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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신분석 이론과 실천에 대한 다른 접근방법들을 잘 알아보려고 하다가 분석가들이 흔히 서로의 저술에 대해 서투른 독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P.519)

 

브루스 핑크는 각 분석가들은 서로의 이론에 대해서 거의 ‘서투른 독자’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분석가의 기표를 빌려와 자신만의 의미로 썼다는 것이다. 각 학자들은 이론의 구축 속에서 ‘유명 분석가의 등 뒤에서 숨을 곳을 찾아내고 뒷문으로 용어를 들여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도 많은 저자들이 2차 문헌만을 통하여 지식을 획득하였고, 저자들의 저술에 대해서는 ‘자명하거나 널리 합의되어 논평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텍스트와 상당한 틈새가 드러난 것을 알게 되었고, 주요 분석가들의 원문에 접근하는 것 밖에 이 구멍을 채울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핑크교수는 이 책에서 각 학파의 이론을 정리하고, 계보를 보여주었다. 정신분석 개념들의 역사와 발전에 관한 연구는 그 영역의 확고한 파악을 위해 필요한 일이기에, 이차서적을 읽기보다는 프로이트, 클라인, 위니캇, 비온 등의 분석가들의 저술에 직접 접근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 2차서적을 통해 오독을 감수할 것인가? 부족하지만 원문에 접근하여 그 ‘맛’만 볼 것인가? 나의 경우 수박 겉핡기식으로 다른 학파의 이론을 우회적으로 접근해 보지만,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에서 각 학파의 주요 학자들의 이름 정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런 식의 이해가 또 하나의 고정관념을 만드는 것일 수 도 있을 것이다. 챗지피티의 등장으로 우리는 이제 텍스트를 읽어 개요를 긁어내는 것 아니라, 개요를 읽고 텍스트를 읽는 독서방식이 채택하기도 한다. 여러모로 ‘이해’라는 쉬운 길을 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의미의 전달, 해석의 차원을 유한한 상상계적인 것으로 본다. 우리가 의미와 개요만을 취하는 사이에 주체는 소외되는 것이 아닐까? AI는 무의식이 없지만, 대타자의 언어를 사용하여 인간을 상담할 지경에 이르렀다. AI가 말아주는 정신분석은 결락 없는 언어구사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텅빈 말’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사용으로 남는 시간을 새로운 은유를 발명하는데 써야 한다.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영역은 '은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시간이 없는게 아니라, 텍스트가 주는 무의식적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닐까? 기표가 인간의 무의식을 변화시킨다. 꽉찬 말을 가진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의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대타자로서의 무의식은 현상을 붙잡고 놓지 않지만, 실재적 무의식은 끊임없이 불안을 양산하여, 뭐든 하게 만든다. 

프로이트로부터 시작해 현대정신분석에 이르기까지, 정신분석은 몇 개의 주류로 나뉘어져 왔다. 라깡정신분석은 “현재 정신분석의 주류 속성(전이, 역전이, 성격분석, 정동우세, 전문적인 중립성)에 반대되고, 주체상호주의-대인관계-자기심리학파의 속성으로 간주했던 많은 테크닉)에도 반대한다.”고 핑크는 말한다. 정신분석은 미국 뿐아니라 영국학파와도 수렴될 수 없을 것이며, 그 차이는 너무 구조적이여서 돌이킬 수 없는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이론 각 학파의 고유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렴점을 찾고 싶어한다. 수렴은 안정이기 때문일까? 브루스 핑크는 9장에서 정상화를 다루면서 정상성이란 각자의 정상성 밖에 없다고 말하듯이, 각 이론의 정상성에 대한 논의은 어쩌면 부질 없다. 그렇다고 정신분석의 다원주의, 통합이라는 늪도 경계해야 할 듯하다. 각자가 뾰족하게 정밀한 테크닉을 세공하는 장인정신이 필요한 영역인 것이다.

 

브루스 핑크에 따르면 영어권은 테크닉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지만, 불어권의 분석가들은 전염병처럼 피한다고 말한다. 특히 라깡학파는 그러하다. 영어권 임상가들은 라깡식의 테크닉이 무엇인지 모르고 라깡의 방식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라깡의 테크닉의 실제는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체적 기술같은 것은 전수되지 않지만, 핑크교수는 정신분석테크닉에서 ‘신경증 환자들로 하여금 억압되어 왔던 것에 도달되어야 한다’는 목표와 ‘무의식의 충격을 주는 지도원리’는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환자들은 오이디푸스 해석에 익숙해져 충격의 가치가 사라진 것처럼 무의식의 진화와 더불어 정신분석의 테크닉 역시 계속 진화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은 계속해서 해체하고 다시 진화하여야 한다. 

알려진 테크닉은 이미 무용한 테크닉이기 때문이다. 한번 발명된 테크닉은 바로 대타자에게 흡수된다. 유일한 테크닉이라면, 정신분석작업은 전이, 해석을 넘어 내담자 스스로 발명한 테크닉만이 남는 곳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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