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다. 사실 그전에 <압살롬, 압살롬>과 <성역>을 동시다발적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정작 처음으로 읽은 포크너의 책은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로 기록되게 되었다. 아 그리고 보니 정말 오래 전에 <소리와 분노>에도 도전하지 않았었나. 어제 서가 정리를 하다가 <소리와 분노>를 찾아서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더라. 아마 완독하지 않아서라고 해두자.
예전에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저작권이 잠시 풀렸을 적에 포크너의 책들도 그랬다고 하지 않았나. 그 시절에 사둔 책들인지 어쩐지 모르겠다. 헤밍웨이의 책들은 우수수 출간된 것 같은데, 포크너는 우리나라에서 그만큼 인기가 없어서 그런지 몇 권이 없는 것 같다. 일단 보유하고 있는 책부터 하나씩 읽어야지 싶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 “나”는 소설 초반에 죽는 번드런 집안의 엄마 애디다. 어머니가 예전에 하시던 말씀이, 내가 죽어서 누워서 집안 돌아가는 꼴을 봐야 하는데라고 자주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아마 병에 걸려 열흘 정도 앓고 갑자기 죽은 애디 번드런 여사의 경우도 그렇지 않았을까.
이십대 후반의 장남 캐시는 엄마가 죽지도 않았는데, 엄마의 부재를 대비해서 관을 만들고 있다. 아니 벌써부터 콩가루 집안의 향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그리고 제퍼슨 출신의 애디 여사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이 죽으면 고향인 제퍼슨에 꼭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번드런 집안 5남매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는 셈이다.
애디 여사가 죽고 나서 바로 폭우가 쏟아지면서 제퍼슨으로 가기 위한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가 무너져 버렸다. 엄마의 관을 마차에 싣고 제퍼슨으로 향하려던 번드런 식구들의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계절은 미시시피의 무더운 7월 즈음이다. 워낙 가난해서 시신에 방부제를 넣을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하면서, 나중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에 이른다.
가장 앤스 씨는 융통성이라고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이다. 번드런 집안의 우환을 아는 이웃 버논 툴과 이웃들이 번드런 집안에 장례 행렬에 숙소와 먹을 것을 제공하려 하지만, 앤스 씨는 그런 호의들을 모두 거절하고 헛간이나 야외에서 지내겠다고 고집한다. 경야를 한다는 차원에서 어느 정도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모두 59개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매 이야기마다 주인공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들의 시선으로 사건 사고를 바라보는 관점들로 서사가 진행된다. 이런 구성 때문인지 소설의 절반 정도까지는 정말 순식간에 따라가지 않았나 싶다.
소설의 모든 구성원들은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번드런 집안의 유일한 딸인 듀이 벨(17세)은 레이프라는 남정네와 정분이 나서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레이프는 듀이 벨에가 10달러를 주면서 약국에 몰래 가서 임신중절약으로 아이를 지우라고 말한 모양이다. 그래서 제퍼슨으로 가는 길에 듀이 벨은 수시로 약국에 들러 보지만, 역시 남부답게 의사들은 그런 불법적인 약의 판매를 거부한다. 결국 이사한 놈팡이에게 걸려 이용당하게 되는 듀이 벨. 예나 지금이나 이런 나쁜 놈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죽은 애디 여사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바로 주얼이었다. 주얼은 번드런 농장의 힘든 일에도 불구하고, 따로 추가 노동을 해서 말을 샀다. 순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보상인 셈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중고 자동차를 한 대 구입한 거라고 할까. 엄마 애디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주얼은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다. 막둥이 바더만은 엄마를 물고기라고 생각하는 철부지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달은 아마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지 아마.
내가 생각할 때 가장 문제적 인간은 바로 앤스 씨였다. 그의 고집 때문에 다리가 무너진 상태에서 여울목에서 강을 건너려다가 식구들이 몰살당할 뻔하기도 한다. 상류에서 그야말로 로켓처럼 날아오던 통나무에 마차가 박살나고, 애디 여사의 관이 강물에 떠내려 갈 뻔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 지점에서 일단 애디 여사의 관을 가매장했다가 나중에 이장하는 방법도 있는데, 다른 계절도 아니고 푹푹 그 여름날에 제퍼슨 행을 고집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모든 식구들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말이다.
이 무능력한 가장은 죽은 고인의 장례 행렬을 유지하기 위해 장남이 축음기를 사겠다고 꼬불쳐둔 돈을 빼았고, 듀이 벨에게 반드시 필요한 돈마저 양심의 거리낌 없이 강탈하지 않았던가. 어머니가 죽은 마당에 식구들을 절대적으로 보살펴야 하는 가장이 하는 결정과 판단마다 가족들을 위험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다. 소설의 엔딩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애디 여사의 관점에서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어쩌면 타나토스행 그리니까 죽기 위해서가 아닌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너무나 숙명적인 그런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우리가 먹고 성장하고, 사유하고 싸우고 또 노동하는 이유가 결국에 가서는 죽기 위한 일련의 준비 과정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하긴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 죽은 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산 사람들이 치르는 희생을 보면 또 할 말이 없어지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번드런 가족들이 고인에 대한 애정이나 의리가 있는 건 또 아닌 것처럼 보인다. 당장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들부터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번드런 가족의 제퍼슨행은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될 가족 해체에 대한 전주족이 아니었을까? 이미 둘째 아들 달은 헛간 방화사건으로 경찰에게 체포되어 잭슨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지 않았던가. 다리를 다친 장남 캐시를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콘크리트 부목을 만드는 장면도 기가 찼다. 이러다가 멀쩡한 사람 잡겠구나 싶어서 말이다.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1930년 발표된 작품이다. 전후 아찔할 정도의 경제적 호황과 더불어 불과 1년 전에 시작된 경제공황으로 영원할 것만 같았던 미국의 호경기는 천당과 나락을 오가는 그런 시절이었다. 가난한 번드런 가족은 관을 실은 마차로 제퍼슨으로 향하지만, 그 시절에도 이미 자동차가 있었다. 제퍼슨 시내에 번드런네가 등장했을 때, 참을 수 없는 시취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거의 적선하다시피 해서 그들을 마을에서 내쫓는 장면은 희비극의 정점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빠질 수 없는 빈부의 격차는 다양한 방식으로 소설에서 보여진다.
앤스 씨의 비열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엔딩 시퀀스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현재를 다루면서, 도대체 번드런 집안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드러내는 플래시백의 조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제는 기대할 수 없게 된 불행을 접한 번드런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돕겠다고 나서는 이웃들의 따듯한 마음은 미시시피 출신 작가의 자부심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른 작품에서 보여지는 남부의 내재된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는 또 반대일지도 있겠지만.
벌써 4월이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다음 달에는 읽다만 포크너의 <압살롭, 압살롬>과 <성역>을 마저 읽어야지. 그리고 보니 <성역>도 사두긴 했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어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다 읽고 나서 포크너 최고의 역작이라는 <소리와 분노>도 읽기 시작했는데, 아직 몰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럴 땐 너튜브의 도움을 좀 받아야 하나 어쩌나. 어쨌든 포크너의 첫 책으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대단히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