적 진실이나 위험, 범죄가 있겠어? 라고 의심을 차단해버린다. 그런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는 부정한 짓을 하고는 그 의심하게 만드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명료하게 만들어 마치 그 사실의 명백성으로 인해 범죄적 요소가 없는 것처럼 연출한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속임수요, 범죄의 단서이기 일쑤다.

 

이와 반대로 의도적으로 어떤 사태를 포장하여 마치 은밀히 숨겨진 것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쓰지만, 정작 그 이면에서는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는 짓거리가 무수히 벌어진다. 이 두 종류의 속임수를 ‘이중적 신비화 전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점에서 이중적 신비화는 비지식의 행동과 그 본질이 같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할로 저택의 비극》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것처럼 보이는 지점이 바로 단서 그 자체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실제 행동을 감추는 이중적 신비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바로 알지만 진심으로 믿지 않는 인간의 심리적 속성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인데, 이 교활한 술책이 지난 3년의 검찰 독재 권력이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 추악한 방법이다. 검찰이 마약과의 전쟁을 구호로 외칠 때, 대규모 마약사범은 유유히 세관을 통과했으며, 페이퍼 컴퍼니에 국가 석유자원 시추 사업권을 불하하는 행위들이 모두 이러한 이중적 신비화의 속임수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것이다. 왜 명약관화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동하지 않는가이다. 지금 바로 우리의 눈앞에 내란 세력들,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 이것들을 비호함으로써 기득권을 향유하는 세력들이 무도함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자명한 불의에 특정 지역의 군상들은 결단코 움직이지 않거나, 그 명료한 사실을 상대화, 무력화한 집단에 붙어 요지부동이다. 왜 그럴까? 그 은폐된, 속임수로 가려진 것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인데, 바로 강제된 자유를 자신들의 자유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지배하는 강제, 저항의 상대가 없는 까닭이다. 강제하는 상대가 없다고 여기기에 애초에 그들은 저항의 생각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과 다름, 타자들은 부정한 것이고, 그래서 타자는 말끔히 배제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기에 그들에게는 무조건의 긍정만이 있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과잉에 흠뻑 젖어있다. “긍정성과잉은 곧 폭력의 산실”이라고 슬라보예 지젝은 《Freedom; A Disease Without Cure》에서 역설한다. 지금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두르며 비지식을 과시하는 저열한 것들의 행태나 반도 동남지역 군상들의 행태가 폭력성과 혼돈의 양태를 보이는 이유이다.

 

나는 알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 비지식의 행태와 이의 유사양식인 이중 신비화의 위선이 이 사회의 정의와 도덕성, 그리고 진실을 방해하거나 후퇴시키고 있다. 이제 대선이 막바지에 들어섰다. 새로운 ‘정상’ 국가의 과정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모든 상황을 총체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국면에 진입했다. 철저한 대개혁, 대수술을 통해 이 사회의 단물을 70여 년 간 독식하며 건강한 시민들을 병들게 했던 암세포를 확실히 도려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손상된 마음과 신체가 다시금 활력을 되찾는 선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선거가 끝나고 환희의 마음으로 이 글을 다시 다른 마음의 시선으로 읽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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