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포스팅은 제가 어떻게 해서 "즐겁게 춤을 추다가"라는 책을 사게 되었는가에 대한 추억입니다. 사진의 맨 왼쪽 끝에 보이는 책.)
나는 기형도가 살아 있는 동안, 가장 빛나고 푸른, 아니 이 말은 틀렸다, 오만과 독선의 이빨로 서로를 물어뜯을 수 있는 대학 시절을 함께 보냈다. 쉽게 말해 목욕탕에 함께 갈 수 있는 사이였다. 그래서 내가 제정신으로 여기 늘어놓을 수 있는 추억담은 아주 적다.
하얀 키보드와 바다색 모니터 화면을 앞에 두고 손을 꺾으며 내가 떠올리는 것은 기형도의 수동타자기다. 우리는 대학 시절, 학교 신문에서 공모하는 무슨 문학상을 받아 타자기와 세계문학 전집을 들여놓은 공통된 경험이 있다. 기형도는 나보다 먼저 상금을 타서 수동타자기와 세계문학전집을 들여놓고 배부른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너도 상금 받으면 먼저 책하고 타자기부터 사. 눈 딱 감고."
글쎄, 나는 상을 받기도 전, 상금은 내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술값으로 미리 다 써버리고 말았다.그리고 그 해에 내가 받은 상금은 그가 그 전해에 받은 것의 반이었다. 가작에 해당하는 상금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충고는 잊지는 않았다. 청계천에서 그가 산 반값으로 같은 세계문학전집을 샀고 그가 산 수동타자기의 값으로 중고 전동타자기를 샀고, 어쨌든 그 타자기와 문학전집의 덕으로 나는 다음해 그보다 조금 상금이 많은 무슨 문학상을 받아 술값으로 마음 놓고 다 써버렸다. 그때는 상금이 내 것이나 다름없다는 흰소리 따위는 하지 않고 조용히. 그와 나 둘 중에서 누가 장사를 잘했는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이런 것이 내가 썼으면 싶은 추억담이다. 당연히 부정확하고 주관적인 데다 시시콜콜하다.
(중략)
세월은 가고 이름은 남았다. 추억은 경멸할 만한 것이다. 그것에 먹히는 한은.
가볍게 내리는 비처럼 머리를 두드려 깨우는 추억은 아름답다.
우리가 함께 살아 있는 동안.
기형도, 삶의 공간과 추억에 대한 경멸
-성석제
얼마전 오랜만에 기형도 추모문집인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를 다시 읽다가 깜짝 놀랐다.
성석제 작가가 쓴 기형도 시인에 관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엇, 성석제 작가가 기형도와 아는 사이였나?" 하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시초문이었다.
이 추모문집을 수차례 읽으면서 나는 <성석제>라는 이름 석자에 쥐똥만큼의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 당시엔 눈의 촉수를 환하게 밝히고 온통 <기형도>시인에 촛점을 맞춰 읽다보니 이 책을 공동 지필한 다른 작가들의 이름은 빨리 지나가는 배경 정도로 읽혔던 것이다.
공중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일을 보고 있음>을 바깥사람에게 알리는 '나직한 기침 소리' 만큼의 존재감도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면 -장담컨데- 분명 달랐을 것이다.
문득 <사람은 누구나 제 시선이 지니고 있는 깊이와 넓이만큼으로 밖에는 타인을 검증하지 못한다>는 아무개의 말과, <자신이 볼 수 있는 한계가 우주의 한계>라는 누군가의 말이 어느쪽이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불필요하게도, 갑자기 성석제 작가에게 미안한 감정마저 들었다.
그의 작품을 다 읽지는 못했었도, 이제는 조심스럽게 <좋아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는데,그때 당시에는 좋아하던 기형도 시인의 그늘에 가려 그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작가에게 죄송한 마음을 씻기 위해서
그날 오후에 서점에 들려 그의 책 한권을 서둘러 샀다.
작게나마 보탬이 되어 드리고 싶었다.

(사실 성석제 작가님은 작가와의 만남에도 참가했을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분입니다.)

( 싸인해주시는 작가님. 이 날(2007년 9월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4권이나 서명을 받아내려는 탐욕을 보이면서, 저는 수줍게 <팬입니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포스팅하다보니, 흠..추억에 잠시 잠기게 되는군요.
편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기위해 갑작스럽게 사표를 내는 장면이 저에게는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