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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 격언집
  • 에라스무스
  • 8,010원 (10%440)
  • 2014-11-07
  • : 555

에라스무스는 이 책 《격언집; Adagia》에 나름의 엄중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듯, 격언(Paraoemia)의 정의에서부터 가치와 유익성, 그 용례에 이르는 거의 한 편의 논문이라 할 40여 쪽의 서문(序文)을 붙이고 있다. 에라스무스의 이 글을 찾은 이유는 《우신예찬; Moriae Encomium》의 참고문헌으로서의 의미였는데, 오히려 그 통렬하고 신선한 반전의 내용들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가질 정도였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

 

지나치다는 말을 해서 말인데, ‘절대 지나치지 말라!(Ne quid nimis)’는 격언도 설명되고 있어 이로부터 시작해야 할 모양이다. 이 문장은 고대 그리스 현자들의 가장 유명한 금언 세 가지 중 두 번째에 해당될 만큼 인간 삶에 있어 그 의미의 중차대함이 지극한 말이다. 무엇이든 정도를 넘어서지 말라는 지혜인데, 수시로 이러한 과도함 또는 미흡함에 머물고 마는 일이 허다한 내게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주문이겠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잘못은 모든 일에 있어 그 정도를 다스리지 못함”에 있다고 지적했단다. 아무렴 고대 그리스 현자들은 절제, 중용의 덕을 합창하듯 반복한 모양인데, 이것은 인간의 언행에는 항시 지나침이 있기 마련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내 독서의 의도인 어리석음의 광범위한 편재성에 대한 혹독한 일깨움, 그 신랄한 자성(自省)의 문장들을 말해야겠다. 우신(愚神), 어리석음을 모티브로 한 격언들의 장은 여타 격언들보다 그 해설이나, 저자의 주장이 길게 서술되고 있다는 것도 이 격언집의 한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어리석음에 관련된 격언은 ‘고통을 겪으면 바보도 현명해진다( Malo accepto stultus sapit)'이다. 이 격언은 조금씩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고통을 겪음으로써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는 인간의 태생적 미련함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지만, “상처를 입는 것이 곧 배움”이라는 고통의 긍정적 수용의 말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인간은 험한 꼴을 꼭 눈으로 보고서야 그 쓴맛을 알아차리는 종이라는 말일 게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아는 미련함이 이 사회 기득계층이 자리한 곳곳에서 드러나니 말이다.

 

이어서 ‘왕으로 태어나든지 바보로 태어나야 한다’는 조금 독특한 격언도 있는 모양인데, 바보와 왕을 연결하여 어떤 의미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어리석음이다. 에라스무스는 제왕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실례들을 소개하고는 그들은 “상당부분 대단한 어리석음을 갖추고 있었음”이 명백하다고 단언한다. 《우신예찬》의 그 통렬한 풍자의 문장들과 상당부분 그 개념에서 겹치고 있는데, 국가 통치에는 전혀 지혜가 없으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 모으는데 악착같은 제왕들의 숱한 어리석음이 끝도 없이 나열된다.

 

그러고서는 어리석음을 뽐내며 인류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지 않은 왕은 찾아 볼 수 없다고 그 명단을 계속 늘려갈 수 있기에 멈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이유는 바로 제왕의 어리석음에 못지않은 멍청한 백성들이 바보같은 이유로 떠받들고 있음에 있다고 지적한다. 1510년의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에 살던 인간이나 2025년 동아시아 한반도의 인간들이나 그 변하지 않는 어리석음에서 소설가 한강이 말한 어떻게 인간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통회(痛悔)의 물음을 떠올리는 건 아마 당연한 연상일 것이다.

 

이쯤에서 격언의 정의(定義)를 집고 가는 것이 타당해 보이는데, 에라스무스가 《우신예찬》에서도 혹여 특정 개인이나 정파를 겨눈 비판이란 누명을 피하고자 애썼듯, 격언(paroimia)이란 “잘 닦여 왕래가 잦은 길”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오랜 인류의 시간을 거치며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지침으로 불분명하면서도 상당히 유익한 진리를 오롯이 감추고 있는 널리 사용되는 통렬하고 신선한 반전을 그 특징으로 하는 말“이다. 사람들이 그 함의(含意)에 대해 수긍해 온 인간 유익의 언어라는 것이다. 결국 이 격언집은 사태와 시기에 적절하게 표리에 드러난 말을 통해 속에 감추어진 진실의 의미로 넌지시 세상을 일깨우기 위한 지혜의 다름 아니다. 사실 이 책은 에라스무스의 수준높은 유머로 인해 읽는 즐거움이 배가 되는데, 하늘을 온통 자신의 사생아들로 채운 올림포스의 유피테르(제우스)를 우매한 탕아라고 그 사유를 적시할 때면 그 재치와 기발함에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정말이지 이 사회에도 바보들이 차고 넘침을 볼 수 있는데, 자신들에게도 유복(裕福)함이 전혀 없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기애로 가득한 인간들이 뜬금없이 성조기와 태극기를 휘두르며 행복해하는 모양들에서 우신이 미소를 가득 머금는 이유는 타당할 것이다. 우신이 베푼 그 어리석음에 저들의 삶을 얼마나 즐겁게 해주는가!, 바보들이여 영원하라! 킬킬킬.

 

사실 격언집으로서 그 소임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저술이기도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에라스무스가 당대의 정치와 사회 현실에 대해 지닌 날카로운 지성, 그 비판의식에 있다. ‘연기를 팔다(Fumos vendere)'는 격언이 있는데, 처음에는 대단히 큰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사라져버리고 마는, 거짓과 과시로 뭉쳐진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에두르는 말이다. 이로부터 “연기를 판 자는 연기로 처벌한다.”로 이어지며, 역겨운 종류의 인간들로 득실거리는 권력의 주변부, 공직을 팔아먹으며, 약속된 대가로 뇌물을 받아 처먹는 연기 장사꾼들에 분노하여야 함을 역설하기도 한다. “이번만큼은 절대 관대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잘못을 피하려다 헛되이 어리석게도 다른 잘못에 빠지는 것을 ‘연기를 피하려다 불 속에 떨어진다(Fumum fugiens in ignem incidi)'라고 한다. 거듭되는 어리석음들이 벌써 6개월 째 계속되고 있음을 본다. 어쭙잖은 기득권의 그 달디 단 젖줄을 놓지 않으려고 온갖 불의한 술수를 반복해 저지르는 저들은 곧 화염에 달려드는 나방의 꼴을 면치 못하리라. 단 한 가지 일의 깊은 통찰력에 집중하는 지혜로운 이를 무수한 잔꾀들이 이길 도리가 없음을 말하는 격언도 있다. '여우는 많은 꾀를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알고 있다(Multra novit vulpres, verum echinus unum magnum)' 승냥이의 이빨도 피하는 고슴도치의 지혜를 보라!

 

눈살 찌푸리게 하는 담론가 입네 하며, TV 화면에 등장하는 신발장이들이 자신들의 직업과 전문분야와 전혀 관련도 없는 일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몽매와 교만이 얼마나 넘쳐나는가 말이다. 그리스의 유명화가 아펠레스가 자신의 그림을 행인들이 볼 수 있도록 걸어 놓았다. 어느날 지나가던 신발장이가 그림 속 신발 끈을 넣을 구멍이 너무 작게 그려진 것을 보고는 그림의 묘사가 틀렸다고 지적했다. 아펠레스는 그 지적을 듣고는 그림을 수정해 구멍을 정상적으로 그려 넣었다. 수정된 그림을 본 신발장이는 우쭐해서 이번에는 발이 잘못되었다고 지적질을 했다. 이때 아펠레스는 신발장이에게 “신발장이는 신발에만 왈가왈부할 일이다.”라고 응답했다는 이야기에서 기원하는 “신발장이는 신발을 넘어서지 말라”는 격언을 생각해 볼 일이다.

 

내과의사란 자가 국가 경제정책 논의의 자리에서 분수도 모르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생물학자라는 자는 정당정치와 헌법을 얘기한다. 물론 국민으로서 말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담론 권력을 휘두르며, 대중에 올바른 정보의 판단을 가능케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정말이지 우습기 그지없는 방자함이랄 수밖에. 오직 상업적 이익에 열을 올리는 종편채널들의 무책임한 방송정책이 한국사회의 전반적 지식정보수준을 상당히 후퇴시켰다고 보아도 될 것 이다. 이제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는 언론의 사명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어(死語)가 되어버렸다.

 

'원숭이가 자주색 관복을 입는다(Simia in purpura)'고 원숭이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일 게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식,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징을 걸친다고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자주색 관복에 현혹되어 속을 수도 있을 테지만, 곧 그 속임수는 들통나버린다. 바 로 지금 우리네가 답답하고 울화가 치미는 것이 바로 이 속임수에 넘어간 인간들로 인해 불필요하게 치러야 하는 홍역 아니겠는가. 자주색 관복으로 가장하고 이 나라를 저희들 뜻대로 주물럭거리며 국민을 기망해 온 것이 어언 70여 년이다. 이제 저것들에게서 겉옷과 장식을 걷어내고 그야말로 드러난 형편없는 인간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할 터이다. 그것이 어떤 자리여야 할지는 국민이 판단 할 것이다.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16세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지성 중 의 한 명인 에라스무스의 이 절절하고 예리한 통찰력이 웃음과 재치로 넘쳐나는 해학과 수많은 사상의 편린들로 엮여 인간과 인간사회에 팽배한 그 어리석음에 거대한 한 방을 때린다. 그야말로 인류 최고의 풍자극이라 할 그의 대표작 《우신예찬》과 함께 인간 공동체의 실체를 다시금 반추해보는 것도 썩 괜찮은 독서가 되어 주리라. 자 이제 실제 능력을 증명해 보일 때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atus)" 떠벌리고 과시하기만 할 뿐, 능력을 입증해보이지 못하는 자들은 이제 그 자리에서 스스로 떠나라. 지금이 그럴 때이다. 막사발 자랑은 이제 그만 됐다. 때를 가려라!(Nosce tem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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